결실의 아픔/정용진 시인/중앙일보
2014.10.26 07:34
결실의 아픔
2014년10월25일(토)/중앙일보 정용진 시인
10월이 깊어지면서 가을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하늘을 찌르며 푸르게 솟아오르던 과목들이 달려가던 걸음을 멈추고, 떫은 과즙에 단물이 고이면서 과피(果皮)의 색깔이 선명해지고 나뭇잎들이 갈색으로 변하더니 하나 둘 낙엽을 떨구며 가을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선인들은 봄에는 갈고 심으며, 가을에는 거두어들이고, 겨울에는 갈무리하는 계절이라고 일렀다. 언 땅을 가르고 솟는 생명의 열기를 느낀 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가을이 깊었는가, 갈가마귀 떼들이 텅 빈 하늘을 줄지어 선회한다.
서예의 대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호를 여럿 가지고 있었던 분으로 유명한데 활동이 왕성하던 시절에는 천추만세(千秋萬世)의 깊은 의미가 담겨있는 듯 한 추사(秋史)라는 호를 즐겨 쓰더니 말년에는 노과(老果)를 애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젊은이에게는 청운의 꿈이 솟구쳐야하고, 장년기에는 패기가 넘쳐 흘러야하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조용히 성숙하면서 은은한 인생의 향기가 풍겨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노인들은 바쁘게 살아온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자신들이 외롭고 허전하고 고독하다고 스스로 느낀다. 이것이 곧 인생 결실의 아픔이 아닌가?
주자학의 창시자 주자(朱子. 朱熹)는 인간의 삶 속에 열 가지 후회되는 일을 열거한 가운데 봄에 심지 아니하면 가을에 거두어드릴 것이 없어서 후회하고, 젊어서 배우지 아니하면 늙어서 아는 것이 없어서 후회 한다.(少不勤學-春不耕種 老後悔)고 일렀다.
일생 일회의 진지한 삶을 소리만 요란한 뻥튀기로 살 수는 없다. 속은 비어있고 겉만 화려한 외화내허(外華內虛)의 병은 자신은 물론 이웃들도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울 가에 말없이 성숙해가는 과일들은 한여름 단비를 기다리는 인내로 뜨거운 계절을 견디고, 소슬한 가을바람을 접하면서 가슴속에는 또 하나의 내일을 위하여 알알이 영근 씨앗들을 갈무리하고 있다. 실패 뒤에 성공이 있듯, 결실에도 고통이 따른다. 푸른 잎들과 땅속 깊이 뻗은 뿌리들은 온갖 영양분을 공급하여 과일들을 성숙 시키고 자신들의 임무를 완성하였다는 듯이 조용히 모토로 돌아가고 있다. 이것이 곧 낙엽귀근(落葉歸根)의 고귀한 신의 섭리가 아닌가, 자연의 풍광을 바라보면 소리 없이 한 잎 두 잎 지는 정경들은 얼마나 아름답고 장엄한가. 참으로 가슴이 뜨거워진다.
봄이 온간 꽃들이 흐무러지게 피어 서로의 모양을 뽐내는 백화난만(百花爛漫)의 외형적 계절이라면, 가을은 분명 흐트러졌던 자신의 매무새를 바로잡고 내실을 다지는 결실의 계절이기에 선인들도 하늘은 높고 말도 살찌는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이르고 등불을 가까이하고 책을 읽어 영혼을 살찌우는 등화가친의 교훈을 남겨 주었다.
여름은 해가 긴 장장하일(長長夏日)이고, 가을은 밤이 긴 추야장장(秋夜長長)이 그 특징이다. 가난한 처지에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하고 주야로 학업에 정진하는 것을 주경야독(晝耕夜讀)이라하고, 스스로 생업을 개척하면서 학문에 열중하는 모습을 청경우독(晴耕雨讀)이라 하여 높은 경지로 우러렀으며 삼국지에서도 유비를 만나기 전에는 제갈량이 심취한 장면이기도하다. 젊은 시절 그러한 깊은 몰두가 있었기에 그는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를 갖춘 유비(劉備)의 군사(軍師)가 될 수 있었다.
성현 공자는 학문의 깊은 자세로 혁피삼절(革皮三絶)을 강조 하였다. 책 표지를 쇠가죽으로 씌워서 세 번이 달토록 읽으라는 뜻이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공항 대합실이나 길을 걸으면서도 스마트 폰을 두드리느라 혼을 빼앗기고 있으니 앞으로 이들이 과연 어떻게 처신하면서 살아갈지 실로 걱정이 앞선다. 편리가 속빈 강정의 인간들로 만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이 시대에게 묻고 싶다.
시인 레미 드 구르몽의 명시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의 물음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시인의 마음속에는 봄의 아름다운 정경과 가을의 서정이 항상 물결처럼 출렁이고 있다. 옛 시인 도연명은 사계의 풍경을 이렇게 읊었다.
봄물은 못마다 가득하고(春水滿四澤), 여름 구름은 묘한 봉우리를 이루었도다.(夏雲多奇峯) 가을 달은 유난히도 밝은데(秋月陽明輝) 겨울 산마루에 소나무는 외롭기도 하구나(冬嶺秀獨松), 이것이 참 자연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우리 모두는 이 가을이 저물기 전에 성숙과 결실의 아픔을 넘어 스스로 풍만한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자. 세월은 결코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한다.
2014년10월25일(토)/중앙일보 정용진 시인
10월이 깊어지면서 가을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하늘을 찌르며 푸르게 솟아오르던 과목들이 달려가던 걸음을 멈추고, 떫은 과즙에 단물이 고이면서 과피(果皮)의 색깔이 선명해지고 나뭇잎들이 갈색으로 변하더니 하나 둘 낙엽을 떨구며 가을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선인들은 봄에는 갈고 심으며, 가을에는 거두어들이고, 겨울에는 갈무리하는 계절이라고 일렀다. 언 땅을 가르고 솟는 생명의 열기를 느낀 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가을이 깊었는가, 갈가마귀 떼들이 텅 빈 하늘을 줄지어 선회한다.
서예의 대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호를 여럿 가지고 있었던 분으로 유명한데 활동이 왕성하던 시절에는 천추만세(千秋萬世)의 깊은 의미가 담겨있는 듯 한 추사(秋史)라는 호를 즐겨 쓰더니 말년에는 노과(老果)를 애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젊은이에게는 청운의 꿈이 솟구쳐야하고, 장년기에는 패기가 넘쳐 흘러야하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조용히 성숙하면서 은은한 인생의 향기가 풍겨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노인들은 바쁘게 살아온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자신들이 외롭고 허전하고 고독하다고 스스로 느낀다. 이것이 곧 인생 결실의 아픔이 아닌가?
주자학의 창시자 주자(朱子. 朱熹)는 인간의 삶 속에 열 가지 후회되는 일을 열거한 가운데 봄에 심지 아니하면 가을에 거두어드릴 것이 없어서 후회하고, 젊어서 배우지 아니하면 늙어서 아는 것이 없어서 후회 한다.(少不勤學-春不耕種 老後悔)고 일렀다.
일생 일회의 진지한 삶을 소리만 요란한 뻥튀기로 살 수는 없다. 속은 비어있고 겉만 화려한 외화내허(外華內虛)의 병은 자신은 물론 이웃들도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울 가에 말없이 성숙해가는 과일들은 한여름 단비를 기다리는 인내로 뜨거운 계절을 견디고, 소슬한 가을바람을 접하면서 가슴속에는 또 하나의 내일을 위하여 알알이 영근 씨앗들을 갈무리하고 있다. 실패 뒤에 성공이 있듯, 결실에도 고통이 따른다. 푸른 잎들과 땅속 깊이 뻗은 뿌리들은 온갖 영양분을 공급하여 과일들을 성숙 시키고 자신들의 임무를 완성하였다는 듯이 조용히 모토로 돌아가고 있다. 이것이 곧 낙엽귀근(落葉歸根)의 고귀한 신의 섭리가 아닌가, 자연의 풍광을 바라보면 소리 없이 한 잎 두 잎 지는 정경들은 얼마나 아름답고 장엄한가. 참으로 가슴이 뜨거워진다.
봄이 온간 꽃들이 흐무러지게 피어 서로의 모양을 뽐내는 백화난만(百花爛漫)의 외형적 계절이라면, 가을은 분명 흐트러졌던 자신의 매무새를 바로잡고 내실을 다지는 결실의 계절이기에 선인들도 하늘은 높고 말도 살찌는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이르고 등불을 가까이하고 책을 읽어 영혼을 살찌우는 등화가친의 교훈을 남겨 주었다.
여름은 해가 긴 장장하일(長長夏日)이고, 가을은 밤이 긴 추야장장(秋夜長長)이 그 특징이다. 가난한 처지에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하고 주야로 학업에 정진하는 것을 주경야독(晝耕夜讀)이라하고, 스스로 생업을 개척하면서 학문에 열중하는 모습을 청경우독(晴耕雨讀)이라 하여 높은 경지로 우러렀으며 삼국지에서도 유비를 만나기 전에는 제갈량이 심취한 장면이기도하다. 젊은 시절 그러한 깊은 몰두가 있었기에 그는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를 갖춘 유비(劉備)의 군사(軍師)가 될 수 있었다.
성현 공자는 학문의 깊은 자세로 혁피삼절(革皮三絶)을 강조 하였다. 책 표지를 쇠가죽으로 씌워서 세 번이 달토록 읽으라는 뜻이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공항 대합실이나 길을 걸으면서도 스마트 폰을 두드리느라 혼을 빼앗기고 있으니 앞으로 이들이 과연 어떻게 처신하면서 살아갈지 실로 걱정이 앞선다. 편리가 속빈 강정의 인간들로 만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이 시대에게 묻고 싶다.
시인 레미 드 구르몽의 명시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의 물음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시인의 마음속에는 봄의 아름다운 정경과 가을의 서정이 항상 물결처럼 출렁이고 있다. 옛 시인 도연명은 사계의 풍경을 이렇게 읊었다.
봄물은 못마다 가득하고(春水滿四澤), 여름 구름은 묘한 봉우리를 이루었도다.(夏雲多奇峯) 가을 달은 유난히도 밝은데(秋月陽明輝) 겨울 산마루에 소나무는 외롭기도 하구나(冬嶺秀獨松), 이것이 참 자연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우리 모두는 이 가을이 저물기 전에 성숙과 결실의 아픔을 넘어 스스로 풍만한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자. 세월은 결코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