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피는 꽃
2005.05.06 13:39
세상 모든 꽃들이 기억으로 남는 절차가 떠오른다. 꽃이 누가 보거나 말거나 악착같이 독존하는 붙박이 코닥컬러 사진일 수는 없지 않은가. 꽃은 보는 것과 보이는 것들의 노예인 우리가 잡고 늘어지는 현존의 복사체.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하며 당신이 주문처럼 뇌까리는 꽃의 복사체는 죽었다 깨어나도 실존이 아니야. 미안하다.
실존은 기억 속에서만 살아난다. 소중한 순간순간들, 부질없는 역사를 소리 없이 기록하는 꽃이 내 전부일 것이다. 꽃은 추억의 블랙 홀 속으로 완전히 흡인돼 버렸어. 저 아프도록 아슬아슬한 장면장면들.
밤에 피는 꽃은 생각지도 않던 어린 시절 불알친구와 꿈에 나누는 대화다. 반세기 전쯤에 야, 이놈아! 하던 친구 모습이 떠오르네. 밤에 피는 꽃은 한 순간 찌르르 당신 코 밑으로 부서지는 향기가 아니야. 밤에 피는 꽃은 망각 속에서 후루루 돌아가는 영상이다. 끝내는 약속처럼 잊혀지는 몸짓이다.
꽃 한 송이가 비단이불을 턱까지 덮고 죽은 듯 편안하게 누워있네. 잠간 숨을 몰아 쉬면서 오른쪽 팔을 좀 움직였을까? 지난밤 머리를 두었던 곳에 발이 두 개 놓여 있고 발바닥을 대담하게 수직으로 세웠던 자리에 커다란 머리가 옆으로 얹힌 아침이 밝아오네. 간밤에 어디 바람이 심하게 부는 세상을 쏘다니다 왔구나! 머리가 쑥밭이 된 낯익은 얼굴.
© 서량 2005.03.18 (문학사상, 2005년 5월)
댓글 0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10419 | 도리깨질 리더같은 농촌지도자룰 | 정찬열 | 2004.12.14 | 249 |
10418 | 봉숭아 | 차신재 | 2014.10.01 | 248 |
10417 | 너에게 나는 투명해지고 싶다 | 홍미경 | 2004.07.31 | 248 |
10416 | 나그네의 향수, 존재의 소외 / 박이도 | 홍인숙 | 2004.07.30 | 246 |
10415 | 내 안의 그대에게 (1) | 홍인숙(그레이스) | 2004.07.30 | 246 |
10414 | 손망원경 | 오연희 | 2005.06.15 | 244 |
10413 | 잉꼬부부 / 석정희 | 석정희 | 2006.01.10 | 243 |
10412 | 내가 읽은 시집 / 함동진 | 홍인숙(그레이스) | 2004.12.06 | 242 |
10411 | JC에게 보낸 편지 3/14/07 | 이 상옥 | 2007.03.13 | 241 |
10410 | 길을 걷다보면 | 오연희 | 2004.11.17 | 241 |
10409 | 인사동 연가 | 오연희 | 2005.04.06 | 239 |
10408 | 한국사람 냄새 | 조만연.조옥동 | 2005.11.21 | 238 |
10407 | 이제야 사랑을 | 박경숙 | 2005.06.20 | 238 |
10406 | 안개 속의 바다 | 홍인숙 | 2004.08.02 | 238 |
10405 | 어머니와 매운 고추 | 동아줄 | 2014.12.04 | 236 |
10404 | 눈섶 위의 얼음 이마 | 김영교 | 2005.09.12 | 233 |
» | 밤에 피는 꽃 | 서 량 | 2005.05.06 | 233 |
10402 | 가을에 띄우는 편지 | 조만연.조옥동 | 2004.11.28 | 233 |
10401 | 별 똥 별 | 정해정 | 2006.02.15 | 231 |
10400 | 숲속의 정사 | 박영호 | 2004.09.12 | 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