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나의 마음을 그곳으로 달려가게 하는가/윤효숙
2014.01.24 06:38
무엇이 나의 마음을 그곳으로 달려가게 하는가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윤효숙
뿌연 흙먼지 속에서 아이들의 눈동자만이 빛나고 있었다. 하나같이 쌍꺼풀진 긴 속눈썹의 아이들! 자기들과는 다른 사람들이 이런 시골에 무엇 하러 왔나 하는 호기심을 감춘 채, 그저 환히 웃는 순진무구한 어린이들! 영어와 한국어, 캄보디아어, 기타 이름 모를 글씨들이 씌어있는 티셔츠를 입고 맨발로 뛰어다니는 아이들! 오토바이에 의자를 달아 열 명도 넘는 사람들을 싣고 다니는 ‘뚝뚝이’라는 것을 타고, 자리가 없으면 매달려 다녀도 끄떡없는 아이들! 뚝뚝이만 지나가도 어느새 길은 흙먼지로 하얗게 변해 버려 먼지와 더불어 사는 아이들! 그래도 한결같이 길가에 집을 지어 날마다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써서 몸은 씻으나마나고, 신발은 신으나마나 까만 때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아이들!
며칠 전 우리 교인들 22명과 함께 캄보디아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왔다. 나라가 가난하니 전봇대가 없어 암흑 속에 사는 농가에 태양광 시설을 하여 전기를 넣어주고, 물이 부족한 가정에 펌프를 설치하여 물을 대어 주었다. 어느 가정은 화장실이 없어 화장실을 지어주기도 했다. 또 메마른 땅에 나무도 심어 주었다.
열악한 환경은 전쟁이 끝난 우리네 50년대의 모습과 흡사했다. 하지만 부지런한 우리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나의 어린 시절에도 집집마다 수도장치가 없어 하교한 뒤 공동우물에 가서 항아리에 물을 길어다 놓는 일이 나의 몫이었다. 그러다 펌프시설이 들어와 우리 집에도 펌프시설을 했었다. 펌프를 놓던 날,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종을 하나 산 것보다 나아!” 하였다. 그땐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물을 긷는 하인을 하나 둔 것보다 낫단 뜻이었다. 그런 시설을 하나 설치하는데 우리 돈으로 백만 원 정도 한다니 가난한 캄보디아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큰돈이었다. 그래도 지붕만은 개량되어 집은 번듯한 집들이 많았다. 짐승이나 우기의 침수를 대비해서 1층에 기둥을 세우고 2층에 살림집을 짓는데 부엌시설은 일 층에 있었다.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사방이 뚫어진 아궁이 위에 알루미늄 함지박을 걸어 국을 끓이고 다른 하나에서 밥을 짓는 것이 부엌시설의 전부였다. 밥그릇은 평상위에 늘어놓고 닭, 개, 소 등을 놓아먹여 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살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파리 떼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는 그래도 수도인 푸놈펜에서 가까운 농촌지역 면소재지에 해당하는 곳의 형편이었다. 다음에 간 곳은 상황이 아주 심각했다. 우리나라의 난지도처럼 쓰레기매립장에 집을 짓고 사는 ‘깜퐁짬’지역은 말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미국에서 살다가 미국교회의 후원으로 유치원을 경영하는 70세 된 H선교사가 매주 현지 유치원교사들과 함께 두 개의 천막을 치고 남녀 구분하여 몸을 씻기고 예배와 간식을 준다고 했다. 그날은 간 김에 우리가 그 일을 하기로 했다. 그 중에 씻지 않으려고 떼를 쓰는 아이가 있어 머리만 감기는 소동도 있었다. 몇 년 있으면 재개발로 헐릴 형편이라 펌프시설도 해줄 수 없어 안타까웠다. 청소년과 어른들의 몸 찬양. 바이올린 연주, 팬터마임, 설교 등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시간동안 미동도 없이 모두 집중하는 모습이 마치 스펀지에 물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들이 어디서 이런 문화공연을 접해 봤겠는가? 그들의 눈빛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천진한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어른들도 모두 나와서 웃고 즐기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어둡고 가난했던 우리나라의 옛 모습이 떠올랐다. 미국의 교인들은 힘을 모아 우리나라에 병원과 학교를 지어주었다. 또한 구호물자와 옥수수 죽이나 빵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미군이 타고 가는 지프차를 향해 “기브 미 더 초콜릿”하면 그들은 초콜릿이나 껌들을 던져 주었다. 물론 미군들로 인해 양공주나 혼혈아 등 부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우리도 그런 아픈 시절이 있었다. 지금의 우리나라가 국민소득 2만불 시대로 접어든 것은 어쩌면 도움을 받는 국민에서 도움을 주는 국민으로 살라는 거룩한 부담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의 국력이 좋아져서 ‘코이카’라는 기술 지원단을 파견하여 후진국을 도와주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봉화면장을 지냈다는 L씨는 코이카단원으로 와서 주민복지회관(일명 보건소)을 지어주었다. 그런데 건물만 있지 운영할 자금이 없어 염려하며 우리 교회에서 현지인 간호사 봉급과 약품 제공비로 일정액을 지원하여 의료선교를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자신은 7월에 귀국해야 하는데 그 이전에 빛을 보게 하고 싶은 마음에 두 번이나 부탁했다. 우리교회에서는 건물을 사용할 수 있고 현판도 붙일 수 있다고 했다. 교회에서 회의를 거쳐 생각해 볼 일이다 싶었다. 자신들이 암흑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암흑인 줄도 모르는 캄보디아인들! 저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어야만 좀 더 나은 환경이 될 수 있을까? 예수님을 알려 영혼을 살리고 학교와 의료선교로 도우면 될까? 예전의 우리나라가 그랬듯이 그러면 그들도 우리처럼 잘 살게 될까?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여행은 많이 해 보았어도 선교경험이 없어 고생할 각오로 참여했지만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발과 미용, 바디페인팅이라도 배워서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도 했었다. 그러나 강행군이 계속되자 체력이 달려 다음에도 참여할 수 있을지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지금 나의 마음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오직 그들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아이 낳은 어머니들이 낳는 고통을 잊어버리고 또다시 낳는 것처럼 어느새 ‘다음에는 아이들과 어른들 옷가지도 좀 챙겨 가고, 학용품도 더 많이 가져가고……. 흙먼지 속에서 뒹굴었으면서도 어느새 내 마음은 벌써 캄보디아에 가 있다. 무엇이 내 마음을 뜨겁게 달구고 또 그곳으로 달려가게 하는 것일까?
(2014.1.24. 캄보디아에 선교를 다녀와서.)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윤효숙
뿌연 흙먼지 속에서 아이들의 눈동자만이 빛나고 있었다. 하나같이 쌍꺼풀진 긴 속눈썹의 아이들! 자기들과는 다른 사람들이 이런 시골에 무엇 하러 왔나 하는 호기심을 감춘 채, 그저 환히 웃는 순진무구한 어린이들! 영어와 한국어, 캄보디아어, 기타 이름 모를 글씨들이 씌어있는 티셔츠를 입고 맨발로 뛰어다니는 아이들! 오토바이에 의자를 달아 열 명도 넘는 사람들을 싣고 다니는 ‘뚝뚝이’라는 것을 타고, 자리가 없으면 매달려 다녀도 끄떡없는 아이들! 뚝뚝이만 지나가도 어느새 길은 흙먼지로 하얗게 변해 버려 먼지와 더불어 사는 아이들! 그래도 한결같이 길가에 집을 지어 날마다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써서 몸은 씻으나마나고, 신발은 신으나마나 까만 때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아이들!
며칠 전 우리 교인들 22명과 함께 캄보디아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왔다. 나라가 가난하니 전봇대가 없어 암흑 속에 사는 농가에 태양광 시설을 하여 전기를 넣어주고, 물이 부족한 가정에 펌프를 설치하여 물을 대어 주었다. 어느 가정은 화장실이 없어 화장실을 지어주기도 했다. 또 메마른 땅에 나무도 심어 주었다.
열악한 환경은 전쟁이 끝난 우리네 50년대의 모습과 흡사했다. 하지만 부지런한 우리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나의 어린 시절에도 집집마다 수도장치가 없어 하교한 뒤 공동우물에 가서 항아리에 물을 길어다 놓는 일이 나의 몫이었다. 그러다 펌프시설이 들어와 우리 집에도 펌프시설을 했었다. 펌프를 놓던 날,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종을 하나 산 것보다 나아!” 하였다. 그땐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물을 긷는 하인을 하나 둔 것보다 낫단 뜻이었다. 그런 시설을 하나 설치하는데 우리 돈으로 백만 원 정도 한다니 가난한 캄보디아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큰돈이었다. 그래도 지붕만은 개량되어 집은 번듯한 집들이 많았다. 짐승이나 우기의 침수를 대비해서 1층에 기둥을 세우고 2층에 살림집을 짓는데 부엌시설은 일 층에 있었다.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사방이 뚫어진 아궁이 위에 알루미늄 함지박을 걸어 국을 끓이고 다른 하나에서 밥을 짓는 것이 부엌시설의 전부였다. 밥그릇은 평상위에 늘어놓고 닭, 개, 소 등을 놓아먹여 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살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파리 떼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는 그래도 수도인 푸놈펜에서 가까운 농촌지역 면소재지에 해당하는 곳의 형편이었다. 다음에 간 곳은 상황이 아주 심각했다. 우리나라의 난지도처럼 쓰레기매립장에 집을 짓고 사는 ‘깜퐁짬’지역은 말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미국에서 살다가 미국교회의 후원으로 유치원을 경영하는 70세 된 H선교사가 매주 현지 유치원교사들과 함께 두 개의 천막을 치고 남녀 구분하여 몸을 씻기고 예배와 간식을 준다고 했다. 그날은 간 김에 우리가 그 일을 하기로 했다. 그 중에 씻지 않으려고 떼를 쓰는 아이가 있어 머리만 감기는 소동도 있었다. 몇 년 있으면 재개발로 헐릴 형편이라 펌프시설도 해줄 수 없어 안타까웠다. 청소년과 어른들의 몸 찬양. 바이올린 연주, 팬터마임, 설교 등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시간동안 미동도 없이 모두 집중하는 모습이 마치 스펀지에 물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들이 어디서 이런 문화공연을 접해 봤겠는가? 그들의 눈빛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천진한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어른들도 모두 나와서 웃고 즐기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어둡고 가난했던 우리나라의 옛 모습이 떠올랐다. 미국의 교인들은 힘을 모아 우리나라에 병원과 학교를 지어주었다. 또한 구호물자와 옥수수 죽이나 빵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미군이 타고 가는 지프차를 향해 “기브 미 더 초콜릿”하면 그들은 초콜릿이나 껌들을 던져 주었다. 물론 미군들로 인해 양공주나 혼혈아 등 부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우리도 그런 아픈 시절이 있었다. 지금의 우리나라가 국민소득 2만불 시대로 접어든 것은 어쩌면 도움을 받는 국민에서 도움을 주는 국민으로 살라는 거룩한 부담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의 국력이 좋아져서 ‘코이카’라는 기술 지원단을 파견하여 후진국을 도와주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봉화면장을 지냈다는 L씨는 코이카단원으로 와서 주민복지회관(일명 보건소)을 지어주었다. 그런데 건물만 있지 운영할 자금이 없어 염려하며 우리 교회에서 현지인 간호사 봉급과 약품 제공비로 일정액을 지원하여 의료선교를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자신은 7월에 귀국해야 하는데 그 이전에 빛을 보게 하고 싶은 마음에 두 번이나 부탁했다. 우리교회에서는 건물을 사용할 수 있고 현판도 붙일 수 있다고 했다. 교회에서 회의를 거쳐 생각해 볼 일이다 싶었다. 자신들이 암흑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암흑인 줄도 모르는 캄보디아인들! 저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어야만 좀 더 나은 환경이 될 수 있을까? 예수님을 알려 영혼을 살리고 학교와 의료선교로 도우면 될까? 예전의 우리나라가 그랬듯이 그러면 그들도 우리처럼 잘 살게 될까?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여행은 많이 해 보았어도 선교경험이 없어 고생할 각오로 참여했지만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발과 미용, 바디페인팅이라도 배워서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도 했었다. 그러나 강행군이 계속되자 체력이 달려 다음에도 참여할 수 있을지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지금 나의 마음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오직 그들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아이 낳은 어머니들이 낳는 고통을 잊어버리고 또다시 낳는 것처럼 어느새 ‘다음에는 아이들과 어른들 옷가지도 좀 챙겨 가고, 학용품도 더 많이 가져가고……. 흙먼지 속에서 뒹굴었으면서도 어느새 내 마음은 벌써 캄보디아에 가 있다. 무엇이 내 마음을 뜨겁게 달구고 또 그곳으로 달려가게 하는 것일까?
(2014.1.24. 캄보디아에 선교를 다녀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