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 시인의 군산풍물기(89)
2010.07.09 08:53
최영시인의 군산풍물기(群山風物記)-(89)
복합영화관
1992.2.21일자 주간 군산신문 극장광고란에 국도극장 <언더씨즈>, 군산극장 <이꼴데드 3>, 아카데미 <미스터 맘마>, 허리우드 <후리꾼>, 코아 <캉캉 69>, 명화극장 <여락>이 나와 있습니다. 대형극장인 제일극장과 대명극장은 사라졌고 그 공간을 4개의 소극장이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1994년 극장을 관리 감독하는 공보계장이었습니다. 그 때 명산동 4거리 코아극장에서 불란서 여류 소설가 마루그리트가 쓴 소설을 장자크가 감독한 <연인>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명화극장에서 조상진 기자와 본 미국영화는 줄거리는 알겠는 데 제목을 잃어버렸습니다.
1997년 6월 어느 날 시청 정기 인사를 앞두고 사무관 승진 예상자를 4층 전산실로 모이게 했습니다. 김길준 시장의 엄명에 따라 컴퓨터 한글시험을 치렀습니다. 나를 포함한 20여 명에게 복사된 국민교육헌장을 주고 이를 한글로 치게 하는 시험이었습니다.
나는 예산계장을 하면서 노트북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이미 컴퓨터와 인터넷을 잘하고 있을 때여서 거의 100점을 맞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연 치지 못하거나 더듬거렸습니다. 시험을 치르고 한 시간 뒤쯤 염석호 씨를 만났는데 그는 내게 “최 계장님은 워낙 졸필이기 때문에 컴퓨터를 잘 친다면서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의 글씨가 졸필이긴 하지만 꼭 그래서 컴퓨터를 하는 것은 아닌데 누군가가 민감한 시기에 나의 험담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조금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시험을 주관했던 정보통신과 장경숙 씨가 “워드 잘 하시네요. 축하합니다.”하는 전화를 해주었습니다. 노병일 부시장이 나의 컴퓨터 실력을 칭찬했습니다.
1997.7.8일 나는 옥구읍장으로 승진발령되었습니다. 노상국, 마철수 씨도 나와 함께 승진되었습니다. 아끼던 노트북을 놓고 가게 되자 예산계에서 특별히 옥구읍에 노트북 구입예산을 세워주어 읍면동에서 맨 처음 옥구읍장실에 노트북을 비치케 되었습니다.
1999.3.11일 나는 개정동장으로 간 후 1999.11.1일과 2000.5.1일 두 번에 걸쳐 정부전산정보관리소에 1주일간씩 인터넷 교육을 자원해 다녀왔습니다. 그때를 전후하여 시청은 직원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전산실을 개방하여 컴퓨터를 익히게 하고 강사를 채용하여 아침마다 인터넷강의도 했습니다.
김대중 정부를 전자정부라고 할 만큼 전자화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2000년 11월 월례조회에서 이영일 국장이 각과 읍면동 전자결재 실적을 공개했는데 정보통신과를 빼놓고는 개정동이 최고였습니다. 개정동이 1,001건의 전자 결재를 했는데 타 읍면동은 거의 실적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펜 없는 행정시대가 오고 있었습니다.
2001년 봄 나는 전주 김학 형과 E-메일을 교환할 때인데 그가 홈페이지를 개설했다는 편지를 받고 깜작 놀랐습니다. 전북문인 중 가장 먼저 개설한 김학 형의 홈페이지는 다양하고 참 아름다웠습니다. 충격을 받은 나는 우리 직원 문병운의 친구 도움으로 나의 홈페이지를 개설했습니다. 나의 홈페이지 개설은 군산시청 거의 초유의 일이었습니다. 전자통신과의 김용묵이 나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 형님 놀랍습니다. 언제 그리 많은 공부를 하셨습니까?”하는 글을 올려주었던 생각이 납니다.
인터넷은 세상의 정보가 한없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각종 TV와 신문을 인터넷으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케이블 TV시대와 함께 군산에도 “군산뉴스”란 인터넷 신문이 생겼습니다. 사무실에 앉아 인터넷을 통해 극장보다 더 싸고 다양하게 영화를 보거나 집에서 케이블 채널을 통해 심야영화를 얼마든지 보는 시대가 와버렸습니다.
동장이 동장실에서 몰래 음란동영상을 보다가 여직원이 결재하러 오자 급작스레 채널을 바꾸지 못하여 쩔쩔맸습니다. 무안해진 직원은 내용을 알면서 모르는 체해주는 일이 가끔 생겼습니다. 전자시대는 많은 구질서를 파괴하면서 생성하는 것입니다.
1990년대 초 컬러 TV시대의 대안으로 군산에 소극장이 생겼습니다. 별 재미를 못보고 10년이 지나 인터넷시대가 오면서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던 두 극장과 4개의 소극장이 일제히 흔들리게 됩니다. 인터넷시대의 극장 대안은 무엇일까? 한일 월드컵 축구가 열렸던 2002년 박주일은 그의 극장인생 마지막 도박을 합니다.
예를 들어 친구 4인이 한 극장 휴게실에서 만나 차 한 잔 하고 각기 극장 안 다른 4개의 작은 방에서 각각 다른 영화를 보고 다시 휴게실에서 만날 수 있는 소위 복합영화관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터넷의 속도전에 너무 빨리 무너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2010.7.9.)
복합영화관
1992.2.21일자 주간 군산신문 극장광고란에 국도극장 <언더씨즈>, 군산극장 <이꼴데드 3>, 아카데미 <미스터 맘마>, 허리우드 <후리꾼>, 코아 <캉캉 69>, 명화극장 <여락>이 나와 있습니다. 대형극장인 제일극장과 대명극장은 사라졌고 그 공간을 4개의 소극장이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1994년 극장을 관리 감독하는 공보계장이었습니다. 그 때 명산동 4거리 코아극장에서 불란서 여류 소설가 마루그리트가 쓴 소설을 장자크가 감독한 <연인>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명화극장에서 조상진 기자와 본 미국영화는 줄거리는 알겠는 데 제목을 잃어버렸습니다.
1997년 6월 어느 날 시청 정기 인사를 앞두고 사무관 승진 예상자를 4층 전산실로 모이게 했습니다. 김길준 시장의 엄명에 따라 컴퓨터 한글시험을 치렀습니다. 나를 포함한 20여 명에게 복사된 국민교육헌장을 주고 이를 한글로 치게 하는 시험이었습니다.
나는 예산계장을 하면서 노트북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이미 컴퓨터와 인터넷을 잘하고 있을 때여서 거의 100점을 맞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연 치지 못하거나 더듬거렸습니다. 시험을 치르고 한 시간 뒤쯤 염석호 씨를 만났는데 그는 내게 “최 계장님은 워낙 졸필이기 때문에 컴퓨터를 잘 친다면서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의 글씨가 졸필이긴 하지만 꼭 그래서 컴퓨터를 하는 것은 아닌데 누군가가 민감한 시기에 나의 험담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조금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시험을 주관했던 정보통신과 장경숙 씨가 “워드 잘 하시네요. 축하합니다.”하는 전화를 해주었습니다. 노병일 부시장이 나의 컴퓨터 실력을 칭찬했습니다.
1997.7.8일 나는 옥구읍장으로 승진발령되었습니다. 노상국, 마철수 씨도 나와 함께 승진되었습니다. 아끼던 노트북을 놓고 가게 되자 예산계에서 특별히 옥구읍에 노트북 구입예산을 세워주어 읍면동에서 맨 처음 옥구읍장실에 노트북을 비치케 되었습니다.
1999.3.11일 나는 개정동장으로 간 후 1999.11.1일과 2000.5.1일 두 번에 걸쳐 정부전산정보관리소에 1주일간씩 인터넷 교육을 자원해 다녀왔습니다. 그때를 전후하여 시청은 직원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전산실을 개방하여 컴퓨터를 익히게 하고 강사를 채용하여 아침마다 인터넷강의도 했습니다.
김대중 정부를 전자정부라고 할 만큼 전자화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2000년 11월 월례조회에서 이영일 국장이 각과 읍면동 전자결재 실적을 공개했는데 정보통신과를 빼놓고는 개정동이 최고였습니다. 개정동이 1,001건의 전자 결재를 했는데 타 읍면동은 거의 실적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펜 없는 행정시대가 오고 있었습니다.
2001년 봄 나는 전주 김학 형과 E-메일을 교환할 때인데 그가 홈페이지를 개설했다는 편지를 받고 깜작 놀랐습니다. 전북문인 중 가장 먼저 개설한 김학 형의 홈페이지는 다양하고 참 아름다웠습니다. 충격을 받은 나는 우리 직원 문병운의 친구 도움으로 나의 홈페이지를 개설했습니다. 나의 홈페이지 개설은 군산시청 거의 초유의 일이었습니다. 전자통신과의 김용묵이 나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 형님 놀랍습니다. 언제 그리 많은 공부를 하셨습니까?”하는 글을 올려주었던 생각이 납니다.
인터넷은 세상의 정보가 한없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각종 TV와 신문을 인터넷으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케이블 TV시대와 함께 군산에도 “군산뉴스”란 인터넷 신문이 생겼습니다. 사무실에 앉아 인터넷을 통해 극장보다 더 싸고 다양하게 영화를 보거나 집에서 케이블 채널을 통해 심야영화를 얼마든지 보는 시대가 와버렸습니다.
동장이 동장실에서 몰래 음란동영상을 보다가 여직원이 결재하러 오자 급작스레 채널을 바꾸지 못하여 쩔쩔맸습니다. 무안해진 직원은 내용을 알면서 모르는 체해주는 일이 가끔 생겼습니다. 전자시대는 많은 구질서를 파괴하면서 생성하는 것입니다.
1990년대 초 컬러 TV시대의 대안으로 군산에 소극장이 생겼습니다. 별 재미를 못보고 10년이 지나 인터넷시대가 오면서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던 두 극장과 4개의 소극장이 일제히 흔들리게 됩니다. 인터넷시대의 극장 대안은 무엇일까? 한일 월드컵 축구가 열렸던 2002년 박주일은 그의 극장인생 마지막 도박을 합니다.
예를 들어 친구 4인이 한 극장 휴게실에서 만나 차 한 잔 하고 각기 극장 안 다른 4개의 작은 방에서 각각 다른 영화를 보고 다시 휴게실에서 만날 수 있는 소위 복합영화관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터넷의 속도전에 너무 빨리 무너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2010.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