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낙탕/채선심
2011.02.13 08:02
갈낙탕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채선심
"갈비와 낙지의 만남" 마치 영화 제목 같기도 한 이 말이 음식이름이라니 놀라웠다. 갖은 양념에 버무려진 갈비와 낙지탕의 사진이 없었다면 그 이름 앞에 고개를 갸웃둥 했을지도 모른다. 사진은 전라남도 무안에서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는 '갈낙탕'이 분명했다. 대로변에 플래카드와 함께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던 '갈비와 낙지의 만남을 볼 때마다 내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갈낙탕'보다는 '갈비와 낙지의 만남'이 언어적으로 훨씬 예술적이며 향기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평론가가 봤다면 깔끔한 '갈낙탕'이란 이름 대신에 웬 군더더기 투성이의 이름으로 바꾸어 놓았느냐고 핀잔을 줄지도 모른다.
전남 무안에서 만들어 먹은 갈낙탕이 얼마나 빠른 걸음으로 왔는지 전북 오수에서 먹은지도 꽤 오래 전 일이다. 이런 속도라면 '함흥냉면'이 삼팔선을 넘어왔듯 '무안 갈낙탕'이 북방한계선을 넘을 날도 머지 않았으리라.
아무리 봐도 연관성이 없을 것 같은 갈비와 낙지의 만남을 맨 처음 주선할 줄 알았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육지의 거대한 황소와 바다 뻘속의 미물인 낙지를 결합시키는 건 대단한 아이디다. 우리 말에 중매를 잘 서면 팔자가 늘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그 사람 팔자가 어디까지 늘어졌는지도 궁금했다.
기름진 갈비와 저 칼로리 낙지가 만나 우러내는 매콤하면서도 깔끔하고 개운한 그 맛은 오묘하기까지 하다. 양념에 재운 갈비와 갖은 야채와 버무린 낙지를 조개 육수에 끓인 '갈낙탕'은 숙취해소에 그만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허약한 체질에 보양식으로도 큰 몫을 한다니 맛과 영양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셈이다. 갈비는 낙지의 비릿한 갯내음을 제거하고, 낙지는 갈비의 잡 냄새를 없애주니 둘은 천생연분인 모양이다. 그러나 이들이 어디 처음부터 연분이 좋기만 하였을라고? 태생지가 서로 다른 육지와 바다 말고도 뼈만 앙상한 갈비와 전신을 털어 뼈라고는 없는 낙지의 만남이 순탄치만은 않았으리라. 상극끼리 만난 그들의 원성이 담장 밖을 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들은 뼈를 깎는 고통과 살을 에는 아픔을 감내해야만 했을 것이다. 때로는 수 없이 참을 인(忍)자 로 하얀밤을 지새웠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서로가 없어서는 안될 한 몸이되어 육해진미의 '갈낙탕'을 탄생시킨 것이다.
금수강산 우리 한반도가 좋아 보따리를 싸들고 온 다문화가정이 10만을 돌파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들을 다문화가정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이제 그들도 우리 문화가 아닌가. 낳고 자란 조국과 부모형제를 떠나 낯선 한국에 와서 우리 문화를 익히려 애쓰는 모습에 코끝이 찡하다. 수 십 년간 몸에 밴 문화와 언어를 바꾸려는 그들의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그들이 바꾸는 건 문화와 언어뿐 아니라 자기의 피와 살이 되었던 식성과 이름까지 바꾸었다. 평소에 먹어보지 못한 김치를 먹고 오만상을 찡그리며 거추장스런 한복차림으로 세배를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온전한 한국인으로 거듭나려는 그들의 노력이 실로 눈물겹다. 이제 그들은 다 벗어버린, 새로 태어난 신생아나 다를 바 없다. 그들이 우리땅에 튼실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배려가 있어야겠다.
그들 삶의 목소리를 듣고 우리가 그들을 포용한다면 그글도 쉬 뿌리를 내리지 않을까? 그들이 있었기에 피페해진 우리 농촌에 해맑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이어지고, 아이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어설프게나마 메아리처럼 들린다. 자기는 타국에서 살지만 자식만은 잘 되어야 한다며 자녀교육을 위해 힘든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은 그들. 그들과의 사이에는 언어장벽이 있어서 늘 소통을 가로 막는다. 그 장벽 때문에 그 들이 우리를 피하고 우리 역시 이방인이라고 소 닭 보듯 하고 있는 게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그들도 여기가 좋아 둥지를 틀었고 우리도
'역지사지'하여 잘 보아 준다면 조금씩은 가까워지지 않을까.
마음이 섞여야 몸이 섞인다고 했던가. 전혀 섞이지 못할 것 같던 황소와 낙지가 하나 되는 '갈낙탕'으로 거듭나 우리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있다. 그러나 이들이 자기 몸을 녹이지 않았다면 누린내와 갯내가 물씬 풍기는 황소와 낙지일 뿐이다. 황소와 낙지가 이처럼 환상적인 커플을 이루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황소와 낙지처럼 인내하고 노력하면 우리와 그들간의 장벽도 허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세계통용어인 바디랭귀지가 우리와 그들을 끈끈하게 이어줄 것이다. 그러면 황소와 낙지가 하나 되듯 우리와 그들도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하나가 되어서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다. 황소와 낙지가 환상적인 커플을 이루듯 다문화가정에서 영근 씨앗이 세계의 곳곳에서 아름다운 무궁화꽃으로 활짝 피어 날 것이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채선심
"갈비와 낙지의 만남" 마치 영화 제목 같기도 한 이 말이 음식이름이라니 놀라웠다. 갖은 양념에 버무려진 갈비와 낙지탕의 사진이 없었다면 그 이름 앞에 고개를 갸웃둥 했을지도 모른다. 사진은 전라남도 무안에서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는 '갈낙탕'이 분명했다. 대로변에 플래카드와 함께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던 '갈비와 낙지의 만남을 볼 때마다 내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갈낙탕'보다는 '갈비와 낙지의 만남'이 언어적으로 훨씬 예술적이며 향기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평론가가 봤다면 깔끔한 '갈낙탕'이란 이름 대신에 웬 군더더기 투성이의 이름으로 바꾸어 놓았느냐고 핀잔을 줄지도 모른다.
전남 무안에서 만들어 먹은 갈낙탕이 얼마나 빠른 걸음으로 왔는지 전북 오수에서 먹은지도 꽤 오래 전 일이다. 이런 속도라면 '함흥냉면'이 삼팔선을 넘어왔듯 '무안 갈낙탕'이 북방한계선을 넘을 날도 머지 않았으리라.
아무리 봐도 연관성이 없을 것 같은 갈비와 낙지의 만남을 맨 처음 주선할 줄 알았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육지의 거대한 황소와 바다 뻘속의 미물인 낙지를 결합시키는 건 대단한 아이디다. 우리 말에 중매를 잘 서면 팔자가 늘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그 사람 팔자가 어디까지 늘어졌는지도 궁금했다.
기름진 갈비와 저 칼로리 낙지가 만나 우러내는 매콤하면서도 깔끔하고 개운한 그 맛은 오묘하기까지 하다. 양념에 재운 갈비와 갖은 야채와 버무린 낙지를 조개 육수에 끓인 '갈낙탕'은 숙취해소에 그만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허약한 체질에 보양식으로도 큰 몫을 한다니 맛과 영양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셈이다. 갈비는 낙지의 비릿한 갯내음을 제거하고, 낙지는 갈비의 잡 냄새를 없애주니 둘은 천생연분인 모양이다. 그러나 이들이 어디 처음부터 연분이 좋기만 하였을라고? 태생지가 서로 다른 육지와 바다 말고도 뼈만 앙상한 갈비와 전신을 털어 뼈라고는 없는 낙지의 만남이 순탄치만은 않았으리라. 상극끼리 만난 그들의 원성이 담장 밖을 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들은 뼈를 깎는 고통과 살을 에는 아픔을 감내해야만 했을 것이다. 때로는 수 없이 참을 인(忍)자 로 하얀밤을 지새웠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서로가 없어서는 안될 한 몸이되어 육해진미의 '갈낙탕'을 탄생시킨 것이다.
금수강산 우리 한반도가 좋아 보따리를 싸들고 온 다문화가정이 10만을 돌파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들을 다문화가정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이제 그들도 우리 문화가 아닌가. 낳고 자란 조국과 부모형제를 떠나 낯선 한국에 와서 우리 문화를 익히려 애쓰는 모습에 코끝이 찡하다. 수 십 년간 몸에 밴 문화와 언어를 바꾸려는 그들의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그들이 바꾸는 건 문화와 언어뿐 아니라 자기의 피와 살이 되었던 식성과 이름까지 바꾸었다. 평소에 먹어보지 못한 김치를 먹고 오만상을 찡그리며 거추장스런 한복차림으로 세배를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온전한 한국인으로 거듭나려는 그들의 노력이 실로 눈물겹다. 이제 그들은 다 벗어버린, 새로 태어난 신생아나 다를 바 없다. 그들이 우리땅에 튼실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배려가 있어야겠다.
그들 삶의 목소리를 듣고 우리가 그들을 포용한다면 그글도 쉬 뿌리를 내리지 않을까? 그들이 있었기에 피페해진 우리 농촌에 해맑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이어지고, 아이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어설프게나마 메아리처럼 들린다. 자기는 타국에서 살지만 자식만은 잘 되어야 한다며 자녀교육을 위해 힘든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은 그들. 그들과의 사이에는 언어장벽이 있어서 늘 소통을 가로 막는다. 그 장벽 때문에 그 들이 우리를 피하고 우리 역시 이방인이라고 소 닭 보듯 하고 있는 게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그들도 여기가 좋아 둥지를 틀었고 우리도
'역지사지'하여 잘 보아 준다면 조금씩은 가까워지지 않을까.
마음이 섞여야 몸이 섞인다고 했던가. 전혀 섞이지 못할 것 같던 황소와 낙지가 하나 되는 '갈낙탕'으로 거듭나 우리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있다. 그러나 이들이 자기 몸을 녹이지 않았다면 누린내와 갯내가 물씬 풍기는 황소와 낙지일 뿐이다. 황소와 낙지가 이처럼 환상적인 커플을 이루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황소와 낙지처럼 인내하고 노력하면 우리와 그들간의 장벽도 허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세계통용어인 바디랭귀지가 우리와 그들을 끈끈하게 이어줄 것이다. 그러면 황소와 낙지가 하나 되듯 우리와 그들도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하나가 되어서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다. 황소와 낙지가 환상적인 커플을 이루듯 다문화가정에서 영근 씨앗이 세계의 곳곳에서 아름다운 무궁화꽃으로 활짝 피어 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