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여행기(1)/정석곤
2014.08.09 06:35
눈으로 확인한 베를린 장벽
동유럽 여행기(1)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정석곤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예정시간보다 30여 분 일찍 도착했다. 통일의 모델 국가인 독일에 첫발을 내딛는다는 감격에 가슴이 벅찼다. 현지 시각으로 오후 7시가 넘었다. 날씨는 기내에서 예고한대로 쾌청하고 기온이 24℃로 한국과 비슷했다.
신형버스(Long Distant Coach)로 자동차 전용도로를 4시간 가까이 달렸다. 오후 8시가 돼도 해는 넘어갈 줄 몰랐다. 10시가 되어서야 완전히 넘어간다고 했다. 가로등이 없는 도로라 해가 넘어가니 어둠이 금방 밀려왔다. 버스 안에서 김밥 두 줄과 물로 저녁식사를 했다. 김밥은 독일에서는 고급요리란다. 가이드는 즐거운 여행이 되려면 한약과 양약을 잘 먹어야 한다면서 한약은 한식을, 양약은 양식을 말한다고 했다. 그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바이마르에 도착하여 임탈 호텔에 머물렀다.
다음날 영화 ‘베를린’의 촬영지이자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으로 출발했다. 독일의 날씨는 연중 1/3만 햇빛이 비친다고 한다. 지난주에는 30, 40℃였는데 엊그제 내린 비로 기온이 내려가고 맑아져 다행이었다. 28개 유럽연합국가(EU) 가운데 6개 선두국가 가운데 하나다. 인구는 8천여 명이고, 국토는 한반도의 1.6배정도로 공장지대와 농지, 산림 지역으로 되어 있다. 검은 숲의 나라라고 할 정도로 숲이 많은 나라였다. 채소나 과일에 농약을 하지 않아 과일도 씻거니 닦아서 먹는다니 청정의 땅이 분명했다. 농부들이 잘 사는 국가다. 농산물의 직거래 시스템이 잘 되었고, 재배하다 실패하면 국가가 손해 배상을 해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드디어 800여 년 전에 처음 세워진 도시, 베를린에 도착했다. 역사와 전통이 살아있고 화려한 현대문화와 자유가 어우러진 도시라고 하더니, 시내에 들어서자마자 고개가 끄덕여졌다. 숲과 강과 호수로 어우러져 그런지 시골처럼 공기가 그렇게 맑을 수가 없었다. 크기는 891㎢로 서울의 1.5배이고, 인구는 350만으로 한적한 편이었다. 베를린은 28년 동안 동독으로 둘러 싸여, 동·서베를린으로 나뉘어졌었다. 1989년 11월 10일 새벽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다음해 10월 3일에 독일이 통일되었다. 통일독일의 수도가 된 게 바로 베를린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걸 빨리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먼 거리를 달려왔으니 배도 고팠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우리교포가 경영하는 일식집에서 점심으로 초밥과 각기 우동을 먹었다. 조금 쉬었다가 베를린의 중심가이고 쇼핑의 거리인 쿠담거리를 걸으니, 눈앞에 지붕이 부서진 건물이 보였다. 바로 1895년에 처음 세워진 대표적인 건축물, 카이저 빌헬름 교회당이다.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위부분이 폭파되어 목이 잘린 것 같았다. 복구가 불가능해 그대로 남겨둔 채,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는 교회로 삼고 있다고 했다. 높은 종탑만 보수했다. 교회당 안을 둘러보며 전쟁의 상처를 느껴보았다. 앞 쪽에다 예배당을 지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전승기념탑 앞에 차를 멈추고, 길 건너편에 69m나 되는 탑 위에 빅토리아상의 조각을 보았다. 빌헬름 1세의 승리와 위용(威容)을 드러낸 탑이다. 이 탑은 프로이센이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지어졌는데, 1938년에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함락한 기념으로 금으로 장식했다고 하였다. 예부터 인간이 자기 공을 자랑하려는 욕망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는 걸 생각나게 했다.
18세기 말 세워진 높이 26m, 가로 65m 규모의 브라덴부르크 문에 갔다. 문의 근처, 가로지른 도로의 한 가운데에 벽돌을 가로로 쭉 묻어 두었다. 그게 바로 베를린 장벽이 섰던 자리였다. 얼른 눈으로 보고 발로 밟아 본 뒤에 카메라에 담았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프러시아 통일제국의 강성을 상징하는 개선문이다. 또 그 문은 2차 세계대전 뒤 분단과 통일의 상징으로 꼽히는 역사적 장소다. 동독 공산정권이 베를린 장벽을 쌓은 뒤 브란덴부르크 문은 동·서 베를린의 경계가 됐다. 주변에 장벽이 생기고 서로 왕래가 금지되었고, 오직 부라덴부르크 문만이 동서독의 관문 역할을 하였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때는 서베를린 시민들이 문 앞에 있는 장벽에 올라가 독일 국기를 흔들며 통일을 외쳤다고 했는데, 그때의 함성이 들리는 듯했다. 부란덴부르크 문의 서편 광장은 관광객이 꽉 차, 베를린이 유럽의 4대 관광도시라는 가이드의 말을 증명하고 있었다.
바로 곁에는 홀로코스트 추모관이 있었다. 사면이 개방되어 입구와 출구가 없었다. 축구장 3개 크기 면적에 마치 관처럼 보이는 직사각형 콘크리트 기둥 2천7백11개를 추모비로 세워놓은 것이 아닌가? 그 비는 모두 하늘을 향해 전쟁의 아픔을 호소하는 것 같았다. 독일 정부가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를 속죄하고 치욕스런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설립한 새 추모관이다. 잘못을 시인하고 속죄를 바라는 독일 국민을 생각하니 일본이 더 얄미워졌다. 나치 히틀러의 만행 등 유물을 전시한 지하 유물전시관에 들어가지 못해 서운했다.
기념물로 남겨 둔 장벽의 거리로 이동했다. 가이드가 가면서 동·서독의 경계를 말 해 줄 때 분단된 28년 동안 거리와 건물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장벽 앞에 서니 감개무량했다. 장벽은 높이 3.5m, 두께 0.4m라고 했는데 두께는 더 되어 보였다. 한가운데는 철근을 세우고 앞뒤를 붉은 벽돌로 쌓은 두꺼운 콘크리트 벽이었다. 100m 쯤 될까? 장벽 안쪽에는 장벽에 얽힌 사건에 따른 사진과 기록이 있었다. 관광객들은 꼼꼼히 사진을 보고 기록을 읽어가며 장벽의 의미를 되새겼다. 약속 시간에 쫓겨 수박 겉핥기식으로 사진만 둘러보고 나오려니 아까웠다.
베를린 장벽이 28년 만에 무너졌다. 우리나라의 155마일 휴전선은 60년이 지나도 두 동강난 채 그대로 있지 않은가? 지난 3월 독일을 국빈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통일 구상’을 발표한 것도 독일 국민의 통일정신을 본받고자 한 강한 의지였을 게다. 우리 비무장지대(DMZ)도 평화의 상징으로 바뀌는 날이 오길 기원하며 폴란드의 브로츠와프로 출발했다.
(2014. 7. 29.)
※홀로코스트(Holocaust) :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대학살
동유럽 여행기(1)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정석곤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예정시간보다 30여 분 일찍 도착했다. 통일의 모델 국가인 독일에 첫발을 내딛는다는 감격에 가슴이 벅찼다. 현지 시각으로 오후 7시가 넘었다. 날씨는 기내에서 예고한대로 쾌청하고 기온이 24℃로 한국과 비슷했다.
신형버스(Long Distant Coach)로 자동차 전용도로를 4시간 가까이 달렸다. 오후 8시가 돼도 해는 넘어갈 줄 몰랐다. 10시가 되어서야 완전히 넘어간다고 했다. 가로등이 없는 도로라 해가 넘어가니 어둠이 금방 밀려왔다. 버스 안에서 김밥 두 줄과 물로 저녁식사를 했다. 김밥은 독일에서는 고급요리란다. 가이드는 즐거운 여행이 되려면 한약과 양약을 잘 먹어야 한다면서 한약은 한식을, 양약은 양식을 말한다고 했다. 그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바이마르에 도착하여 임탈 호텔에 머물렀다.
다음날 영화 ‘베를린’의 촬영지이자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으로 출발했다. 독일의 날씨는 연중 1/3만 햇빛이 비친다고 한다. 지난주에는 30, 40℃였는데 엊그제 내린 비로 기온이 내려가고 맑아져 다행이었다. 28개 유럽연합국가(EU) 가운데 6개 선두국가 가운데 하나다. 인구는 8천여 명이고, 국토는 한반도의 1.6배정도로 공장지대와 농지, 산림 지역으로 되어 있다. 검은 숲의 나라라고 할 정도로 숲이 많은 나라였다. 채소나 과일에 농약을 하지 않아 과일도 씻거니 닦아서 먹는다니 청정의 땅이 분명했다. 농부들이 잘 사는 국가다. 농산물의 직거래 시스템이 잘 되었고, 재배하다 실패하면 국가가 손해 배상을 해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드디어 800여 년 전에 처음 세워진 도시, 베를린에 도착했다. 역사와 전통이 살아있고 화려한 현대문화와 자유가 어우러진 도시라고 하더니, 시내에 들어서자마자 고개가 끄덕여졌다. 숲과 강과 호수로 어우러져 그런지 시골처럼 공기가 그렇게 맑을 수가 없었다. 크기는 891㎢로 서울의 1.5배이고, 인구는 350만으로 한적한 편이었다. 베를린은 28년 동안 동독으로 둘러 싸여, 동·서베를린으로 나뉘어졌었다. 1989년 11월 10일 새벽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다음해 10월 3일에 독일이 통일되었다. 통일독일의 수도가 된 게 바로 베를린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걸 빨리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먼 거리를 달려왔으니 배도 고팠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우리교포가 경영하는 일식집에서 점심으로 초밥과 각기 우동을 먹었다. 조금 쉬었다가 베를린의 중심가이고 쇼핑의 거리인 쿠담거리를 걸으니, 눈앞에 지붕이 부서진 건물이 보였다. 바로 1895년에 처음 세워진 대표적인 건축물, 카이저 빌헬름 교회당이다.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위부분이 폭파되어 목이 잘린 것 같았다. 복구가 불가능해 그대로 남겨둔 채,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는 교회로 삼고 있다고 했다. 높은 종탑만 보수했다. 교회당 안을 둘러보며 전쟁의 상처를 느껴보았다. 앞 쪽에다 예배당을 지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전승기념탑 앞에 차를 멈추고, 길 건너편에 69m나 되는 탑 위에 빅토리아상의 조각을 보았다. 빌헬름 1세의 승리와 위용(威容)을 드러낸 탑이다. 이 탑은 프로이센이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지어졌는데, 1938년에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함락한 기념으로 금으로 장식했다고 하였다. 예부터 인간이 자기 공을 자랑하려는 욕망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는 걸 생각나게 했다.
18세기 말 세워진 높이 26m, 가로 65m 규모의 브라덴부르크 문에 갔다. 문의 근처, 가로지른 도로의 한 가운데에 벽돌을 가로로 쭉 묻어 두었다. 그게 바로 베를린 장벽이 섰던 자리였다. 얼른 눈으로 보고 발로 밟아 본 뒤에 카메라에 담았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프러시아 통일제국의 강성을 상징하는 개선문이다. 또 그 문은 2차 세계대전 뒤 분단과 통일의 상징으로 꼽히는 역사적 장소다. 동독 공산정권이 베를린 장벽을 쌓은 뒤 브란덴부르크 문은 동·서 베를린의 경계가 됐다. 주변에 장벽이 생기고 서로 왕래가 금지되었고, 오직 부라덴부르크 문만이 동서독의 관문 역할을 하였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때는 서베를린 시민들이 문 앞에 있는 장벽에 올라가 독일 국기를 흔들며 통일을 외쳤다고 했는데, 그때의 함성이 들리는 듯했다. 부란덴부르크 문의 서편 광장은 관광객이 꽉 차, 베를린이 유럽의 4대 관광도시라는 가이드의 말을 증명하고 있었다.
바로 곁에는 홀로코스트 추모관이 있었다. 사면이 개방되어 입구와 출구가 없었다. 축구장 3개 크기 면적에 마치 관처럼 보이는 직사각형 콘크리트 기둥 2천7백11개를 추모비로 세워놓은 것이 아닌가? 그 비는 모두 하늘을 향해 전쟁의 아픔을 호소하는 것 같았다. 독일 정부가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를 속죄하고 치욕스런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설립한 새 추모관이다. 잘못을 시인하고 속죄를 바라는 독일 국민을 생각하니 일본이 더 얄미워졌다. 나치 히틀러의 만행 등 유물을 전시한 지하 유물전시관에 들어가지 못해 서운했다.
기념물로 남겨 둔 장벽의 거리로 이동했다. 가이드가 가면서 동·서독의 경계를 말 해 줄 때 분단된 28년 동안 거리와 건물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장벽 앞에 서니 감개무량했다. 장벽은 높이 3.5m, 두께 0.4m라고 했는데 두께는 더 되어 보였다. 한가운데는 철근을 세우고 앞뒤를 붉은 벽돌로 쌓은 두꺼운 콘크리트 벽이었다. 100m 쯤 될까? 장벽 안쪽에는 장벽에 얽힌 사건에 따른 사진과 기록이 있었다. 관광객들은 꼼꼼히 사진을 보고 기록을 읽어가며 장벽의 의미를 되새겼다. 약속 시간에 쫓겨 수박 겉핥기식으로 사진만 둘러보고 나오려니 아까웠다.
베를린 장벽이 28년 만에 무너졌다. 우리나라의 155마일 휴전선은 60년이 지나도 두 동강난 채 그대로 있지 않은가? 지난 3월 독일을 국빈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통일 구상’을 발표한 것도 독일 국민의 통일정신을 본받고자 한 강한 의지였을 게다. 우리 비무장지대(DMZ)도 평화의 상징으로 바뀌는 날이 오길 기원하며 폴란드의 브로츠와프로 출발했다.
(2014. 7. 29.)
※홀로코스트(Holocaust) :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대학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