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고무신
2014.08.26 15:57
흰 고무신
김학
여름구두를 신으려고 신발장을 열었다. 하얀 고무신 한 켤레가 눈에 띄었다. 어머니가 즐겨 신으시던 고무신이다. 저 고무신을 어머니가 다시 신으실 수 있을까 생각하니 순간 눈물이 핑 돌며 가슴에서 찬바람이 일었다.
어머니는 지금 아홉 달째 입원 중이시다. 하체를 못 써 대소변도 받아낸다. 정신은 말짱하시지만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니 안타깝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큰손자가 사다드린 핸드폰으로 집안의 대소사를 진두지휘하신다. 서울에 사는 손녀나 손자들이 며칠만 전화를 하지 않으면 그 불똥은 곧바로 내게 떨어진다.
어머니는 우리 동네에서는 멋쟁이 할머니로 소문난 분이시다. 외출을 하실 때면 언제나 화장을 하시고 곱게 한복을 차려입으셨다. 어머니 스스로 자신을 가꿔 늘 단정한 차림으로 나들이를 하시니 이웃들은 우리 내외를 효자 효부라 칭찬하지만 너무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른다. 사실은 어머니는 아들 내외가 손가락질 받지 않도록 하시려고 스스로 치장을 하신 것인데. 그런 어머니가 지난 해 개천절 날, 아파트 화장실에서 낙상을 하셨다. 병원 응급실로 모시고 갔더니 이마를 부딪치며 목뼈의 힘줄을 다쳤다고 했다. 팔순 노인이라 병원 침대에 오래 누워 계시니 낙상 후유증은 나았지만 하체가 굳어져 홀로 걸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흰 고무신은 신발장에 갇힌 채 이제나저제나 어머니만을 기다릴 것이다. 날마다 아침때면 경로당이나 계모임에 가시면서 챙겨 신으시고, 때가 묻으면 손수 목욕도 시켜주셨는데, 요즘엔 왜 자신을 외면하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주인의 마음이 변한 게 아닌지 오해를 할지도 모른다. 날씨는 자꾸 더워지고 바람도 쏘이지 못하니 고무신은 무척 답답할 것이고, 바깥세상이 마냥 그리울 것이다. 병실에 계시는 어머니나 신발장에 유폐된 흰 고무신이나 같은 처지다.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그 흰 고무신을 다시는 신어보지 못하시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빗방울
김학
비가 내린다. 장맛비가 내린다. 벌써 며칠째 내리는 비인가. 온 세상은 촉촉이 젖었고, 집안공기도 눅눈하다. 우산을 받쳐 들고 겅중겅중 걸음을 옮기는 이들의 모습이 어설퍼 보인다. 장마가 길어지니 나무나 풀 그리고 사람들은 밝은 햇살이 얼마나 그리울까.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본다. 금세 손바닥에는 빗물이 흥건히 고인다. 고인 빗물들은 떼를 지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간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빗물들은 내 손바닥이 오래 머물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도망칠 길을 찾는다. 얼마나 영리하고 슬기로운가.
빗방울은 어떤 모양일까. 네모나 세모는 아닐 테고 동그란 모습일 것이다. 빗방울 하나하나는 동그랗지만 그들이 모여 한 덩어리가 되면 그 모습은 또 달라지리라. 빗방울은 물방울의 지름이 0.5㎜ 이상이면 강수, 그보다 작으면 이슬비라 불린다. 지금까지 측정된 빗방울 중 가장 큰 것은 열대지방에서 관측된 지름 7㎜, 무게 0.3g이었다던가.
빗방울은 다양한 형태를 지닌다. 지름이 2㎜ 이하의 작은 빗방울은 공처럼 둥근 모양이지만, 그보다 큰 빗방울은 기압에 눌려 가로로 퍼지기 때문에 햄버거와 비슷한 형태를 띠기도 한단다. 그러나 그런 빗방울을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다. 장맛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다가 어느새 이슬비로 변하고, 잠시 뜸을 들인 다음, 다시 또 억수같이 쏟아진다. 그야말로 변화무쌍이다.
빗방울의 모습은 다양한 형태를 이루고 있지만, 그 가운데 눈물과 비슷한 것은 없다고 한다. 빗방울이나 눈물방울이나 같은 모양일 것 같은데 다르다니 놀랍다. 빗방울보다 눈물방울에 소금기가 더 많아서 그럴까.
비는 하늘이 흘리는 눈물이다. 대한민국의 하늘은 봄·여름·가을·겨울 중에서 왜 하필이면 여름에 더 많은 눈물을 흘릴까. 6ㆍ25 전쟁 때 산화한 원혼들의 넋을 달래려는 서러운 눈물일지도 모르겠다. 유족들이 흘린 눈물로도 모자라 하늘이 자청하여 곡비(哭婢) 노릇을 맡은 것은 아닐까.
맑고 푸른 하늘이 마냥 그립다. 하늘도 이제는 눈물을 거두고 활짝 웃었으면 좋겠다.
김학
여름구두를 신으려고 신발장을 열었다. 하얀 고무신 한 켤레가 눈에 띄었다. 어머니가 즐겨 신으시던 고무신이다. 저 고무신을 어머니가 다시 신으실 수 있을까 생각하니 순간 눈물이 핑 돌며 가슴에서 찬바람이 일었다.
어머니는 지금 아홉 달째 입원 중이시다. 하체를 못 써 대소변도 받아낸다. 정신은 말짱하시지만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니 안타깝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큰손자가 사다드린 핸드폰으로 집안의 대소사를 진두지휘하신다. 서울에 사는 손녀나 손자들이 며칠만 전화를 하지 않으면 그 불똥은 곧바로 내게 떨어진다.
어머니는 우리 동네에서는 멋쟁이 할머니로 소문난 분이시다. 외출을 하실 때면 언제나 화장을 하시고 곱게 한복을 차려입으셨다. 어머니 스스로 자신을 가꿔 늘 단정한 차림으로 나들이를 하시니 이웃들은 우리 내외를 효자 효부라 칭찬하지만 너무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른다. 사실은 어머니는 아들 내외가 손가락질 받지 않도록 하시려고 스스로 치장을 하신 것인데. 그런 어머니가 지난 해 개천절 날, 아파트 화장실에서 낙상을 하셨다. 병원 응급실로 모시고 갔더니 이마를 부딪치며 목뼈의 힘줄을 다쳤다고 했다. 팔순 노인이라 병원 침대에 오래 누워 계시니 낙상 후유증은 나았지만 하체가 굳어져 홀로 걸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흰 고무신은 신발장에 갇힌 채 이제나저제나 어머니만을 기다릴 것이다. 날마다 아침때면 경로당이나 계모임에 가시면서 챙겨 신으시고, 때가 묻으면 손수 목욕도 시켜주셨는데, 요즘엔 왜 자신을 외면하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주인의 마음이 변한 게 아닌지 오해를 할지도 모른다. 날씨는 자꾸 더워지고 바람도 쏘이지 못하니 고무신은 무척 답답할 것이고, 바깥세상이 마냥 그리울 것이다. 병실에 계시는 어머니나 신발장에 유폐된 흰 고무신이나 같은 처지다.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그 흰 고무신을 다시는 신어보지 못하시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빗방울
김학
비가 내린다. 장맛비가 내린다. 벌써 며칠째 내리는 비인가. 온 세상은 촉촉이 젖었고, 집안공기도 눅눈하다. 우산을 받쳐 들고 겅중겅중 걸음을 옮기는 이들의 모습이 어설퍼 보인다. 장마가 길어지니 나무나 풀 그리고 사람들은 밝은 햇살이 얼마나 그리울까.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본다. 금세 손바닥에는 빗물이 흥건히 고인다. 고인 빗물들은 떼를 지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간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빗물들은 내 손바닥이 오래 머물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도망칠 길을 찾는다. 얼마나 영리하고 슬기로운가.
빗방울은 어떤 모양일까. 네모나 세모는 아닐 테고 동그란 모습일 것이다. 빗방울 하나하나는 동그랗지만 그들이 모여 한 덩어리가 되면 그 모습은 또 달라지리라. 빗방울은 물방울의 지름이 0.5㎜ 이상이면 강수, 그보다 작으면 이슬비라 불린다. 지금까지 측정된 빗방울 중 가장 큰 것은 열대지방에서 관측된 지름 7㎜, 무게 0.3g이었다던가.
빗방울은 다양한 형태를 지닌다. 지름이 2㎜ 이하의 작은 빗방울은 공처럼 둥근 모양이지만, 그보다 큰 빗방울은 기압에 눌려 가로로 퍼지기 때문에 햄버거와 비슷한 형태를 띠기도 한단다. 그러나 그런 빗방울을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다. 장맛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다가 어느새 이슬비로 변하고, 잠시 뜸을 들인 다음, 다시 또 억수같이 쏟아진다. 그야말로 변화무쌍이다.
빗방울의 모습은 다양한 형태를 이루고 있지만, 그 가운데 눈물과 비슷한 것은 없다고 한다. 빗방울이나 눈물방울이나 같은 모양일 것 같은데 다르다니 놀랍다. 빗방울보다 눈물방울에 소금기가 더 많아서 그럴까.
비는 하늘이 흘리는 눈물이다. 대한민국의 하늘은 봄·여름·가을·겨울 중에서 왜 하필이면 여름에 더 많은 눈물을 흘릴까. 6ㆍ25 전쟁 때 산화한 원혼들의 넋을 달래려는 서러운 눈물일지도 모르겠다. 유족들이 흘린 눈물로도 모자라 하늘이 자청하여 곡비(哭婢) 노릇을 맡은 것은 아닐까.
맑고 푸른 하늘이 마냥 그립다. 하늘도 이제는 눈물을 거두고 활짝 웃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