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으로 먹는 '대갱이'

2005.04.12 02:09

정찬열 조회 수:251 추천:2

  저녁 밥상에 대갱이 반찬이 올라왔다. 도시락 반찬으로 일품이었던 대갱이 무침이 20여년 만에 밥상 위에 놓였다. 말린 대갱이를 자근자근 두드려 잘게 찢은 다음, 간장과 참기름을 치고 대파를 송송 썰어 넣어 어머니가 무쳐주시던 대갱이 무침. 그 맛이 혀끝에서 되살아났다. 언젠가 우리 고향 영암 개펄에서 난 고기는 맛이 좋아 진상품이 많고 대갱이 맛도 일품이란 말을 했었는데, 그 말을 귀에 담아두었던지 의동생이 서울에 다녀오면서 어렵게 구해 온 것이다.  
   필자가 어릴 때, 대갱이는 우리고향에서 흔한 고기였는데 지금은 많은 개펄이 논이 되고, 개펄이 있는 지방에서도 뻘일을 나가는 사람이 줄어들어 요즘은 보기조차 힘들게 됐다고 한다. 나에게 줄려고 사 왔다고 하자 대갱이를 먹어 보지 못한 때문인지 제수씨가 "형님이 그걸 좋아하시겠어요"하여, 아우는 "형님이 그것을 추억으로 먹지 맛으로 잡숫나"고 대답했다 한다.
   그렇다. 추억이 혀끝에서 피어났다. 이맘 때 쯤, 물에 발을 담그기엔 아직 쌀쌀할 무렵부터 사람들은 갯펄에 나가 맛이나 게, 대갱이 등을 잡기 시작했다. 갯펄에서 나오는 수산물은 우리 동네의 소중한 수입원이었다. 아이들 학비도, 공책이나 연필을 사는 돈도, 먹고사는 문제까지도 뻘밭에서 해결하는 집이 많았다.
  사람들은 물때 따라 움직였다. 밀물 때 언덕에서 바라보는 강은 멀고도 아득했다. 햇빛을 받아 물결이 비늘처럼 퍼덕거렸다. 썰물이 되면 사람들은 개펄로 몰려나갔다. 뻘등이 보이기 시작하고 물이 개옹 따라 빠르게 흐르기 시작할 무렵, 낙안촌 앞 개옹 끝머리에서 아가씨들이 오가리를 가슴에 안고 물길을 따라 둥둥 떠내려왔다. 오리떼가 깜박깜박 헤엄쳐 내려가는 것 같았다. 맛이나 게가 많은 아래쪽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작은 옹기그릇 오가리는 수영할 때 몸을 뜨게 하고, 맛이나 게를 잡아넣은 용기도 되었다. 그리고 뻘에서 일할 때 몸이 깊이 빠지지 않도록 버팀물로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마을 청년들과 아가씨들도 끼리끼리 패를 이루어 갯가로 향했다. 여자들은 오가리를 머리에 이고, 남자들은 쇠로 만든 가늘고 긴 어구인 '글캥이'와 대로 만든 바구니 '대레끼'를 어깨에 둘러메었다. 봄바람이 등성이를 따라 보리밭을 흔들며 지나가면 온 들판은 파란 보리물결로 출렁거렸다.
그때쯤이면, 하루 한 번씩 목포를 출발하여 해창을 오가는 여객선 '영암호'가 동백아가씨를 흐들어지게 불러 제끼며 물을 거슬러 올라왔다. 밀물 따라 왔다가 썰물 따라 내려갔다. 여객선은 청춘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저 배를 타고 목포에 갈까. 거기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갈까. 적잖은 젊은이가 봄바람 따라 고향을 떠나갔다.
  갯가에 이르면 사람들은 옷을 갈아입은 다음 갯보선을 신고 개펄로 들어갔다. 갯보선은 개펄에 널려있는 굴 껍질이나 이물질로부터 발을 보호하기 위해 반드시 신어야 했다. 보선은 무명베로 만들어 바늘로 누빈 다음, 생감을 따다 감물을 들였다.    
  뻘엔 숱한 생명이 살고 있다. 그래서 구멍이 많다. 그 중 대갱이가 사는 구멍을 식별하여 글캥이로 뻘을 휘저으면 포크모양의 쬬쪽한 끝에 대갱이가 걸려나왔다. 대갱이를 잡으면 긴 줄에 꿰어찼다. 썰물이 밀물로 바뀔 때쯤 고기가 가장 잘 잡혔다.
  무릎 위까지 빠지는 개펄을 걸으며 대갱이를 잡는 일은 무척 힘들었다. 처음 대갱이를 잡으러 갔던 날, 나는 열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러자 같이 갔던 친구들이 고기를 나누어주었다. 함께 고기 잡고 품앗이도 하며 농사를 지었던 고향 친구들. 종철이 종두, 관주, 판열이... 얼굴이 눈에 선하다.  
  보기도 힘든 대갱이를 미국까지 사들고 온 아우는 추억의 맛을 이미 알고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껴먹다가, 대갱이 맛을 알만한 친구들을 집에 불러 함께 나누어 먹었다. 맛도 나누고, 추억도 나누었다.
<2005년 4월 13일 광주매일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