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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은 스승의 날입니다. 선생님들의 사기 진작과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 1963년에 제정되어 시행되다가 1973년, 정부의 서정쇄신 방침에 따라 모든 사은행사가 규제되는 바람에 스승의 날까지도 폐지되었습니다. 80년대에 들어서서 교권이 추락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하자 스승을 공경하는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1982년에 스승의 날이 부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달력 5월 15일자 밑에 ‘스승의 날’이라고 적어놓은 이유는 이런 것 외에도 1년에 한 번이라도 스승의 은혜를 생각하고, 연락을 드릴 분이 있으면 이 날을 기해서라도 연락을 드리라고, 또한 기회가 되면 찾아뵙기도 하라고 폐지되지 않고 있는 것이겠지요. 제게는 30여 년 동안 스승의 날이면 꼭 안부 전화를 드리거나 편지를 드리는 선생님이 계십니다. 그 선생님이 살아 계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저의 인터넷 홈페이지 방명록에 글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일면식이 없는, 즉 생면부지의 사람인데 제 스승의 함자를 적고 있었습니다. 미지의 인물이 쓴 글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권태을 선생님에 대한 추억의 글을 읽고 저도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성의상고 2학년 때 저희 담임이셨던 선생님! 돈 때문에 설악산 수학여행을 못 가게 되자 “내가 내줄게 가자”고 하셨던 선생님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우연히 네이버에서 선생님 생각이 나서 선생님 함자를 치자 시인님의 글이 나왔습니다. 제자들의 작은 어려움에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따뜻하게 만져주셨던 선생님이 그립습니다.



  저는 부천의 한 귀퉁이에서 작은 개척교회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선생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고난받고 어려움을 당한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손길이 되리라고 다짐해보며 이 길을 갑니다. 암튼 우리 제자들이 선생님 보시기에 뿌듯할 만큼 다들 늠름하게 이 사회에서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지요. 글로나마 만나서 반갑고요, 저도 60년생인데… 계속 공부했으면 저랑 친구가 되는 건데….




  끝에 한 말은 자신이 상업고등학교를 나와 신학대학에 가지 않고 문학을 공부했더라면 진작 연락이 닿아 친구로 지낼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해 아쉽다는 뜻인 듯했습니다. 마침 메일 주소가 적혀 있기에 반가운 마음을 메일로 전하였고, 선생님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가르쳐드렸습니다. 그런 이후로 다시 이분한테서 연락이 오지 않았지만 스승의 날을 앞두고 선생님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게 되어 저로서는 여간 기쁜 일이 아니었습니다. 수학여행 갈 형편이 안 되는 학생에게 여행 경비를 대준 미담 정도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인품은 이런 물질적인 지원으로도 드러날 수 있겠지만 그 은혜 백골난망인 것은 저의 얄팍한 문학적 재능을 인정해주고 적극 응원해주어 제자가 탈선하지 않도록 이끌어주심에 있습니다. 제 카페 www.poet.or.kr/lsh에 올려놓았던, 그 선생님에 대한 추억담을 이 자리에 다시 올려놓습니다.





  훌륭한 스승의 상에는 두 가지의 유형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탁월한 교수법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그 과목에 흥미를 갖게 하여 성적을 올려주는, 이른바 실력 있는 교사이다. 학원강사가 탁월한 교수법을 갖고 있지 않을 때, 그는 수강생을 많이 모을 수 없을 것이다. 또 한 유형은 제자들이 새로운 세계관을 갖도록, 즉 사물과 인생을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깨우쳐주는 교사이다.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제자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는 이 유형의 대표적인 교사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님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를 겸비한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서 중학생 시절을 보냈다. 김천 성의중학교의 권태을 선생님은 모든 제자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는 분이었다. 그때 내가 다닌 중학교는 우수반은 없었지만 열등반이 있었다. 국어를 가르쳤던 그 선생님은 열등반의 담임으로서 방과후 몇 시간씩 학생들을 따로 가르치는(물론 국어 이외의 과목까지) 열성을 보였는데, 들리는 얘기로는 영남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된 작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시립도서관에서 세계의 명작 소설이니 위인전 따위를 열심히 빌려다 읽은 덕에 독후감 써 오기니, 일기 검사 같은 때 칭찬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문학적인 재능이라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산문과 시로 『학원』문단을 주름잡아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형(중․고교 시절 형의 이름은 ‘남하’였는데 ‘동하’로 이름을 바꿨고 문학평론가가 되었다)에 비해 나의 백일장 차상이나 입선은 말하기조차 쑥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이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내 자랑을 하시고 딴 학급 수업에 들어가서는 내가 쓴 글을 읽어줄 정도로 나의 알량한 문재를 자주 칭찬해주셨다.




  어떤 일이 계기가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선생님은 나의 담임이 되신 적도 없으면서 글을 계속 써서 갖고 오라고 종용하셨다. 나는 그래서 백일장이 있건 없건 수시로 시와 산문을 써서 교무실로 들고 갔었고, 선생님은 매번 붉은 만년필 글씨로 꼼꼼히 평을 해주셨다. 선생님의 격려는 고마운 것이었지만 성적은 1학년 1학기 말의 전교 3등에서 매학기 계속 떨어져만 갔으니, 그분은 나로 하여금 너무 이른 나이에 문학병을 앓게 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 당시 우리 집안의 분위기는 무척 어두웠다고 기억된다. 자신을 인생의 실패자로 간주한 아버지께서는 큰아들을 판사로, 작은아들을 직업군인으로 만들어 실패를 보상받으려 두 아들 몸 약한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마가편식으로 얼굴이 마주칠 때마다 공부를 그 따위로 하느냐고 호되게 꾸중을 하셨다. 더구나 중학생밖에 안 된 나에게 사관학교에 가는 것이 이 나라에서는 출세의 지름길이라고 틈날 때마다 강조해 들려주셨는데, 군대에 가는 것부터 겁을 먹고 있던 나로서는 듣기에 무척 고통스런 말씀이셨다. 어머니는 또 문방구점을 물려받을 사람은 이 집에서 너뿐이고, 너는 붙임성이 있어 장사를 잘할 것이니, 빨리 장사를 시작해 부모를 쉬게 해달라고 하루가 멀다고 말씀하셨다. 형과 선생님의 영향으로 막연하게나마 문인에의 꿈을 키우고 있던 나는 견해가 다른 두 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3학년에 올라가 여름방학이 가까워오자 선생님은 “승하야, 우리 데이트 한번 할까?” 하시면서 점심시간에 나를 교실 바깥으로 불러내셨다. 나의 신상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시며, 고등학교에 가서도 계속 글을 써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나는 그때 집안의 분위기를 운위해 부모님을 욕되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나의 희망과 부모님의 희망이 현저히 다르다고만 말씀드렸다. 그리고 문인이 되어봤자 신문에 연재소설을 쓸 정도로 유명해지거나 베스트셀러만 계속 쓰는 인기 작가가 되지 않는 한 먹고사는 것을 해결하지 못해 비렁뱅이로 살아간다는 부모님의 말씀이 백 번 옳다고 생각되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평소 걱정하던 것을 조심스레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밝게 웃으시며 문인들 중에는 대학교수도 있고 고교교사도 있고, 출판사에 나가는 사람도 있고, 신문사에 있는 사람도 있으니 그 문제로 고민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이에 덧붙여, 네 부모님이 촌사람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은 그런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네가 고등학교에 가서 소설책이나 시집 같은 것이나 끼고 있지 말고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거라고 설명해주셨다.




  선생님은 이 날의 대화를 기억하고 계셨는지 몇 주 후 우리 집에 찾아오셨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승하의 소질을 살려주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가셨다고 부모님이 전해주어 나는 그 선생님의 가정방문 사실을 알았다. 선생님은 내 고통의 정도를 짐작하셨는지 이 문제로 졸업 직전에 다시 한 번 찾아오셨으니 선생님의 한 명 제자에 대한 사랑은 끔찍한 것이었다고밖에, 달리 말할 길이 없다. 선생님의 간곡한 당부가 있은 다음에야 아버지는 나의 진로에 대한 강압적인 요구를 삼가셨으나 어머니의 희망사항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병역의무를 필하고 나서도 줄기차게 이어졌다. 아무튼 선생님은 나의 얕은 재능을 인정해주는 유일한 분이었다.




  내가 중3 때 형은 부모님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더 적나라하게 말해 두 분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서울대 법학과 2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책도 법률서적 대신 문학서적만 읽고 강의도 법대가 아닌 문리대에 가서 주로 듣더니 아니나 다를까 문학을 하겠다, 법관에의 길로는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선포하고 나섰다. 형의 부모님에 대한 설득 작전과 부모님의 형에 대한 협박․회유의 양동 작전은 졸업 후 국문학과 3학년으로 편입하기까지 장장 2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 기간 집안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로 살벌해졌는가는 짧은 지면에다 설명할 길이 없으니 생략하고,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지 2개월 만에 서울로 가출을 감행하였다. 내가 그 뒤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의 학부와 대학원을 나오는 동안 선생님 또한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박사 학위를 받은 뒤 상주대학교의 교수로 직장을 옮기셨다.




  고등학교를 중도에 포기한 철없는 제자에게 쏟은 선생님의 애정을 나는 평생 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분이 이제까지 보내주신 30여 통의 편지 답장 가운데 가출한 다음해 설날의 것을 소개해도 실례가 안 될지 모르겠다.




  지난해는 네 인생에 전기가 마련된 해였다. 절망 없는 노력과 예지의 힘이라 믿자. 너는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으로 올려놓을 유일한 사람이 될 긍지로 노력해주기 바란다. 새해에는 더욱 겸허한 자세로, 더욱 노력하는 사람으로 열심히 살기 바란다. 승하야,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병진 새날, 권태을.




  백일장에 나가 장원도 몇 번 했었지만 중학생 주제에 글을 잘 썼으면 얼마나 잘 썼으랴. 세계문학 운운은 오로지 낙심해 있을 제자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배려임을 내가 모를 턱이 없다. 선생님께서는 학교를 자의로 그만둔 데 대해서마저 이처럼 분에 넘치는 칭찬으로 격려해주셨으니, 나로서는 선생님의 사랑이 눈물겨울 따름이었다. 돌아온 탕아를 부모님은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아 가출은 세 번 더 시도되었다. 그리하여 나의 10대는 엉망이 되었지만 선생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사람 하나 키운 보람을 맛보게 해달라는 선생님의 간곡한 당부는 내가 탈선의 길로 벗어나는 것을 막아주었고, 뒷날 숱한 밤을 원고지와 싸우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내가 끝내 무명의 시인으로 죽고 말지라도 선생님은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리라 믿는다. 사표(師表)가 없는 시대, 내 곁에는 진정으로 존경하는 선생님이 한 분 계시니, 나는 그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다.





  위의 글은 1998년에 낸 산문집 『그렇게 그들은 만났다』에 실려 있습니다. 세월이 조금 흘러 선생님이 정년퇴임을 하게 되었는데, 기념문집 발간을 준비하고 있는 분께 연락이 왔습니다. 선생님과 인연이 있는 분들에게 글을 받고 있다면서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위의 글을 보내려다 권태을 선생님께 올리는 편지 형식의 글을 써 보냈습니다. 내용은 위의 산문과 대동소이합니다. 지루하더라도 참고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권태을 선생님께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72년 3월이었습니다. 김천 성의중학교에 제가 입학한 해가 1972년이었으니까요. 선생님은 그때 그 학교와 김천 성의상업고등학교 국어선생님으로 계셨습니다. 교사생활을 시작한 지 몇 해 되지 않는 30대 초반의 교사는 지금 정년퇴임을 앞두고 계시고, 저는 4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33년…… 지금부터 기나긴 세월의 ‘만남’에 대해 제 기억을 더듬어 나가겠습니다.




  3년 동안 선생님께서는 저희 반 담임을 한 번도 맡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옆 반 친구들을 무척 부러워했는데, 당연히 선생님 담임반의 학생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책읽기를 즐겨했기에 국어과목을 좋아했었고, 국어선생님을 마음속으로 따랐던 것이었지요. 게다가 대구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소설이 당선된(훗날 읽어본 그 소설은 제목이 ‘신농씨’였습니다) 작가라고 하니 제 존경심은 하늘을 찌를 듯했지요.




  제 친구들은 거의 모든 선생님을 업신여겨, 별명을 붙여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선생님들은 대체로 지나치게 엄격했고 때로는 폭력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제자 사랑을 자식 사랑에 못지않게 하셨습니다. 제 기억이 분명하다면 옆 반은 열등반이었습니다. 우등반은 따로 없었지만 학업 능력이 조금 떨어지는 아이들만 모인 반의 담임을 선생님이 맡고 계셨고, 선생님은 그 아이들의 실력을 조금이라도 올리기 위해 방과후에 국어 아닌 다른 과목을 몇 시간씩 가르치는 열의를 보이셨지요.




  저희들 모두는 선생님이 학생들의 실력 향상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계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들 각자를 인격적으로, 인간적으로 대해주셨으니까요. 그래서 저희는 선생님한테만은 ‘아, 그 미친개 말이지’ 하는 식으로 별명을 붙여 호칭하지 않고 반드시 ‘권태을 선생님’으로만 불렀습니다. 주먹께나 쓰는 깡패 똘마니 같은 친구들도 반드시 그렇게만 불렀습니다. 그 호칭 속에는 선생님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제자를 편애하는 선생님을 특히 미워했었는데, 선생님은 제자들 모두에게 공평히 관심을 갖고, 공평히 애정을 베푸셨습니다. 전교에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있었습니다. 저였지요. (이것은 저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을 따라 백일장 여는 데를 따라다니게 되었습니다. 입상할 때도 있었고 가작 하나도 안 걸릴 때도 있었지만 김천 시내 백일장은 물론 멀리 경주까지 가서 백일장을 치르고 오곤 했습니다. 백일장을 앞두고 문예반 학생들에게 작품 쓰기의 요령을 가르치실 때 예로 드는 작품이 저의 말도 안 되는 글이었으니, 선생님의 저에 대한 편애는 도가 좀 지나쳤습니다.




  1972년 가을쯤이었을까요, 선생님은 어느 날 저한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승하야, 작품이 되면 언제라도 갖고 오너라. 교무실의 내 자리 알고 있지? 내가 수업 들어가서 없더라도 작품을 책상 위에 놓고 가면 내가 보고서 너한테 전해주도록 하마.”




  저는 선생님의 칭찬을 받을 욕심으로 시며 산문이며 독후감이며 두세 편 쓰게 되면 곧바로 선생님께 갖다드렸습니다. 2학년이 되면서 원고를 묶어 아예 문집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靑湖文集’이라는 제호를 붙였지요. 며칠 후 수업시간에 되돌려 받는 작품의 끄트머리에는 꼭 선생님의 첨삭지도가 있었습니다. 붉은 잉크를 넣은 만년필로 선생님은 고칠 점을 지적하셨고 좋은 점이 있을 때는 칭찬해주셨습니다.




  그 3년 동안 저는 선생님 덕분에 가슴 벅찬 나날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다른 반에 들어가셔서 제 작품을 종종 낭독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딴 반 친구들한테 “승하 너는 좋겠다. 권태을 선생님이 널 그렇게 좋아하시니까”라는, 부러움 섞인 말을 듣곤 했습니다. 교무실에서도 여러 선생님들 앞에서 저의 신통치 않은 문재와 꾸준한 습작에 대해 칭찬을 몇 번이나 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저는 정말 신바람이 났습니다.




  선생님은 저희 반 수업을 하러 들어오시면 꼭 제 자리에 와 머리를 한번 쓰다듬으며, “승하야, 잘해!” 하고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공부를 잘하라는 말씀이 아니었고, 글을 계속해서 열심히 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전폭적인 신뢰와 사랑……. 아니, 제가 쓴 글이 영 신통치 않으면 빨간 글씨로 호된 꾸지람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정신이 번쩍 들곤 했었지요. 선생님 댁에 찾아가서 사모님께 인사도 드렸고, 롱펠로의 『에반젤린』과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책을 빌려 읽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여간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1학년 1학기 때는 공부를 잘해 학기말에 전교 3등을 했습니다. 그래서 2학기 등록금 전액을 면제받았는데 웬걸, 날이 갈수록 성적이 떨어져 갔습니다. ‘문학병’이란 데 걸려버렸는데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이 눈에 들어왔겠습니까. 중3이 되었을 때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는 몇 주 동안 학교에 나가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문학인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격려와 질책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그마한 재질을 크게 보시고는 줄기차게 채찍질해주셔서 오늘의 제가 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사실 중학교 3년 내내 자살을 생각하며 보낸 어린 염세주의자였습니다. 걸어서 40분 거리에 있는 학교로 가는 길에 다리가 하나 나옵니다. 다리 양켠의 인도도 좁고 양차선 차도도 좁다란 다리였습니다. 저는 그 다리를 건널 때마다 달려오는 버스에 달려들어 죽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했습니다만 저를 인정해주시는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자살로 내 생을 끝내지는 말자’고 마음을 추스르곤 했습니다.




  저는 김천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정확히 두 달 동안 다녔습니다. 4월 말에 서울로 가출을 감행하면서 부모님 앞으로 써놓고 간 긴 편지는 유서였고, “지난 3년 동안 자살을 할까 말까 망설이지 않았던 날이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란 문구를 써놓았던 것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이런 편지를 부모님 앞으로 남긴 이유에 대해서는 선생님께 따로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대충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어쨌거나 1975년 8월에 행해진 대입자격검정고시에는 전과목 합격을 했으나 고교생이 아닌 이상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집에서는 속된 표현으로 ‘내놓은 자식’이 되어 있었고, 앞날은 오리무중의 상태가 되어 저는 낙심천만, 불면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에 그해 연말에 고교 중퇴와 검정고시 합격 등의 소식을 적어 연하장을 보내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해 정월 초하루에 저한테 이런 편지를 써 보내주셨습니다.




  (편지 내용은 위의 글에 있으므로 생략)




  아아, 정말 눈물겨운 편지 내용이었습니다. 낙심해 있을 제자에게 선생님은 여전히, 전폭적인 신뢰와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짧은 편지는 절망의 나락에 빠진 저를 건져 올려주는 튼튼한 삼끈이었습니다. 물론, 세계문학 운운이 용기를 주기 위해 하신 말씀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만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만 저를 그래도 인정해주는 분이 계시다는 것은 크나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저는 마음을 다잡고 입시공부를 했습니다. 학원에도 가지 않고 혼자서 공부를 해(경제적인 이유와 불면증과 대인공포증 같은 신경성 질환 때문이었습니다. 가출도 세 번을 더 했고, 부산․대구․춘천 등지를 떠돌기도 했습니다.)



  경북대와 경희대에 응시를 해 떨어졌고, 3번째 예비고사를 쳐서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이때도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일인 양 기뻐하셨습니다. 제가 대학 2학년 때 대학문학상에 시로 당선되고 4학년 때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을 때도 이 세상에서 가장 기뻐하신 분은 선생님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 학교에 적을 두신 상태에서 대구를 오가며 대학원 공부를 하셨고, 박사학위까지 받으셨습니다. 중학교에서 상주대학교로 직장을 옮기신 이후 선생님의 학문 연구는 절차탁마의 표본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의 한학 연구는 제가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할 정도로 넓고 깊었습니다. 선생님은 석사과정 시절, 대구 계명대학에 계셨던 조동일 선생 밑에서 공부를 하셨는데 제가 선생님의 사랑을 받고 자란 것처럼 선생님 역시 조동일 선생의 사랑을 받아서 학문적 넓이와 깊이를 지닐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1972년부터 74년까지 3년 동안만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어도 늘 ‘권태을 선생님의 제자로서’라는 말을 화두처럼 가슴에 품고 살아왔습니다.




  선생님이 제 자리에 오셔서 까까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그 손길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번에 정년퇴임을 하시지만 선생님의 학문 연구가 이 시점에서 끝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에 대한 믿음과 사랑 또한 계속되리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크신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글 쓰고 후학들을 가르치겠습니다.




  권태을 선생님!




  정년퇴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내내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제자 승하 삼가 올림.





  저는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스승은 권태을 선생님이고 선생님 덕분에 이 자리에 서 있다고.



  여러 해 전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텔레비전 드라마로 「허준」이 있었습니다. 이은성은 조선시대 선조와 광해군 때의 명의로 어의(御醫)까지 했던 허준의 일대기를 갖고 소설을 썼는데 그것이 엄청난 판매고를 올린 『소설 동의보감』입니다. 제가 보건대 소설과 드라마 모두 가장 극적인 장면은 허준의 스승 유의태가 자신의 몸을 제자에게 내주어 허준이 스승의 몸을 갖고 해부 실습을 행하는 장면입니다. 제자 사랑의 극치를 보여준 그 장면을 나는 몸서리치며 보았고,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유의태는 자기 아들 유도지보다 허준을 더욱 아껴 유도지는 평생 아비의 사랑을 빼앗긴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지요.




  그 뒤에 「허준」 이상의 인기를 누린 「대장금」은 「허준」의 여성 버전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일단 허준은 내의원을 거쳐 어의가 되고 장금이는 의녀(醫女)를 거쳐 어의가 됩니다. 연출자도 같지만 등장인물 중 상당수가 재등장하고 캐릭터도 비슷하지요. 「허준」에 유의태가 있다면 「대장금」에는 한 상궁이 나옵니다. 음식 조리법을 가르쳐준 한 상궁이 억울하게 죽자 장금이는 제주도로 가서 또 한 명의 스승 장덕을 만나 의술을 배웁니다. 사제지간의 끈끈한 정은 두 드라마의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제지간의 정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특히 제자가 스승을 ‘물’로 봅니다. 스승한테 체벌을 받았다고 경찰에 신고를 하는 세상이니까요. 체벌 받은 아이의 부모가 학교로 가서 선생님의 멱살을 잡고 난리를 피우는 일은 우리나라 교육계 일선에서는 비일비재합니다. 교권과 스승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교사는 어느덧 ‘선생님’ 아니라 ‘꼰대’가 되었습니다. 스승은 제자를 사랑하고 제자는 스승을 존경하는 것이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 가는 것들” 중 하나가 된 것일까요. 그래서 스승의 날이 제정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학에 있다 보니 이 날이 되면 쑥스러운 시간을 갖게 됩니다. 학생들이 불러서 가보면 칠판에 ‘선생님 사랑해요’ 같은 글씨가 적혀 있고, 학생들이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로 시작되는 노래를 불러줍니다. 노래를 다 듣고 나서 한마디 해야 할 시간이면 낯이 확확 달아오릅니다.




  옛말에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말을 염두에 두고서 저는 학생들을 보면 ‘나를 너무 멀리 있는 존재로 생각하지 말고 자주 찾아와 상담도 하고 작품도 보여다오.’ ‘고향을 떠나와 자취를 하고 있는 너희들은 가까이에 어른이 안 계실 테니 무슨 고민거리가 있을 때는 찾아와서 상의를 하도록 하렴.’ 하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취직문제로 찾아오거나 유학이나 어학연수에 필요한 추천서 받는 일을 제외하고 선생한테 찾아와 상담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아,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며 인사를 하러 오는 학생들도 있지요. 이런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라, 작품 뭉치를 들고 찾아오면 학생이 있으면 저는 신바람이 납니다.




  내일이 스승의 날이라니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나이 쉰을 앞둔 나인데 스승의 날이라고 전화를 해오거나 편지를 보내오는 제자가 몇 명이나 되나. 솔직히 말해 몇 명 되지 않습니다. 저는 스승의 발치에 이르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한참 멀었습니다. 올해도 선생님이 계시는 대구에는 못 내려갈 것 같습니다. 어서 전화를 드려야겠습니다. 반가워할 선생님 목소리를 생각하니 제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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