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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의 신비에서 날아오른 한 마리의 나비

2005.07.23 15:44

박영호 조회 수:468 추천:54

'미주시인'(THE NEW POETIC WAVES) 2005년 창간 여름호 게재 <시를 다시 읽는다>에서

윤회의 신비에서 날아오른 한 마리의 나비
   -석상길의 시  ‘조개’를 읽고-
                                                                          
파도에 밀려나온 조개
몸을 열어 새에게
알몸을 다 주고

햇살에 말리고 나니

한마리 호랑나비가 되어
산으로 날아가네

꽃잎보다도 가비야웁게

( ‘조개’ 전문.  미주문학 여름호 (2004) 에서 )

조금은 원초적이고 관능적이연서도 우리에게 하나의 자연 친화적이고 미학적 교훈까지도 드러내 보이는 석상길 시인의 작품 ‘조개 ’(미주문학, 2004 여름호)를 읽고, 얼마전 고국의 모 문예지에 소개된 대담기사 중에 나타난 ‘위대한 시’ ‘큰 시’ ‘좋은시’ 라는 표현들 중에서 ‘큰 시’ 라는 말이 떠오르고, 어쩌면 이런 시가 그런  ‘큰 시’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어느 화창하고 한적한 바닷가에서 파도에 밀려나온 하나의 조개로부터 비롯된 한 마리의 호랑나비가 산으로 날아간다는 극히 단조로운 서경적(敍景的)인 묘사 속에서 세월과 생명을 이어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오묘하고 신비한 윤회(輪廻)와 연기(緣起)의 세계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어쩌면 자연을 창조하신 신의 신성한 의지라고도 할 수 있고, 또한 이러한 자연을 통해서 우리 인간들의 절대적 사랑과 헌신이라는 진정성에 대한 선한 의지로 이해하려는 작자의 교훈적 의도가 묘사되고 있어서,실로 자연과 신과 인간을 아우르는 장엄한 철학적 사색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하면 조개가 죽어서 한 마리의 나비라고 하는 새로운 생명으로 연기되어 나타나는 윤회의 모습은 자연의 의지이지만, 이는 에수의 죽음을 통한 대속(代贖)으로 새 생명과 영혼이 탄생한다는 인간 구원에 대한 신의 의지로도 볼 수도 있고, 이러한 자연과 신의 의지를 통해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넘어서서 자연미학적이고 인간의 도덕적 가치로 살아 움직이는 자연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면 우선 내용적으로 이 시가 지니고 있는 그 폭이나 깊이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가 있다.
사실 자연과 신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보다 더 큰 가치에 대한 사유(思惟)의 세계가 따로 또 어디 있겠는가?
이처럼 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그 사유의 세계가 다시없이 크고 넓다는 점과, 그 내용이 어떤 특정한 사상이나 현상에만 국한되어 있지않는 보편타당한 근원적인 철학적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이 시가 큰 시라는 점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내용상의 재제(材題)가 만만치 않은데도 겉으로 나타나 있는 그 표현은 다시없이 간결하고 밝은 하나의 서경적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데, 결국 이러한 느낌은 시인이 언어와 구성의 미학적 조형(造形)을 통해서 형상화 해 놓은 결과라고 할수 있겠다.
우선 시의 외형은 단 칠 행의 짧은 표현이지만, 여기에는 우선 바다가 보이는 해변이 떠오르고, 파도 소리도 들리고, 그리고 파도에 밀려나온 조개도 보이고, 산을 향해 날아간다는 나비의 가벼운 몸짓까지도 느낄 수 있어서, 우리는 다시없이 밝고 명랑한 분위기에 젖게되고 차라리 평화로움 마저 느끼게 된다.
사실 필자가 이 시를 맨 처음 읽었을 때는 맨 먼저 필자의 머리에 떠오르는 두 마리의 나비가 있었다.
일찍이 김기림(1908-1950 납북)시인의 시 ‘바다와 나비’(1939년) 속에 나오는 흰 나비와, 작곡가 윤이상(尹異桑. 1917-1995))씨의 오페라 속에 나오는 장자(莊子)의 ‘나비의 꿈’ 속 나비가 바로 그것이다.
김기림 시인의 바다로 간 나비는 바다가 무서운 줄 모르고 바다로 날아갔다가 상처만 입고 돌아 온다는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라는 현실 속의 슬픈 나비이고, 장자의 무덤에서 나온 장자의 나비는 고통의 현실과 허무의 무덤 속에서 나와 고통도 슬픔도 없는 저 영원무구(永遠無久)의 자유로운 무공(無空)의 세계로 훨훨 날아간다는 허무와 몽환(夢幻)의 나비다.
이처럼 김기림의 나비는 슬픔의 미학을 가져다 준 현실의 나비이고, 장자의 나비는 허무한 현실과죽음의 무덤을 떠나 자유를 찾아가는 환상의 나비일 뿐이지만, 석시인의 ‘조개 ‘ 속의 나비는 이와는 달리 김기림씨의 현실만의 나비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주속으로 사라져가는 비현실적인 허무의 나비도 아니다.  
그저 그 어디에도 슬픔이나 허무 같은 부정의 의식을 느낄 수 없는, 그저 한 폭의 그림 속에 펼쳐진 어떤 청명한 날 오후 바닷가에서 산을 향해 밝은 모습으로 훨훨 아름답게 날아가는 나비인 것이다.
결국 이 나비는 현실 세계의 나비이면서 또한 조개로부터 새 생명으로 전이(轉移)된 윤회속의 나비이고, 또한 현실과 꿈이 조화되어 나타나는 신과 자연과 인간의 꿈을 함께 상징하는 미래의 꿈의 나비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장자의 꿈속의 나비가 장자의 환상이라면 석시인의 나비는 시인의 자연에 대한 값진 관조(觀照)의 사색에서 날아오른 한 마리 나비인 것이다.  

파도에 밀려나온 조개
몸을 열어 새에게
알몸을 다 주고

첫째 연에서 우선 조개가 파도에 밀려나온 것은 자연의 의지라 할 수 있지만, 몸을 열고 알몸을 다 준다는 사실은 조개의 의지이고, 이러한 조개의 의지는 생명까지도 다 준다는 절대적 헌신의 자세로, 이는 우리 인간의 의지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시가 우리에게 더욱 많은 사색의 공간을 마련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몸을 열고 속살을 다 준다는 조개의 의지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나 참된 가치의 실체가 되는 절대적 희생과 사랑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밝히고 있는 셈이다.
바다는 원래 모성(母性)을 표상하는 생명의 근원을 상징하고, 조개는 여성의 구체적인 성을 나타내는 심볼이다. 이는 고대 신화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고, 우리가 수없이 보아온 르네상스 시대의 이태리 화가인 보디첼리(Sandro boticelli, 1445-1510)의 ‘비너스 탄생’(1487)의 회화속에 들어있는 큰 조개 속의 비너스 나체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결국 우리의 인간은 여인의 조개로부터 시작되었고, 그래서 여인의 조개가 우리 생명의 근원이고 인간 윤회의 산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의식 속에는 먼 옛날부터 막연하게 바다와 조개는 신이 마련한 생명의 근원이라는 생각이 베어 있어서, 조개 하면 우리 남성에게는 우선 그 느낌이 원색적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 ‘조개’ 시의 서사도 우리에겐 일상적인 우리 남녀의 이야기로도 다가온다. 조개가 속살을 주듯 여인은 몸을 열어서 남성에게 주고 모성 본능으로 새 생명을 잉태한다. 또한 조개 속에서 나온 호랑나비와 같은 우리 남정네는 밤이면 조개 곁에서 무한한 평화와 안식을 느낀다. 그리고 밤새 여인의 조개 곁에서 새 힘을 축적하고 아침이면 산으로 가는 나비처럼 세상의 산으로 나간다. 그리고 전장(戰場)같은 삶의 터전에서 부딪치며 용감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지치면 다시 조개의 여인이 기다리는 밤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래도 여인은 늘상 조개를 열어 속살을 다 주는 바다같은 모성으로 몸을 열고 그들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성(母性)으로서의 조개의 의지는 생명의 상징인 속살을 다 주고, 그것도 부족하여 빈 껍질에 까지도 남아서 온전하게 주려는 그의 절대적 희생의 자세가 상징적으로 둘째연에서 표현되고 있다.

‘햇빛에 말리고나니’

이 얼마나 깨꿋하고 아름다운 표현인가?
조개 껍질이라고 하면 우리는 파도에 씻긴 깨끗한 껍질을 연상하는데, 여기에서는 그것도 부족하여 햇빛에까지 말린다니, 시인의 그 감각적 표현이 절묘(絶妙)함을 넘어서서 기발하기까지 하다.      
이는 온전히 주고 깨끗이 비운 다음의 공허로움이나 허무가 아닌, 새로운 생명이나 가치를 향한 절대적 헌신과 영원에까지 이어지는 조개의 염원이 표현된 것일 것이다.  
바람 따라 구르다가 발길을 멈추고 자꾸만 뒤돌아보는 낙엽 같은 아쉬움이 아닌, 그저 텅 빈 가슴으로 아쉬움 없이 눈을 감는 어느 인자의 모습과도 같이, 자연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끝까지 수고하고 돌아가는 어느 선자의 모습이어서, 이러한 절대적 순수가 하나의 새로운 가치나 새 생명으로 잉태된다는 윤회와 연기의 근원이 되고 있고, 또한 인간들에 대한 순애보적인 예수의 사랑의 십자가의 의미와 함께, ‘진인사대천명(盡人事 待天命)’이라는 우리 인간들의 선한 의지로도 이해할 수 있어서, 결국은 새 생명인 필연의 나비가 출현하게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 마리의 호랑 나비가 되어
산으로 날아가네

조개의 밝고 순수한 선한 행위가 한 마리의 호랑나비라는 새로운 생명으로 출현하고 있다. 결국 장엄한 자연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생명의 유동과 변신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열망하는 이상적인 새 생명의 출현으로 볼 수 있고, 이를 통해서 우리 인간사회의 절대적이고 또한 근원적 가치가 되고 있는 헌신과 사랑이라는 철학적 명제(命題)를 미학적인 언어의 조련(造練)을 통해서 무리없이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시의 가치를 알 수 있다.
아무튼 조개에서 나비로의 변신은 하나의 경이적인 사실이고 극히 묵시적(默視的)이고 형이상학적이지만, 사실은 지극히 물리적일 수도 있고 생물학적이고 사실적인 변신일 수 있다.
에를 들면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소설 ‘변신’에 나오는 독충(毒蟲)은 극히 상징적이고 비현실적인 변신이다. 주인공의 독충으로의 변신은 일종의 무의식의 세계이고 불안과 고통에 대한 흉악한 저주와 공포의 상징일 뿐이고, 현실문제의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죽음으로서만 고통과 불안에서 해방이 된다는 유한의 세계이고, 인간의 불안이나 고통은 그 어떤 변신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밝히기 위한 극히 몽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변신이다. 거기다가 자연도 신의 세계도 아닌 인간에 한정된 이야기로 꽤 장황한 소설이지만, 변신이라는 내용의 범주를 나타내는 크기에 있어서는 결코 이 몇행의 시에 미치지 못한다.
조개의 변신은 극히 물리적일 수 있는 자연 속의 가장 자연스런 변화의 모습으로, 그것은 밝고 산뜻한 자연의 순수한 의지에서 나타나는 값진 새 생명에로의 변신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자연과 신의 신비한 손길도 볼 수 있고, 또한 우리의 모습도 볼 수가 있는 일종의 현상적(現狀的)인 변신이라고 할 수 있다.
변신이란 일종의 새로움의 상징이고, 그래서 변신을 통해 나타니는 나비를 흔히 꿈으로 상징한다. 사실 나비는 우리 눈에 보이는 여러 모습의 변신을 하는데, 작자는 이런 변신 이외의 눈에 보이지 않는 나비의 신묘(神妙)한 변신까지도 보고 있는 셈이다. 말하자면 새에게 준 조개살이 새가 아닌 나비가 되어 나온다는 변신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나비가 일반 흰 나비가 아닌 호랑나비라는 표현이 보다 더 회화적이고 사색적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데, 이러한 점은 여성을 상징하는 조개에 대한 상대적 성인 남성을 상징하고 있고, 호랑나비가 날아가야 하는 산은 바다와는 대조를 이루는 남성적 세계로 현실적인 삶의 터전일 수도 있고, 미래를 향해 찾아가는 아름다운 꿈의 세계일 수도 있다는 점을 아름다운 무늬로 상징적으로 나타낸 치밀한 작가적 의도에서 표현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산을 찾아가는 이 나비는 그곳 산에서 살다가 언젠가는 그의 육신이 지치면 다시 강물이 되어 바다로 오고, 그리고 다시 새로운 조개를 찾아 새 조갯살로도 차오를 것이고, 이는 영원이라는 긑없는 윤회의 바퀴 속에 반복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나비가 산과 바다를 오고 가는 것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전전(轉轉)이어서 그 오고 가는 것은 아무리 뒤집어도 결국 마찬 가지일 것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시작도 끝도 없는 둥근 바퀴 속의 윤회의 모습인 것이다.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우리 인간처럼, 자신만을 위해 사는 바다 속 조개는 그대로 살다 사라져가는 유한의 존재이지만, 산이나 바다가 자신을 위해 있지 아니해서 영원한 것처럼, 속살을 주고 자신을 버린 조개는 나비가 되어 산으로 가고, 언젠가는 다시 강물이 되어 바다로 오는 등, 그의 생명은 윤회의 바퀴 속에서 영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작자는 살아움직이고 있는 이러한 자연의 순수한 의지에 대해 깊이 관조하고 깊은 사색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다 큰 가치와 새로운 생명으로 발전해 갈수 있는 우리들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꽃잎보다도 가비야웁게’

이 마지막 행의 표현은 새롭게 태어난 나비가 미래의 꿈을 향해 밝은 모습으로 날아가는 긍정적인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비야웁게’라는 말은 ‘가볍다’의 옛말로 지금은 어법상 손쉬운 가볍다로 줄어서 쓰이고 있으나, 어감상으로는 이 옛말이 가볍다라는 현대어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감각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말에는 이처럼 현대어보다 옛말이 훨씬 더 아름다운 경우가 많은데 그 대표적인 언어중의 하나일 것이다.
산으로 날아가는 나비의 몸짓을 꽃잎을 이끌어다 시적 분위기를 다시없이 가볍고 밝게 그리고 회화적이고 율동적으로 표현하여, 자연의 경이로운 움직임을 극히 서정적 서경(敍景)으로 정화(淨化)시키고 있는 셈이다. 결국 무겁고 심오한 내용의 시를 다시없이 밝고 가볍게 순화(純化)시켜 전체적인 시적 조형미를 살리고 사뿐한 발걸음으로 이 시를 밝게 끝맺고 있는 점에서 다시없이 소중한 구실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작자는 이러한 자연의 순수한 의지인 윤회의 개념과 함께 새로운 생명이나 가치에 대한 발전적 모습으로 나타나는 연기(緣起)등의 자연 현상에 대한 깊은 관조와 사색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다 큰 가치와 새로운 생명으로 발전해 갈수 있는 우리들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분은 수석에 남달리 관심이 많은 분이어서 역시 그가 발표한 시 속에는 수석의 세계처럼 자연 친화적인 작품이 많고, 자연을 통한 명상 속에서 자연과 인생의 참된 가치에 대한 진정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돌에서 바람도 강물도 보는 시인. 그래서 돌을 찿아 산과 강과 해변을 떠돌아 다니고, 밤이면 수석 앞에 돌아와 앉아 명상의 세계를 유영(流泳)하면서 깊은 철학적 사색속에서 시작에 몰두하는 자연친화적인 남다른 시인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나왔고 스스로 자연이면서도 자꾸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려 하는 이원적(二元的)인 현상과 만물영장이라는 완전하지 못한 개념으로 자연까지도 다스리려는 우매함을 범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자연친화로 다가서려는 자연보호 현상도 자연을 위한 순수 생태학적인 생각이 아니고, 장차 닥칠 위기에 대한 이기적 발상이라는 점이 바로 문제일 것이다.
인간은 고래로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을 언어라는 표현방법을 통해서 꾸준히 묘사해 왔지만, 생명의 전이(傳移)나 진화 변신 등의 움직이는 자연을 표현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도 그 한계를 합리적으로 좁히고 조금은 가깝게 표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시의 세계라 할 수 있어서 필자는 시를 바로 ‘언어 미학의 꽃’ 이라고 말하고 싶다.
자연이 온전하게 있어야 우리가 온전할 수 있고, 온전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어야 우리의 예술이 온전하게 아름달울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그러한 자연 친화적인 사색의 세계를 통해서 정말 자연 생태학적이고 사회학적인 가치에도 근접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닌 좋은 시 작품을 이 시인에게 기대해 보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 글을 끝맺는다.

장자(莊子)의 꿈
원래 호접몽(호접몽)이라고 하는 장자의 꿈은 ‘꿈과 현실은 같은 것일 수도 있어서 어쩌면 꿈속이 현실이고 현실이 꿈일 수도 있다’는 일종의 합일주의 (萬物齎同, holism, 두개의 현상이 전연 별개가 아니고 하나일 수 있다는 설)의 사상이고, 필자가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윤이상 씨의 창작 오페라 ‘장자의 꿈‘ 속의 환상적인 나비 이야기와는 그 의미가 크게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