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줄타기 (꽁트) - 박경숙

2005.12.05 00:47

미문이 조회 수:578 추천:49

스산한 늦가을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그는 그 공사장 밑을 지날 때마다 이상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우연히 그녀의 윗 송곳니 바로 뒤쪽 어금니에서 반짝 솟던 금속성 광택을 보았을 때부터였을까.

지난봄에 시작되었던 빌딩공사는 장마철과 한여름동안 띄엄띄엄 진행되더니 가을로 들어서자 활기를 띄었다. 아침저녁 출퇴근길에 그 공사장 밑을 지나쳐 갈 수밖에 없는 그는 혹시 벽돌이나 철근 부스러기가 자기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지 않을까 싶어 늘 긴장하곤 했다. 그것은 혹 저 높은 도심의 빌딩 꼭대기에서 갑자기 돈벼락이라도 떨어져 내리기를 바라는  엉뚱한 기대감과 비슷한 것이었다.  

가을바람은 깊고 날카로워졌다. 그는 낡은 바바리코트의 깃을 여미며 조금은 초조하게 출퇴근길을 걸었다. 소멸되는 계절에 대해 공연한 결별의 증오심을 품으며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았고, 표정이 없이 지나는 사람들을 보았고, 매연을 뿜으며 달려 나가는 자동차의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줄을 타는 곡예사는 시선을 고정시키는 자기만의 초점이 있어 그것으로 몸의 균형을 유지한다고 했다. 날마다 아슬아슬 일상의 줄을 타는 그에게 그녀는 언제부턴가 그 비밀의 초점이 되어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던 삶이 엉뚱한 순간에 깨어져버렸을 때, 그러니까 얼굴이 반지르한 아내가 결혼 5년의 삶을 깨고 결별선언을 했을 때 그는 무참했지만 살아가는 일을 계속해야했다. 회사 가까운 골목길에 원룸을 얻어 짐을 옮겼다. 아침이면 휘적휘적 그 골목을 나와 공사장 밑을 걸어 출근을 할 때면 희뿌옇게 솟던 아침햇살에 그의 얼굴은 찌푸려졌다. 숙명처럼 굴러나가는 삶의 연속성은 어느 순간 그의 회사가 있는 고층빌딩 프론트데스크 걸에게 초점을 맞추게 했다. 짙은 화장을 한 그녀는 인형처럼 예뻤고 기계처럼 웃었다.

아침저녁, 혹은 점심시간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일상의 줄을 탔다.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그 삶의 줄에서 거꾸로 떨어질 것 같은 위기감 속에서. 그의 줄타기와 출퇴근길의 빌딩공사는 때론 빨리, 늦게 진행되었고 프론트데스크의 그녀는 점점 더 요사하고 인형 같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때로 고적한 그의 숙소에 누워 마스터베이션을 했다. 그리고 그의 상상 속엔 그녀라고 생각되는 인형처럼 예쁜 여자의 웃음이 있었다. 가을은 깊어지고 떠나간 아내는 돌아올 생각을 않고 출근길 공사장 건물은 그 층수가 높아만 갔다. 어느 날 문득 그는 왜 자신이 이 줄타기를 해야 하는지 의문이 가기 시작했다. 왜 자신은 먹어야하는지 입어야하는지 잠을 자야하는지. 그것을 위해 그는 왜 아침마다 벽돌이 떨어질 것을 걱정하며 그 공사장을 밑을 지나야하는지.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싫증을 느낄 무렵, 프론트데스크의 그녀가 반짝 웃음을 머금었다. 아니 그녀의 웃음은 반짝거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위쪽 송곳니 뒤의 금속성 어금니가 반짝인 것이었다. 문득 그는 그녀의 치아를 한 번도 본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늘 입을 다문 채 입술을 옆으로 늘인 기계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그날 그녀가 왜 입을 벌리고 웃었는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코트깃에 찬바람을 잔뜩 묻히고 출근길의 빌딩을 막 들어섰을 때 그녀의 어금니가 반짝 빛났던 것이다.

탄탄히 조인 그의 고독 속으로 그녀의 어금니는 섬광처럼 빛을 냈고 그는 조심스레 내딛던 곡예의 발걸음이 휘청거리는 것을 느꼈다. 입을 벌린 그녀의 흡입력 속으로 그가 길게 빨려들어 가려는 위기감, 균형의 초점이 흔들리는 파괴였다.

그 뒤로 그는 공사장을 지날 때마다 반대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의 머리 위로 벽돌이나 철근조각이 날아오기를 바랐다. 가지런한 일상으로 포장된 그의 고독은 그 표면을 뚫고 뾰죽히 솟아올랐다. 그는 줄 위에서 하염없이 휘청거리는 자신을 느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거짓말처럼 벽돌 한 장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쾅 정수리로 부딪는 그 낙하에너지에 그는 고꾸라졌다. 곡예의 줄에서 떨어져 내리는 절박함, 그러나 알지 못할 쾌감이 그의 전신으로 물결처럼 번졌다. 그녀의 미소가 반짝 빛을 뿜으며 그의 시야로 가득 밀려오다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미지근한 액체가 찐득하게 목줄기를 타고 흐르자 그는 희미하게 미소를 띠웠다. 마치 기다리던 행운을 만난 듯이....... 낙엽처럼 누운 그의 주변으로 무표정한 사람들은 혹은 모여들고 혹은 지나쳐갔다. 흐린 아침녘에 자동차는 뒤꽁무니를 보이며 그의 곁을 스쳐가고 깊어진 가을도 어느덧 뒷모습인 시간이었다.(*)

              2005 문학나무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