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개구리 한마리씩
2025.10.25 11:48
청개구리 한 마리씩 / 성민희
또 부부싸움을 할 뻔했다. 이 남자 너무 웃긴다. 내가 매일 한 알씩 먹으라며 식탁 위에 올려둔 강황가루약 Tumeric은 몇 달이 지나도록 쳐다보지도 않더니 난데없이 누런 박스를 하나 들고 들어왔다.
“이것 좀 봐라. 이것 먹으면 면역력도 증진되고 몸 안의 염증도 없애준다네. 나쁜 콜레스테롤도 잡아준대. 아침마다 한 숟가락씩 먹자.”
친구가 좋다고 권하기에 자기도 한 통 사 들고 왔단다. 내가 누런 약병을 남편의 코앞에 들이밀며 빽 소리를 질렀다. 이게 강황 가루인데 여태 내가 한 말은 어디로 들었냐고. 한 옥타브 높아진 내 목소리에 눈이 둥그레진 남편이 병에 붙은 라벨을 눈 가까이 대더니 아하! 한다.
이 남자는 매사가 이런 식이다. 내가 말할 때는 건성으로 듣다가 다른 사람이 좋다고 하면 절대 진리로 알고 복종한다. 중요한 자리에 갈 때는 넥타이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이게 좋아? 이게 좋아? 묻는다. 내가 오른쪽 것이 더 잘 어울린다고 하면 거울 앞에서 목에 몇 번 번갈아 대어보고는 왼쪽 것을 매고 나온다. 때로는 운동 간다고 나서다가 묻는다. 반바지 입을까? 긴바지 입을까? 날씨가 더우니 반바지 입으라고 하면 바지 몇 개를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긴바지를 입고 나선다. 도대체 이해를 해주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청개구리 놀음이 재미있어서인지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여자 네 그룹이 와글와글 골프를 쳤다. 계절에 맞지 않게 내뿜는 햇볕의 열기 때문에, 골프를 쳤는지 죄 없는 잔디를 파대기만 했는지 분간도 못 할 만큼 지쳤다. 준비해 간 물 두 병도 모자라 찬 소다를 마구 마셨더니 뱃속이 출렁이는 느낌이다. 라운딩이 끝나자, 차를 몰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식당으로 가는 중이었다. 빨강 신호등에 걸려 서 있는데 앞 차의 조수석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친구가 벌게진 얼굴로 쫓아왔다. 차가 갑자기 꼼짝을 안 한단다.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으니 이머전시 등을 켜고 뒤에 서 있어 달라는 부탁이다. 트래픽이 심한 퇴근길에 도로 한복판에서 정지해 버렸으니 위험하기 그지없다. 나는 이머전시 등을 켜고 앞 차를 엄호(?)했다. 차 주인은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보지만 모든 프로그램이 꺼져버린 차는 트렁크 문조차도 열어주지 않는다.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나는 그저 차 안에 앉아서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배 속에서는 쪼르륵 소리가 연신 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디서 나타났는지 파란 티셔츠에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백인 남자가 다가왔다. 차 주인에게 밖으로 나오라는 손짓을 하며 위험하니 저쪽 인도에 가 있으라고 한다. 익숙한 솜씨로 범퍼를 열고 이것저것 만지던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지나가던 또 다른 백인 남자가 그 모습을 보고는 길가에 차를 끼익 세웠다.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나 보다. 차 조수석에서는 부인인 듯한 임신한 여자가 내린다. 두 남자가 마주 보고 주거니 받거니 의논하더니 한 사람은 뒤에서 밀고 한 사람은 운전석에 앉아서 핸들을 잡는다. 일단 차를 안전한 곳으로 옮길 생각인 듯하다. 그런데 웬걸 차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머전시 등이 깜박이건만 아무 생각 없이 뒤에서 나의 출발을 기다리고 서 있는 무심한 차도 있다. 나는 상체를 차창으로 내밀고 비켜 지나가라고 손짓하려니 팔도 아프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파란 티셔츠 남자가 내게 와서는 그냥 가란다. 경찰과 견인차를 불렀다며 잘 해결될 거라고 한다. 내가 차를 빼어내자, 그는 고장 난 친구 차에 등을 대고 서서 마주 오는 차에게 차선을 바꾸라며 교통순경인 양 양팔을 번갈아 휘젓는다. 두 남자의 등 쪽 티셔츠가 물기를 잔뜩 머금고 몸에 착 달라붙었다. 아무 의식 없이 드러나는 그들의 자연스러운 배려에 날씨와는 상관없이 마음이 따뜻해졌다.
식당에 도착하여 궁금해하는 친구들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는데 차는 딜러에 맡겼다며 두 친구가 렌터카를 타고 왔다. 백인 남자들 덕분에 일이 쉽게 해결되었다는 말을 들은 여자들이 모두 한마디씩 한다. ‘미국인의 봉사 정신과 휴머니티가 이 나라를 세계 최강국이 되게 하는 원동력이다. 미국 남자들의 신사도는 몸에 배어 있더라.’로 시작하여 ‘미국 남자들이 역시 멋있더라. 한국 남자와는 비교도 안 된다.’ 까지 발전했다. 테이블 한쪽에 앉아 모자를 벗어들고 숨을 고르던 차 주인이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내가 미국에서 50년 가까이 살았지만 백인 남자하고 결혼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오늘 처음으로 해 봤다.”
갑자기 식당 안이 와아 하는 웃음소리로 가득 찬다. 순간 백인 사위를 본 친구가 살짝 부러워지려고 하는데. 저쪽 귀퉁이에서 누가 한마디 한다. 암만 좋아도 말이 통해야 하는 거 아니야? 모두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또 와글와글 웃는다. 그 말도 맞긴 하다. 자상하면 뭐 해. 함께 살아가려면 말이 통해야지. 그래도 한국 남자가 편하다는 분위기로 바뀌려는 찰나, 커다란 목소리가 또 다른 쪽에서 삐쭉 올라온다. “너희들, 한국 남편하고는 말이 통해서 사니?” 식탁 위의 그릇도 데굴데굴 구른다. 맞아. 맞아. 한국 남편하고 한국말을 하는데도 말이 통하냐? 이번에는 손뼉 소리까지 들린다.
그날 우리는 집집마다 청개구리 한 마리씩 키운다는 공통 명제에 위로를 받았다.
<2025.7.24 울산 광역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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