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프리지아
2025.10.25 11:52
엄마와 프리지아
한바탕 비가 지나가고 나니 뒷마당의 공기가 달라졌다. 바람도 부드럽고 구름도 평온하다. 오늘은 뒷마당 귀퉁이에 노란 프리지아가 싹을 피웠다. 겨우내 땅 속에서 숨을 죽이다가 봄만 되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천진난만한 꽃. 여린 줄기가 흙을 헤집으며 가만히 봄볕을 잡고 올라왔다. 꽃잎에 맺힌 투명한 물방울에 햇살이 스며든다. 따스한 봄바람이 한 겹 한 겹 접어올린 듯 얇고 섬세한 꽃잎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엄마 생각이 난다.
어느 해 봄, 엄마는 프리지아 화분을 두 개 들고 오셨다. 친구 병문안 가면서 샀는데 너무 예뻐서 두 개를 더 샀다고 하셨다. 옷을 척척 벗어던지고 고쟁이 바람으로 웅크리고 앉아 뿌리 위로 흙을 덮고 꼭꼭 누르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프리지아를 심은 그 해 가을, 엄마의 친구는 돌아가셨다. 장례식에서는 그렇게 울지 않으시던 엄마가 이듬해 봄에 다시 핀 노란 꽃을 보며 눈물을 흘리셨다.
“꽃은 이렇게 다시 피었는데 너는 어디로 갔기에 오지 않니?”
엄마 떠나신 지도 벌써 5년이 되었다. 이제는 내가 엄마처럼 앉아 꽃을 들여다본다. 봄이면 프리지아는 어김없이 찾아오는데 엄마는 왜 오시지 않는가요? 엄마가 꽃보다 훨씬 귀하고 튼튼한데 왜 계절처럼 돌아오지 않는가요?
우리도 꽃과 같은 자연의 일부지만 인간의 생명은 순환이 아니라 단 한 번의 흐름이다. 물이 증발하면 다시 비로 내리고 나무는 떨어진 잎을 양분 삼아 새 잎을 틔우나, 사람의 시간은 재생시킬 수도 다시 시작할 수도 없다. 되돌릴 수 없는 길, 수정할 수도 다시 걷는 것도 불가능한 길이다. 삶은 끊임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지만 어느 순간 우리가 지나온 길은 닫혀버리고 다시 걸을 수 없는 흔적이 된다. 그야말로 비가역선(非可逆線)이다. 이런 사실 때문에 인간의 존재는 고귀하다고 말하나보다. 유한하기 때문에 순간을 더욱 간절히 살아내는가보다. 언젠가 끝이 있다는 걸 알기에 지나간 사랑도 후회도 슬픔까지도 소중하게 안고 그리워하는가보다.
어릴 때는 이별이라는 단어가 그리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저 많은 단어 중 하나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한 번 흘러가면 되돌아올 수 없는 강물처럼 시간도 삶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영별이란 살아남은 사람에게 남겨진 깊은 그리움과 상실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어쩌면 오늘 프리지아를 바라보는 것도 그리움의 한 방식인지 모른다. 비록 엄마는 돌아오지 않지만 엄마의 온기와 향내는 내 기억 속에 숨 쉬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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