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진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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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일상의 무늬

2020.04.16 20:47

전희진 조회 수:36


 일상의 무늬

-CCTV

전희진 

 

1:01 AM  #2  벤자민 나무에서 잎사귀 하나 떨어진다

2:11AM  #1   뿔사슴 한 마리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핀다  장미의 모가지들을 똑딱        

              동네 불량배처럼  해치운다   흠칫, 뒤를 들킨 어둠이 돌아본다

3;25 AM  #2  나방 한 마리 사선을 그으며 멀어져간다

5:21 AM  #3  뒷뜰 군자란의 커다란 입이 맹목적으로 벌어진다

5:57AM  #2  추리닝을 입은 주인집 아저씨가 텃밭으로 다가가  뒤로 세 발짝 앞으로 세 발짝

            슬로우모션으로  빠른 동작으로 뒷짐을 졌다가 뒷짐을 풀었다가 춤선생에게 교습받는  

            학생처럼 정직하게

6:15AM  #2  주인집 아저씨가 한 손에는 커피잔을 다른 한 손에는  보이지 않는 희망을 들고     

             부겐빌레아 그늘을 돌아서 간다

6:46 AM  #4  블루제이 한 마리 빨간 모이통에서 모이를 꺼내려다 자꾸 발이 미끄러진다 

             사기로 만든 모이통은 역시 사기꾼, 카메라는 통통한 새의 가슴과 불끈 솟은 배의       

             털을 확대경으로 찬찬히 들여다본다  

              푸다닥 푸른 꽁지의 안간힘이 조였다가 풀어지고 조였다가 풀어지고

9:38AM  #4   잠자리채같이 기다란 막대를 들고  젊은 수영장 청소 부부가 태양의    

             실마리를 풀 것처럼 물 주위를 휘휘 맴돈다  갑자기 말벌 한 마리 쏜살같이 물속으로     

             뛰어든다  수명이 짧은 원을 그리며 돌 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수면이 잠시   

             파닥파닥 되돌릴 수 없는 맴을 돈다는 것을

 

11:59AM  #4  잔잔하던 수영장 물이 요동을 치며 경악한다  (가까운 아트센터에선 무대의         

             샹들리에가 한 차례 왼편으로 다른 한차례 오른편으로 출렁이다가 아이들의   

              비명소리에 곧 잠잠해진다)

 

-오늘의 속보:  강도 7.1 지진, 두 시간 반 거리-

   추울렁 추울렁 먼 산이 울린다

 

 

-시와정신 2020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