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환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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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고모 할머니

2021.06.25 06:51

정종환 조회 수:35

요새처럼 살기 힘들면 어쩐다니

옛날에도 이러지는 않았다며

하얀 머리 곱게 쓰다듬는

당신!

 

 

돈이 많아 살기가 편해도

사람이 사람하고 살아야 한다며

고향 기산으로

서둘러 보따리 챙겨 떠나는

당신!

 

 

시집가서 이년 만에 혼자되어

흙과 더불어 우리를 키워 주고

밤낮으로 마음 쓰며

동네 잔칫집 돌아다니며

젖 얻어 먹일 때

그 때가 청춘이었다며

감추고 감춰 놓았던 주머니에서

꺼내 주시는 꾸겨진 종이돈

 

주는 것 받지 않고

사람 무서워 못 다니는 곳에서

어떻게 사냐며 부르는 노래

"어제는 검은 머리 소녀였는데

오늘은 백발 노인 괄시를 마라

아흔 살 먹으며 살아온 일

생각나는 것 하나 없구나!"

울려다 웃으며 고개 숙여

바느질 하시는

당신!

 

 

옆집 순자네 잔치에서

몰래 얻어온 떡을 주면서

정씨가문에 인물 났다

동네방네 떠들어 댔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당신의 모습

 

몇 해 전

양복을 빼 입고 당신 계신 집으로 찾아가니

당신은 돼지우리 같은 캄캄한 부엌에서

소금으로 찬밥을 양푼에 비벼 먹다가

얼싸안고 등을 또닥거려 주면서

올려보시던 그 미소!

 

이제는

뻣뻣해진 손가락들

눈물이 마르지 않는 눈

쭈글쭈글해진 뺨

구부러진 허리

눈 내린 머리카락

소나무 지팡이

부지깽이로 구멍 낸 검정 고무신

다 떨어진 치마를 지푸라기로 동여 매고

오늘도 마실 떠나시는

당신!

 

때로는 괄시 한다 서럽다 울면서

여자하고 이야기만 해도 안 된다

두 손을 꼭 쥐어 주시던

당신!

 

긴 긴 겨울밤 등잔불 밑에서

머나먼 타국에 있는 큰 조카에게서 온

편지를 읽을 수 없어

떠듬떠듬

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누를 황만 중얼거리며

보고 싶다 하던 당신은

초가집과 기와집 차이를 몰랐고

한밤중 초가집으로 가는

당신이 보고 싶어

몰래몰래 대문 여는 소리에

막 울었다지요

 

다리를 포개면 가난하게 산다며

다리를 내려 주시던

정성스런 손길!

 

요새 사람들 어디 쓰겠느냐

속이고 뺏고 돌라 먹는데

너희들은 그러지 말라며

하루 내내

사람걱정 나락 걱정하면서

사람이 한 오백년 사는 것도 아닌데

그 놈의 일 그만 하라고 하시는

당신!

 

부끄럽지만 정말

이름도 없었던 당신을 사랑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