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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blue>발가락 이야기
2008.09.17 17:18
발가락 이야기
전주안골노인복지회관 수필창작반 김상권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보낸 사람은 이정옥. 처음엔 그가 누구인지 얼른 생각나지 않았으나 금세 알아냈다. 반가워서 얼른 편지 봉투를 뜯었다.
“보고 싶은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전라북도 김제시 용지면 용동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께서 글씨를 못 쓴다고 ‘발가락’이라고 별명을 지어주신 제자 이정옥입니다.”
너무도 잘 쓴 글씨였다. 그렇다. 32년 전에 용동초등학교에서 나는 6학년 1반, 한문석 선생님은 6학년 2반을 맡았었다. 그때 나는 아이들에게 각자 별명을 붙여 준 적이 있었다. 정규성은 콘사이스, 나윤자는 교수 등등……. 그들의 특성에 걸맞게 별명을 붙여 주었었다. 그러나 이정옥에게는 ‘발가락’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발가락에 연필을 끼워 글씨를 써도 그 정도는 쓸 것이라며 붙여 준 별명이었다. 내가 글씨를 못 써 많은 괴로움을 받았기 때문에 어느 학년을 맡아도 늘 글씨에 관심을 갖고 지도했었다. 지나고 보니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발가락’이란 별명은 너무했다 싶다. 발가락은 분명히 좋은 별명은 아니며, 아이에 대한 인격적인 모독이라 할 수도 있다.
별명이라는 것은 듣기 좋고, 또 그런 방향으로 가길 바라는 뜻으로 붙이는 것이 좋다. 부정적인 뜻이 들어있는 별명은 놀림감이 될 뿐 아니라 좌절에 빠뜨릴 위험이 있기 때문에 삼가야 한다. 발가락이란 별명 때문에 놀림을 받았던 바로 그 아이가 아주 잘 쓴 글씨로 편지를 보내 준 것이다. 퍽 기쁘고도 자랑스러웠다.
이어서 그는 중소기업체에서 전무이사를 맡고 있으며 7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단다.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께서 지어주신 별명 ‘발가락’을 교훈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땐 창피해서 선생님을 원망하고 미워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고맙게 여긴다는 것이었다. 곧 동창회가 있으니 꼭 참석해 달라는 부탁도 했다.
나는 편지를 다 읽고 생각에 잠겼다. 과연 나는 부끄러움이 없는 교사였던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신중하지 못했고, 아이들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지도 못했던 것 같다.
정옥이로부터 편지를 받은 한 달 뒤 용동초등하교 22회 동창회에 참석해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교사는 제자들의 초대를 받는 것과 제자들의 성공소식을 들을 때가 가장 기쁘고 행복하며, 보람을 느낀다. 나도 그런 마음이었다. 장소는 완주군 용진면 어느 음식점이었다. 만나는 제자들마다 고개를 숙이며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좀 늦게 도착한 정옥이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했다. 선물까지 내밀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고맙다며 절을 받았다. 그는 편지에서 자기가 말썽꾸러기, 숙제 안 하기로 유명한 녀석, 싸움만 하는 녀석이라고 표현했었다. 그가 이젠 의젓한 중년 신사가 되어 성공해서 돌아 온 것이다.
마음의 상처를 준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있으려니 했는데, ‘발가락’이란 별명을 교훈으로 삼았다니 그가 나보다 훨씬 너그럽고 멋진 사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 도중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날마다 교무실 청소를 하면서 점심시간에 선생님들의 도시락을 난로에서 데워주었던 옛날 그 여자아이가 “선생님, 절 모르시겠어요?”하고 묻는 것이었다. 내가 대답을 미처 못 하고 어물어물 하자, 몹시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얼마나 난처하고 미안했던지…….
이제 중년이 된 제자들을 보니 그들이 어린이였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월말고사가 있었고 다른 반과 경쟁을 했었다. 서로 옆 반에게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가르쳤고 열심히들 공부를 했었다. 앞 냇가에서 붕어, 송사리, 미꾸라지 등을 잡던 일들이 어제 일인 듯 생생했다.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던 청순한 아이들이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보다 더 열심히 가르칠 수 있을 텐데 하고 부질없는 생각도 해 보았다.
정옥이로부터 4년 만에 두 번째 편지가 왔다. 2003년 11월 14일이었다. 지금은 뉴-월드건설주시회사 대표이사로 있으며 내년 2월 회사에서 지은 아파트를 오픈하는데 그때 선생님을 모시고 테이프 커팅을 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잘 쓴 글씨였다.
‘그래, 초대하면 꼭 참석해야지’하며 마음속으로 기다렸는데, 무슨 영문인지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아무런 일이 없어야 할 테데…….
우리는 흔히 한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할 때 지금의 눈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려는 경우가 있다. 미래에는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르는데…….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은 성공가능성이 무궁 무궁하건만 그걸 참아주지 못하고 서둘러 판단한다. 부모나 교사는 아이들이 잘 자라도록 느긋하게 기다리며 참을 줄 알아야 한다. 글씨를 못 쓴다고 야단맞았던 정옥이가 글씨를 잘 쓰고 성공한 경우도 있지 않은가. 달리기는 빠를수록 좋지만 그 외 과속운전, 빠른 건축, 빠른 여러 가지 공사 등은 빨리 서두르는 바람에 낭패할 수도 있다. 교육정책이나 경제정책 등에서 빠른 성과를 바라며 일방적으로 강행한다면 그것 또한 실패를 가져 올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빠름이란 곧 실패를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정옥이 같은 사람만 있다면 ‘발가락’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2008.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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