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Bonghee's Focus … 제2시집 유봉희 시집 [몇 만년의 걸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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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봉희 제 2시집 [몇 만년의 걸음] |
윤정구 / 추천 단평 |
해맑은 절제와 달관의 시학.
/ 글 : 윤정구/ 2006-05-29 /
1. 첫시집 『소금 화석』의 감동
유봉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몇 만년의 걸음』을 읽으면서
느닷없이 에밀리 디킨슨의 「희망은 한 마리 새」가 떠올랐다.
“희망은 한 마리 새/ 영혼 위에 걸터앉아/
가사 없는 곡조를 노래한다/ …/ 나는 그 소리를 아주 추운 땅에서/ 아주 낯선 바다에서도 들었다” 는 울림이
유봉희의 작품에서도 메아리져 나오는 것은 아마도 시인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는 선입감과 함께 그의 첫시집 『소금 화석』이
들려주던 초월적인 메시지의 잔향 때문인지도 모른다.
유봉희 시인의 작품은 심정적인 호소력에 의존하는 에밀리 디킨슨과 달리
정공법으로 사물을 형상화하고 변형시킴으로써 본래의 사물이 지니고 있는
내용은 물론 사물의 이면을 꿰뚫어볼 수 있는 역동적인 상상력을 구사한다.
서로 대척점에 서 있는 두 시인이지만, 시를 읽고 난 후에
남겨지는 감동적인 여운은 독자로 하여금 삶이 무엇인지 각별한 사유를 하도록 만들고 있어서 흥미롭다.
유봉희 시집 『소금 화석』은 신선하고 독특한 시각으로 읽어낸
자연의 메시지이자 초월적인 세계의 메시지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유봉희 시인은 자연의 모든 것에서 자연 그 자체의 메시지를 듣는다.
눈이나 비와 같은 자연의 현상은 물론 산과 강과 같은 자연의 형상에서도 메시지를 수신하고 그 뜻을 해독한다.
…중략…
유봉희 시인이 이번에 펴내는 시집 『소금 화석』은 자연의 메시지를 독자적으로 수신하고
해독하는 미학적 장치를 개발함으로써 그가 보고 듣고 마주치는 일체의 자연을 재해석하고 가공하여
시인의 분신으로 전이시키는 특별한 감성을 선보이고 있다.
자연을 단면적으로 절삭하여 오브제로 재가공하고,
그 오브제에 상상력의 담금질이 가해짐으로써 탄력적인 내용이 증폭되는 것이다.
남종의 문인화가 보여주듯 시인이 보여주는 자연은 실체의 자연이 아니라 시인의 자화상이 되고,
시인이 심정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자연은 마티에르의 체질감을 북돋음으로써 초월적인 세계를
가시적으로 구도화하고, 그 미학적 품격을 한층 드높여주는 것이다.
자연이 유봉희 문학 지도의 새로운 명소로 변모하는 변신의 기법이다. ―박제천
필자는 아직도 『소금 화석』을 처음 대했을 때의 신선한 감동을 간직하고 있다.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이 거의 편차가 없이 형상화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시학의 성취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거듭 감탄했었다.
그 중에서도 짤막한 작품 속에 상상력의 한 전형을 보여준
「돌 속에 내리는 눈」은 참으로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나는 그 작품에서 문득 옥타비오 파스의 「태양의 돌」이 보여주던 절제된 시정신의 실체를 보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검은 몸에 하얀 점 박혀 있는 돌
그곳은 깊은 겨울 밤
흰 눈 내리고 있네
끝없이 내리고 있네
잊었던 고향 밤, 흰 눈 내리는 밤
그 돌 속에 들어와 있었네
눈밭에 발자국
자꾸 찍으며 고향길 가고 있네
―「돌 속에 내리는 눈」 전문
8행으로 가슴 찌르르 해오는 고향을 그려내는 일은 시력이 오래 된 중진시인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유봉희 시인은 어려운 낱말이나 비약적인 문장을 하나도 쓰지 않으면서, 훌륭한 시적 성취를 이루어내었다.
결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고향에의 그리움을 점박이돌 하나에 담담하면서도 의미있게 담아낸 것이다.
시인은 일찍이 『문학과창작』 당선소감에서 이미 그런 자신의 시법(詩法)을 고백한 바 있다.
내가 만난 대상의 뒷얼굴을 보려는, 잠겨 있는 그들의 소리를
들으려는 것이 요즈음 내가 하는 공부의 한 방법이다.
높은 경지에 닿은 시인들은 풀꽃을 타고 우주를 날고,
책상에 앉아서도 백리 밖의 파도소리를 듣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 삼십 년 간의 이국 생활, 지금도 내가 눈맞추는 꽃들과 새들은
한국말로 인사를 보내고 노래 부른다.
내가 쓰다듬는 돌들은 우리말로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에밀리 디킨슨이 ‘아주 추운 땅에서도/ 아주 낯선 바다에서도 들었’ 던
것처럼 유봉희 시인은 사물로부터 마음 속으로 그리던 것들을 찾아내고, 이야기하고, 껴안아준다.
시인은 점박이돌 속에서 고향에 내리는 눈송이이며, 고향의 눈밭을 걸어가는 그리운 발자국을 단숨에 찾아낸다.
이러한 직관의 힘은 이국생활의 정서적 체험도 작동하였겠지만,
그보다는 엘리엇의 시론이 말해주듯 대상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고
생각할 수 있는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 절제와 달관
유봉희 시인은 식탁에서 사과를 먹다가, 창가에서 난이나 항아리나
배꽃 지는 풍경을 무심한 듯 바라보다가, 그런 예사로운 것들로부터
새로운 것을 듣고, 새로운 뜻을 해독해내는 것이다.
사과 한 알로 아침이 깨어난다/
…그러다가 사과씨를 만날 때가 있다/
…사과씨가 나를 볼 때가 있다/
…새까맣게 여문 눈으로 나를 보며/
나를 어떻게 하겠어요? /
물어보곤 한다…
―「사과씨」 부분
항아리 속 어둠도 길을 트는가/
밤마다 어둠을 타고 흘러나와/
책장을 슬슬 넘겨보다가/
…마을 어귀 공동묘지, 오래된 어둠도 만나보는가
―「저, 항아리」 부분
…더러 서풍 부는 날/
창문은 만년설을 이고 있는 산 하나를 잡아 놓는다/
몇 년째 푸른 손만 내려놓고 있던 양란이/
줄기를 올리고 몇 개의 몽우리를 달고 있다
―「그녀의 방엔 밀물과 썰물이 함께 흐른다」 부분
사과를 깨물어 먹는 사람은 누구나 사과씨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나를 어떻게 하겠어요?’라는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책을 읽다가, 문득 항아리를 보는 이는 많을 터이지만,
항아리 속에서 삶과 맞닿아 있는 마을 어귀 공동묘지의 캄캄한 죽음을 돌아보기는 쉽지 않다.
시인은 낙화를 통하여 사랑하는 이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그리고, 서풍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난을 잊지 않는다.
이야말로 해맑은 절제의 힘이자, 직관의 실체화라 할 수 있다.
유봉희 시인의 시는 또한 사물이 갖고 있는 수많은 속성을 동시에 표출해내는 힘을 갖고 있다.
예컨대 「그녀의 방엔 밀물과 썰물이 함께 흐른다」의 경우,
밀물과 썰물이 상징하는 바와 같이 슬픔과 기쁨, 차가움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세상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9층의 창문에서 왕복 12차선을 바라보며
‘우주 밖으로 멀어져 가는 별들이 붉은 몸을 만들며 멀어지듯/
떠나가는 것들은 붉은 줄을 남긴다’
고 천연덕스럽게 진술하고, 떠나가는 것과 지워지는 것, 멀어지는 것들
한편에 몽우리를 피워 올리는 양란을 그림으로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각별한 성찰의 성과이자 삶을 낙관적이고
긍정적으로 해석해내는 맛있는 달관의 힘이 아닐 수 없다.
3. 원근법과 상상력
세상을 지워가는 서풍과 만년설의 무채색 차가움이 뚜렷이 남아 있으면서도
대비되는 붉은 색채와 녹색의 강렬한 이미지를 원근법의 가까운 곳에 배치함으로써,
따뜻함으로 회색 세상이 극복되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런 모든 것을 독자가 눈치채지 못하는 가운데 이루어낸다.
밀란 쿤데라는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 공허가 있다고 했다던가?
영원한 회귀의 실체는 무겁지만, 반복을 허락하지 않는 우리의 삶은
깃털처럼 가볍다는 것을 유봉희 시인은 오히려 달관의 바탕으로 삼고 있다.
유봉희 시인의 강점은 초벌그림처럼 말랑말랑한 감성일 것이라고 누구는 말하였지만,
나는 오히려 시인의 해맑은 절제와 맛있는 달관이 어울려내는 성과물이라고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사물의 숨겨진 진면목을 찾아내는 상상력과 직관이 자리하고 있기에 시인이 시적 대상을
산으로, 들로, 바다로, 하늘로, 우주로 확대할수록 그 효과 역시 증폭현상을 가져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아마도 침착할 정도로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 하면서 주지적으로 사물을 해석해내는
시인의 작품이 공감도를 높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절제와 상상의 조화 때문이리라.
어떤 청개구리는 낙엽 몇 장으로/
겨울 잠을 잔다지요/
제가 살던 나무 밑 낙엽 몇 장으로/
겨울 꿈을 꾼다지요/
…/ 죽음의 문턱을 막 넘어서 오는/
숨가쁜 봄을 만났을까요/
제 몸같이 파란/
엽서 한 장 받았을까요
―「겨울잠」 부분
누워서도 벽이 되고/
쓰러져서도 기둥이 될 수 있는지/
버클리 해안가를 걷다 보면 알 수 있다
―「가혹한 시작」 부분
쨍그렁, 수정 부딪치는 소리/
나도 한때는 별이었나 보다/
록키산 위에 살던/
맑고 푸른 별이었었나 보다
―「내 별에게 가다」 부분
‘혈관과 피까지 얼려 놓고/ 죽음의 문턱을 베고 자는’
청개구리의 ‘한 치 앞을 못 보고 꾸는 꿈’ 을 궁금해 하는 시인의 마음이
‘제 몸 같이 파란/ 엽서 한 장 받았을까요?’로 끝낸 「겨울잠」이나,
‘소금기 밴 깨어진 콘크리트 조각 위’ 에서
‘이 간지러움/ 고몰고몰 움직이는 것들, 찰랑찰랑 춤추는’ 생명들이
집 짓고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가혹한 시작」,
‘오늘 밤 하늘이 록키산 중턱으로 내려왔다’ 로 시작하는
「내 별에게 가다」 등에서는 거친 캔버스에 아슬아슬 자라나는
생명의 신비를 그리고 있다. 콘크리트로 대변되는 현대 문명의 가혹한
환경 파괴에 대하여 간지러움, 고몰고몰한 움직임, 찰랑찰랑 추는 춤을
통하여 도저한 생명으로 벋어가는 생명의식을 시의 기저에 깔고 있는 것이다.
‘저 속에 내 별 있어 나를 알아보려나/
세상 먼지 찐득한 나를 알아보려나’
하고 걱정하면서도,
‘그도 나를 닮아 외톨이로/
내가 밤길을 찬 이슬로 젖을 때/
어두운 망망 하늘을 차갑게 떠돌았을 그’
라고 보듬어 생각하며,
‘외톨이의 매캐한 쓸쓸함 알아차릴 것이다’
라는 별짝꿍과의 해후는 시인이 만나는 ‘자신과의 해후’ 라서 각별한 의미를 더하고 있다.
시란 혼돈 상태에 대하여 잠시 버티어보는 것이라고 로버트 프로스트가 말했던가?
잠시 해맑고, 또렷한 순간을 가지는 것이라고...
유봉희 시인의 작품을 읽노라면, 그런 해맑은 기운이 독자에게도 전해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평범한 발상이라고 할 만큼, 자연스런 시작과 함께 묘사가 뛰어나서,
그런 묘사의 기본기만으로도, 특별한 구도나 기교의 도움없이,
절제에서 오는 여백과 함께 충분한 문학적 성취를 이뤄낸다.
그것은 필치가 단단한 화가와 마찬가지로 품는 대상에 관계없이 다이나믹한 묘사의 신선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봉희 시인의 시를 생동감있게 만드는 것은 힘있게 펼치는 상상력의 폭일 것이다.
상상의 날개를 저어가는, 시인에게 가장 중요한 예감 같은 것이 유봉희 시인에게는 있다.
어머니가 그리신 그림 속/
오솔길을 따라 들어간다/
초가을인 듯 길 입구는 낙엽이 내려 있지만/
길 끝은 휘어져서 보이지 않는다/
…/ 어머니는 어디쯤 가고 계신지/
매번 입구에서 서성이다가/
들어서지 못하는 어머니의 오솔길
―「어머니의 오솔길」 부분
어머니가 그린 그림 속 길을 따라 들어가고픈,
그래서 어머니를 한번 만나 뵙고픈 시인의 사모의 정이 잔잔한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그리움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어머니를 그린 작품은 많지만,
어머니 사랑은 너무 크고 안타까워서 성공적으로 그려내기는 매우 어렵다고 한다.
유봉희 시인은 평생의 숙제라는 어머니를 이렇게 차분하게 그려내고 있다.
비상 수단을 쓰기로 한다
비닐 봉지에 땡감을 담고
사과 한 알을 같이 넣어 봉한다
귀 기울여 들어보면
어리둥절한 사과와 땡감이
서로 무관심한 척 등 돌리는 소리
며칠을 두었다가 들어보면
어느새 말랑말랑 말 트는 소리
한 이틀 잊은 듯 참았다가 열어보면
발그레한 홍시의 얼굴
이 가을엔
아예 마음의 모든 잠금쇠를 풀어놓고
그저 땡감과 함께
밀봉한 봉지 속에 며칠을 앉았다가
그리운 이가 삼십 촉 눈길로 바라보면
뼈도 살도 단물로 녹는
홍시가 되어 볼까
―「홍시 만들기」 전문
‘어디 수국뿐일까/ 알게 모르게 부러뜨린 것’ 이란 「구름 속 수국꽃」이나,
‘닭 쫓던 개 지붕만 쳐다본다는 말도 무슨 뜻인지 아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물어보면/ 물론 닭이지 대답하는 케이지 후리 계란을 샀다’ 는 「케이지 후리 계란」 등
평이한 일상에서도 조금 떨어져서 사물을 솔직하면서도 능청스레 돌려 해석하는 달관형의 시편들도 재미있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항상 어느 곳이든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한다던가?
행동의, 희망의, 열정의, 절망의 끄트머리까지...
아무런 열정도, 마음의 갈등도, 불확실한 것도, 의심도, 심지어는
좌절도 없이 신을 믿는 사람은 신을 믿는 것이 아닌 것처럼,
시인은 수많은 갈등을 통하여 오히려 화해를 만들어낸다.
만남에서 적응까지, 소통에서 사랑까지, 삶의 행불행을 모두 「홍시 만들기」에서 만나볼 수 있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4. 상상력의 미학적 성과
그러나 유봉희 시인의 새 시집이 특히 이채로운 점은 시인이 외부와 소통하는 방식일 것이다.
시인은 일찌기 첫시집 『소금 화석』에서 자연의 메시지,
초월적 세계의 메시지를 독자적으로 수신하는 매력적인 미학장치를 선보인 바 있다.
그때의 특별한 감성은 새 시집에 들어와 사물에 대한 상상력, 우주에 대한 친화력으로 발전해 나간다.
고래들이 알래스카로 이동을 시작하는 삼월
캘리포니아 북쪽 해변
나무뿌리 큰 둥치가 검은 모래사장에서
물개 모양으로 등걸잠을 자고 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큰고래들과 어깨를 비비며
새끼 고래는 살짝 업어도 보았을 것이다
조금 전 이 모래 사장에 닿았는지
젖은 몸이 검게 윤기 흐른다
몸통을 세워보니 물개가 하늘로 오를 듯
돌려보니 다시 물 속으로 자맥질
세워도 뉘어도 중심이 잡힌다
보이지 않는 중심이 여러 개의 팔을 가졌다
여기 좀 잘라 줘요, 여기 좀 깎아 줘요
파도치며 부딪치며 깎이고 닳아서
저를 완성시킨 나무 둥치
앉아도 서도 중심 못 잡고 모래밭 걷는 사람
나무 등걸에 업혀 고래 따라 간다면.
―「중심점은 여러 개다」 전문
이 시집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랄 수 있는 「중심점은 여러 개다」는
버려지고 잊혀진 사소한 것에서 존재의 뿌리를 찾아내는 상상력의 힘을 보여준다.
그것은 마치 연기론적인 세계의 한 전형처럼 유정한 것들과 무정한 것들의 소통을 말해주는가하면,
그것들의 소통에 시인이 참여하는 화엄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말하자면 나무뿌리에게는 물개의 생명력이 부여되고, 물개는 고래의 친구가 되고,
파도를 통해서 스스로를 완성시키는 수행의 과정을 보여주는가하면,
그 과정을 나무뿌리의 등걸잠에서 보아내는 특별한 시력이다.
아마도 불교의 윤회사상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시력은 시인의 시세계가
바야흐로 우주적인 통섭(通涉)의 세계로 성큼 내닫어가는 실마리가 아닐까.
‘이제 나에게 와다오/
너의 정수리에 머물던/
그 천 년 맑은 바람을 몰고 와다오/
…/ 순정한 영혼의 날개로 날아오르게’ 의
「록키에게」처럼 시인이 꿈꾸는 것이 세속의 성취가 아니라 탈속의 세계 인 것을 알 수 있다.
‘일만 년 이쪽도 저쪽도 아닌/ 그곳에 서고 싶다’
의 바람이야말로 시인이 꿈꾸는 드넓은 통섭(統攝)의 세계를 실체화시키는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새벽 1시 반 마을을 벗어나 남쪽으로 길을 잡는다’ 로 시작된
「화성으로의 산책」은 6만 년만에 가까이 다가온 화성을 극세필로 묘사하면서도
붓자국 속에 숨겨진 상상력을 오히려 극대화시킨다.
저 분화구 가장자리에/
얼음 녹여 물길 내는 빙어 몇 마리 있었으면/
아가미가 산수유처럼 붉어지고 있었으면
―「화성으로의 산책」 부분
‘냉혹한 유혹의 눈, 갈증 나던 붉은 색도 스러지고/
만월처럼 둥글게, 작은 접시에 담긴 연노란색 정원’
‘추수 끝난 묵은 논자리 같다’
‘저 분화구 가장자리에/
얼음 녹여 물길 내는 빙어 몇 마리 있었으면/
아가미가 산수유처럼 붉어지고 있었으면’ 은
드넓은 추상 배경에 난초 몇 점으로 관객을 매혹하는 김형근의 그림처럼 깊은 인상을 만든다.
시인의 세밀하면서도 본질을 꿰뚫는 시력은 상상력과 맞물리면서 대상의 배경을 무한대로 확장시킨다.
햇살 빗겨 서는 초가을 저녁
유리창에 더듬이를 내린 여치 한 마리
갈색 반점 있는 녹색 몸이 잠잠하다
왜 초록 길을 벗어 놓고
투명한 유리창에,
웬일인지 묻지 않았다
3센티 길이의 더듬이가 더듬던
낯설고 차가웠을 너의 세상을
어차피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밤중 신열로 깨어서 한 칸 방을 더듬을 때
한 모금 물로 깨어나는,
가는 나의 더듬이가 더듬는
갑충의 각질 같은 어둠을 말할 수는 있다
그 밤에 네가 너의 몸을 파헤치듯
울며 노래하면
나는 무거운 커튼을 열고
저 820광년, 폴래리스를 다시 본다
―「820광년, 폴래리스」 전문
유리창에 달라붙은 여치 한마리에서 시인의 더듬이를 읽어내는 심정적인 진술은
어둠의 하늘에 반짝이는 820광년의 폴래리스와 연결됨으로써 우주적인 통섭의 세계를 실재화해 준다.
내 차는 189마력(horse power)을 가졌다
가끔 나는 고속도로에서 말발굽 소리를 듣곤 한다.
내 손은 건성 핸들을 잡고 있을 뿐, 백 팔십 아홉 마리의
흰말들이 갈기를 세우고 허연 입김을 뿜어내며
발굽이 길에 달 틈도 없이 달리고 있는 것이다.
한때 초원을 달리던 야생마들이 뼈와 살을 땅에 묻고
지층에 스며들어 원유로 출렁이다가
다시 달려 볼 조건을 찾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렇게 자동차로 그들의 거푸집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어젯밤에 내가 몇 만년 전에 보내진 별빛,
지금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 별을 절절하게 바라 보았듯이
지금 내가 몇 만년 후에 돌아온 그들의 거푸집에 앉아
달리는 것 또한 같은 줄기에 있지 않겠는지
오늘 오후, 밀렸던 일상을 처리하러 길을 나섰다가
비 개인 쪽빛 하늘과 들판에 잠깐 눈 준 사이 차는 샛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영리한 내 말들이 내 심중을 알아채듯, 나 또한 그들의 의도를 모를 리 없다
넓은 유채꽃 들판에 백 팔십 아홉 마리의 말을 풀어놓았다.
―「그들의 거푸집」 전문
이러한 무차별의 상상력은 시인의 자동차를 전면에 내세울 때 절정에 선다.
속도를 가리키는 ‘마력‘이란 단어의 기이하면서도 설득력있는 상상을 통해
저들의 조상마들이 떵속의 원유가 되었다가 다시금 찾아낸 새로운 기회.
생명을 확인할 수 있는 장치가 저들의 거푸집인 자동차라는 순환론적인 발상의 역동성과 자유로움도
특별하지만, 그들과 시인의 교감이야말로 유봉희 시학의 눈부신 진경이 아닐 수 없다.
저 산의 높이가 허공의 손짓만은 아니다
잉걸불로 솟던 한때
이제 오랜 멈춤인 저 높이가
어느 서늘한 열정의 발원지를 건드렸는지
눈발, 무진무진 쏟아진다
우리는 문득 별처럼 어둠 속에 멈추어서
손바닥에 눈을 받아본다
먼길 돌아온 숫눈의 반짝임을 지켜본다
이제 물방울로 떨어져
기나긴 회로를 다시 시작하겠지만
아무도 그 아득한 길을 말로 하지 않는다
발 아래 고즈넉이 앉아 있는 돌
둔덕에 구르는 뿌리 없는 나무통도
몇 만년의 걸음이라니
우리는 일초마다 눈을 깜박거리며
그 걸음에 발을 얹었다
눈은 나리고 또 나려
몇 만년의 걸음을
반짝이는 숨죽임으로 만들고 있다
―「몇 만년의 걸음」 전문
시집의 표제작인 「몇 만년의 걸음」은 시인의 이러한 미학적 성과를 일목 요연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산에서 문득 눈을 맞으며 그 산의 높이며 돌, 나무통과 같은 사소한 것들의 회로를
우주적 순환으로 증폭시켰다가 다시 1초 속에 숨어 있는 ‘몇 만년의 걸음’을 찾아내는 특별한 시력은
유봉희 시인이 새롭게 걸어나가는 직관과 상상력의 맞물림이 빚어낸 통섭의 일대 화엄 잔치라 할 수 있다.
결론하자면 유봉희 시인의 두번째 시집 『몇 만년의 걸음』은 첫시집 『소금 화석』이 보여주던
초월적 세계의 분명한 형상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상상력의 거푸집에서 새롭게 꺼내든
해맑은 절제와 맛있는 달관이라는 미학적 장치와 함께 시인의 이러한 발전적 변화가 현재진행형의 상태임을 말해준다.
앞으로 시인이 시의 갱 속에서 ‘무진무진’ 캐어낼 시의 보석들을 기다리는 마음은 그래서 즐겁고 기쁘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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