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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시평]  이규보 (李奎報, 1168-1241)의  〈 論詩中微旨略言 〉
(시의 깊은 뜻을 간추려 논함)

다음 글은 우리 한문학자 정민 박사가 지금으로 부터 대략 800년전 고려의 문호
이규보 (李奎報,1168-1241)의 〈論詩中微旨略言 (시의 깊은 뜻을 간추려 논함)〉에서 "시를 어떻게 쓸것인가" 시창작 과정을 단계별로 설명한 글을 번역한 글입니다.


첫째, 대저 시는 뜻이 중심이 된다. 뜻을 펼치는 것이 더 어렵고, 말을 엮는 것은
그 다음이다. 뜻은 또 기(氣)가 중심이 된다. 기의 우열에 따라 시가 깊어지기도
하고 얕아지기도 한다. 그러나 기(氣)는 하늘에서 나온 것이어서 배워서 얻을
수는 없다. 그래서 기(氣)가 저열한 자는 글을 꾸미는 것을 잘하는 것으로
알고, 뜻을 앞세우는 법이 없다. 대개 그 글을 아로새기고, 그 구절을 꾸미면
어여쁘기는 하겠지만, 그 속에 함축하여 깊고 두터운 뜻이 없고 보면
처음엔 볼만해도 두 번만 읽으면 맛이 다하고 만다.

시의 출발은 뜻[意]에 있다. 어떻게 쓸까 보다 무엇을 쓸까가 먼저다.
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글이 다 그렇다. 생각이 정해지면 표현은 저절로
따라온다. 추상적인 생각의 덩어리가 작품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기(氣)다. 기는 마음 속에 쌓인 기운, 즉 생각을 펼쳐가는 힘이다.
무엇을 쓰겠다는 구상만으로 좋은 작품이 나오는 법은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운을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라고 했다.
좋은 시는 이런 기의 축적에서 비롯된다. 머리 속의 생각만으로는 힘이 생기지
않는다. 생각을 끌고 나가는 힘은 기에서 나온다. 많은 독서와 여행의 체험이
이 기운을 길러 준다. 그런데 그 기는 인위적으로 길러지지 않는다. 일정 부분
타고난다. 기가 타고나는 것이라면 노력할 필요가 없는가? 그렇지 않다.
기는 타고나는 것이지만, 노력 없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옛 시인들은 양기(養氣) 공부, 즉 기를 기르는 공부를 중시했다.
기는 어떻게 해야 길러지는가? 뜻이 충실하면 된다. 그래서 양기 공부를 위해
구방심(求放心)과 무자기(毋自欺)의 수양에 힘을 쏟았다. 마음이 제 멋대로
놀러 나가지 않도록 방심을 막고, 자기가 자기를 속이지 않는 공부를 계속하면
마음 속에 호연한 기상이 차곡차곡 쌓인다고 믿었다. 시론 책을 열심히 읽고,
시창작 교실을 열심히 다닌다고 좋은 시인이 되는 법은 없다.
이론을 몰라도 훌륭한 시를 쓸 수가 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가 부족한 사람은 기교로 제 부족한 부분을 덮어 가리려 한다.
뜻이 서지 않은 채 기교를 앞세우면, 처음엔 사람의 눈을 놀래키지만 금세
싫증이 난다. 한 두 번은 몰라도 두 번째 세 번째부터는 천박한 바탕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쥐어짜듯 쓰는 시는 시가 아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맛이 나는
시가 있고, 처음엔 그럴 듯 하다가 두 번만 읽으면 혐오감이 느껴지는 시가 있다.

둘째, 시간에 맞추어 서두르면 시가 군색해진다.
처음 구상할 때 너무 깊이 들어가 헤어나지 못하면 빠지게 되고, 빠지면 얽매이게 되며, 얽매이면 헤매게 된다. 헤매다 보면 집착하게 되어 통하지 않게 된다.
다만 출입하고 왕래할 때 왼편으로 가고 오른편으로 가며, 앞을 보면서도
뒤를 돌아보아 변화가 자재(自在)로운 뒤에야 막히는 바 없이 원숙하게 된다.
혹 뒷 구절을 가지고 앞 구절의 잘못된 부분을 구하기도 하고, 한 글자로
한 구절의 타당함을 돕기도 하는 것이니, 이점을 생각지 않으면 안 된다.
서둘러 지은 시는 완성도가 떨어진다. 오래 붙들고 있는다고 좋아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너무 지나친 생각은 시를 엉겨붙게 만든다. 이것을 제재로,
혹은 이런 주제로 시를 지어야지 하고 작정하면 그 생각에 빠져 얽매이고,
탈출구를 찾아 헤매이다 보면, 이것이 집착이 되어 생각이 꽉 막힌다.
시는 쥐어짜는 것이 아니다. 설계 도면에 따라 제작할 수도 없다.
구절마다 모두 좋으려 들것도 없다. 어느 한 부분이 특출나게 뛰어나면
다른 부분이 혹 부족하더라도 괜찮다. 시에도 치고 빠지는 리듬이 있다.
강약 중강약의 호흡이 있다. 뻣뻣하기만 하면 부러지고, 부드럽기만 하면
물러터진다. 어깨에 힘을 빼고 전후좌우 경쾌한 행보를 유지해야 한다.
시에서 진선진미(盡善盡美)는 전체의 조합에서 나오는 것이지
부분의 완결성에서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셋째, 오로지 청고(淸苦)하려고만 하는 것은 산에 사는 중의 격식이다.
곱고 어여쁜 것으로만 꾸미는 것은 궁녀들의 격조다. 능히 청경(淸警) ·
웅호(雄豪)하면서도 연려(姸麗) · 평담(平淡)할 수 있어야만 갖추어진 것이니,
이렇게 되면 남들이 한 체재로 이름지을 수가 없다. 고기를 먹지 않는 중처럼
맑은 소리만 한다고 좋은 시가 아니다. 궁녀의 하소연처럼 분단장 냄새가
나는 곱고 여린 것만으로도 안된다. 때로는 호방하고, 어떤 때는 섬세하고,
간혹 덤덤하게 쓸 줄도 알아야 한다. 시인의 목소리는 다양해야 한다.
한 색으로 갇히면 그 시는 끝난다. 등단해서부터 늙어서까지 똑같은 목소리만
내고 있다면 그 시는 죽은 시다. 사람이 변하고, 세상이 변하는데 시만 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젊은 날의 명성을 뒤로 한 채 시 같지도 않은 시를 시라고
발표하는 시인은 보기에 차마 민망하다. 차라리 붓을 꺾었으면 싶을 때가 있다. 그 소리가 그 소리인 끊임없는 자기 복제는 답보의 표징일 뿐이다.
시는 부단히 변하면서 늘 변치 않아야 한다. 나만의 색깔을 지니되, 그 색깔이
한결 같아서는 안된다. 늘 같으면서도 언제나 다른 그런 시, 남들이 뭐라고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시가 살아 있는 시다.

넷째, 시에는 아홉가지 마땅치 않은 체(體)가 있다.
이것은 내가 깊이 생각해서 스스로 얻은 것이다.

한 편 안에 옛 사람의 이름을 많이 쓰는 것은 ‘수레 가득 귀신을 실은 체’다.
옛 사람의 뜻을 취해오는 것은 도둑질을 잘해도 하기 힘든데,
도둑질 마저 시원찮을 때 이를 ‘못난 도둑이 쉽게 붙잡히는 체’라 한다.
어려운 운자를 쓰면서 근거가 없는 것, 이것은 ‘쇠뇌를 당기나
힘을 이기지 못하는 체’이다. 그 재능을 헤아리지 않고 운자를 씀이
지나치게 되면 이는 ‘주량보다 넘치게 술을 마신 체’이다.
험벽한 글자 쓰기를 좋아하여 사람을 쉬 현혹시키는 것, 이것은
‘구덩이를 파놓고 장님을 인도하는 체’이다. 말이 순하지 않은데도
굳이 인용하는 것은 ‘남더러 억지로 자기를 따르게 하는 체’다.
일상어를 많이 쓰는 것은 ‘시골 사람이 모여 얘기하는 체’이고,
꺼리는 말을 잘 범하는 것은 ‘높고 귀한 분을 능욕하는 체’이다.
말이 황당한데도 깎아내지 않으면 ‘잡초가 밭에 가득한 체’이다.
이런 마땅치 않은 체를 면한 뒤라야 더불어 시를 말할 수가 있다.
앞선 시인의 구절을 슬쩍 끌어다 쓰거나, 감당치도 못하면서 근거없는
큰 소리를 쳐대는 것, 그럴듯한 표현으로 남의 이목을 현혹하고,
아닌 말로 억지를 부리는 것, 되는대로 떠들고 황당한 말을 해대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시의 적이다.

한유(韓愈, 768~824, 唐宋八大家中一人)는 사필기출(詞必己出)이라고 했다.
반드시 자기의 목소리를 내라는 뜻이다. 또 진언지무거(陳言之務去)를 강조했다. 남이 이미 많이 써서 진부해진 말을 제거하기에 힘쓰란 것이다.
두보(杜甫,712~770)는 어불경인사불휴(語不驚人死不休), 즉 말이
사람을 놀래키지 못하면 죽어서도 그만 두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다고 말마다
신기한 말을 쓰고 작품마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내용을 담으란 말은 아니다.
대개 시의 병통은 알맹이 없이 폼만으로 어찌 해 보려 할 때 생겨난다.
이들은 암호문과 상징 은유를 구분하지 못하며, 설교와 주제의식을 혼동한다.
누구도 모를 소리를 하면서 독자의 낮은 수준을 개탄한다. 답답한 나머지 자기
시를 자기가 해설한다. 안쓰러운 풍경이다. 구덩이를 파놓고 어리숙한 독자를
인도하는 시, 알량한 권위를 내세워 억지로 남을 따르게 하는 시, 감당도 못하면서 주제만 고상한 시, 슬쩍슬쩍 베껴와 짜깁기한 시는 지금도 너무 많다.
그 중에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인간과 시가 따로 노는 시다.

다섯째, 남이 내 시의 병통을 말하면 기뻐할 만한 점이 있다.
말한 것이 옳으면 따르고, 그렇지 않으면 내 뜻을 따를 뿐이다.
어찌 반드시 듣기 싫어하기를 마치 임금이 간언을 거부하여
끝내 그 잘못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겠는가?
무릇 시가 완성되면 되풀이 해서 살피기를, 대략 자기가 짓지 않은 것처럼
살펴 보고, 마치 다른 사람이나 평소에 몹시 싫어하는 자의 시를 보듯하여
그 흠집을 즐겨 찾되, 오히려 흠을 알지 못하게 된 뒤에야 발표할 일이다.
대저 논한 바는 시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문장 또한 비슷하다.
하물며 고시는 문구가 아름답고 압운이 끊긴 것 같은 것을 좋게 여긴다.
뜻이 아름답고 여유롭고 말 또한 자재로워야 얽매이지 않게 되니,
그렇다면 시나 문장은 또한 한 가지 법도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내 시를 두고 나쁘게 말하면 발끈한다. 칭찬하면 실상보다 지나쳐도
흐믓하기만 하다. 남의 지적을 들으면 우선 기뻐할 일이다.
그 말을 들어 옳게 여겨지면 따르면 그뿐이다. 수긍할 수 없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하면 된다. 듣기 좋은 말만 골라 들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독선에 빠지고 만다. 한 편의 시가 완성되면 작심하고 흠집을
찾아내서 과감히 고칠 줄도 알아야 한다. 꼴보기 싫은 사람의 시를 흠잡는
기분으로 자기 시를 냉정하게 비판하라. 그 다음에야 비로소 발표한다. 이것은
비단 시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산문도 다를 것이 없다. 아니 사람 사는 일도 한 가지다. 남의 허물은 잘도 잡으면서, 자기의 허물은 슬쩍 눈감아 버린다. 남의 칭찬에는 그리도 인색하면서, 누가 제 칭찬이라도 하면 금방 입이 벌어진다.

시는 “꾀꼬리 · 종달새는 노상 우는 것이 아니고 우는 나달보다 울지 않는 달
수가 더 길다.” 또 이렇게 말했다. “시가 시로서 온전히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꽃이 봉오리를 머금듯, 꾀꼬리 목청이 제철에 트이듯, 아기가 열 달을 차서
태반을 돌아 탄생하듯 하는 것이다.” 되는대로 떠드는 것은 시가 아니다.
읽어 모를 시는 시가 아니다. 풍경이 떠오르지 않고 느낌이 일어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 잠자던 정신이 화들짝 돌아오고, 늘상 보던 사물인데
처음 보는 듯하다. 내 말이 있기 전에는 나 말고 아무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이런 시가 시다. 살아있는 진짜 시다.

- 한문학자 정민박사 번역 / 시인 유봉희 옮김 201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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