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은 현상적인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모든 수단 방법을 배워가는 측면이 되고, 수(修)는 본래적인 인간의 지위로 환원하기 위해 잡다한 견문을 비워냄으로써 내면의 세계를 열어내는 측면이 되겠는데, 특히나 요즘의 교육체계와 사회적인 인식이 온전히 학의 측면으로만 기울어져 있어서 수의 측면은 인식조차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수의 기능으로 내면의 자아를 열어가야 할 불법을 수행해 가는데 있어서도 거의 모두가 학의 측면으로 배워가고 있으니, 마치 동쪽으로 간다고 가는 길이 서쪽으로 가고 있는 꼴이 돼버린 것입니다.

사람마다 방을 하나씩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데 필요한 가구와 물건들을 들여놓는 것이 학의 측면이라면, 사람이 편안하게 기거할 공간을 확보해 내는 것이 수의 측면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물건의 필요함만 알고 더 소중한 공간의 영역은 인식조차 못하고 있어서 방안 가득히 물건들로만 채워넣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하여 공간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불법 수행의 방향마저 잘못 잡아서, 복잡한 방안 거기다가 다시 많은 경전을 들여놓고 목탁과 종이며 북까지 들여오게 되어 더더욱 좁아진 공간에서 숨막히는 생활을 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불교인구의 저변확대가 아니라, 잘못된 인식의 전환으로 수의 기능을 제대로 살려내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입니다. 그리하여 물질보다 소중한 인간을 살려내야 합니다. 우리들 내면의 그 완전무결한 인간을 발견해 내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것은 마치 두어 자 창문을 뚫어서 가없는 허공을 이어놓듯, 한 길 우물을 파서 다함없는 물을 뽑아쓰듯 그렇게, 우주만유와 고금시종이 포용된 절대아(絶對我)의 경지를 이뤄내게 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영원히 불생불멸의 삶을 구가하며 절대의 행복을 누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6.19

오늘:
5
어제:
11
전체:
62,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