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격은 6.25(3)
2006.06.05 20:09
내가 겪은 6.25③
-38선을 넘어서-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급) 이기택
6.25전쟁은 발발(勃發)이래 최대 고비를 맞이하고 있었다. “8월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겠다.”는 북한군의 목표는 낙동강 앞에서 저지되자 “8월15일까지 대구를 점령 한다.”는 새로운 목표 아래 발악적인 공세를 폈다. 이에 맞선 국군과 UN군은 200km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을 최후의 보루로 여기며 사수하게 되었다. 더 이상 물러설 수는 없었다. 뺏고 빼앗기는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었지만 고비는 넘긴 듯도 했다. 더욱이 9월에 접어들어 열세였던 전력은 북한군보다 우세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전의 주도권은 여전히 북한군에게 있었고, 국군과 UN군은 수동적 방어태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이 북한군은 병력보충이 여의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UN군의 제공권 장악과 신장된 병참선에 의해 보급지원이 부진하였다. 따라서 북한군의 전력은 약화된 반면 국군과 UN군은 날이 갈수록 전력이 증강되고 있었다.
9월 초순 병원에서 경주의 수도사단 18연대로 복귀한 우리들 학도병 세 사람은 연대 병기과로 배치되었다. 병기과는 총포와 탄약을 보급 지원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부서이다. 처음 보는 경주는 전쟁터였지만, 생각보다 심한 피해는 없었던 듯했다. 배치되기 전 원호대(援護隊)에서 휴양하고 있을 때, 어떤 큰 기와집에 들어간 일이 있는데 가재도구를 고스란히 놓아 둔 채 사람들만 급히 피난을 간 것 같았다. 서재의 책, 축음기, 식량 등 모두 평소 그대로 있었다. 전쟁의 수난은 어느 지역이나 다를 바 없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오늘도 고향의 뒷동산 같은 큰 묘지군(황남대총) 옆의 아군 포진지에서는 끊임없이 포탄을 발사하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의 천년고도 경주가 이만하기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이 새로운 임무를 맡은 지 열흘쯤 지난 9월 20일경이었다. 우리 연대는 오랜만에 안강으로 진출했다. 이제 반격작전이 시작되었다고 기뻐했으나, 어둠이 찾아들면서 안강을 내어 주고 후퇴하였다. 적의 야간공격에 대비하는 것이라 했다. 아직도 적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 전세는 역전되고 있는 게 확실했다. 우리는 다음날 다시 안강으로 진출했고, 계속 전진해 나갔다. 우리 사단은 동부전선의 좌익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서부전선의 전황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풍문에 미 공군이 서부전선에서 대대적인 융단폭격으로 적에게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는 풍문정도가 고작이었다. 더욱이 인천상륙작전이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영양(英陽)을 거처 춘양(春陽)으로 전진했고, 전진속도가 빨라졌다. 후방제대인 우리들은 차량이동이니 별 문제가 없었으나 도보행군으로 수색하고 잔적을 소탕하며 전진해야 할 보병부대들은 때로는 격전도 치러야 할 테니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을 하며 우리들은 행운이라고 자위했었다.
전진이 시작되면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일이 생겼다. 적이 퇴각하면서 버린 총포와 탄약들의 수집이었다. 도로마다 짊어지고 가다가 양쪽에 5~6보 간격으로 길게 버려진 탄약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우리들은 이것들을 수집하여 수집소에 반납해야 했다. 이는 아군에 대한 보급지원보다도 훨씬 많은 일거리였지만 우리들은 피로도 모르고 신나게 수집에 여념이 없었다.
춘천을 지나 어느 산자락에 이르렀을 때 누가,
“38선이다!”
라고 소리쳤다. 우리는 순간 긴장 속에 차에서 내려 한참 동안이나 그 38선을 바라보았다. 우리나라를 갈라놓았던 ‘38선!!’, 넘을 수 없는 장벽도, 야누스(Janus)가 금시라도 나올 것 같은 무시무시한 선도 아니었다. 누가 새겨 놓았을까. 조그마한 38선이란 표지!!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몰랐으리라. 칙칙하고 무성하게 엉켜있는 나무들이 인간들의 범접을 막으려는 것 이었을까. 그래도 우리는 38선을 넘어서 북진한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깊었다.
1950년10월3일 오후3시!!
우리들은 38선을 넘어서 북으로 가고 있었다. 우리 전방부대들이 벌서 하루나 이틀 전에 넘어간 길이다. 그래도 우리는 어디선가 괴물이라도 나올지 모른다는 조바심 속에 천천히 차를 몰았다.
이제부터 38선 이북이라 생각하자 설렘과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들은 더욱 많은 총포와 탄약을 수집하여 희양의 수집소에 반납하였다. 수집소의 경계는 경찰과 지역치안대요원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희양은 군소재지로 시골소도시이지만 산중의 교통중심지이고, 북한강 지류가 흐르며 비옥한 논밭이 있는 살기 좋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인민군 대위를 비롯한 인민군 여자장교 등 많은 포로들을 볼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적은 사실상 도주하기가 바빴다. 우리들은 비로소 적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사실상 도주하기 바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의 전방부대는 수색 및 잔적소탕의 임무를 3교대로 수행하며, 중단 없는 전진이 계속되었다.
38선을 넘어 전진하며, 우리는 잡역에 시달려 정신없이 바빴다. 그런데 오늘은 안변을 지나 원산으로 들어가는 한 강가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어디서인지 ‘슈펑, 슈펑’하고 대공포소리가 들렸다. 차를 세우고 강가에 대피하였으나 종잡을 수 없는 대공포 소리에 놀라기는 하였다. 그러나 포성이 잠잠해진 것으로 미루어 잔적의 소행이라고 판단하고 오랜만에 쉬어가기로 하였다. 자빠진 김에 쉬어간다고 했던가. 망중한이었다. 사실 우리들은 원산에 가까워지면서 방치된 총포와 탄약을 볼 수 없었다. 적들의 후방지역이어서 그런지 모른다. 아무튼 우리들은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양지바른 언덕에서 여유롭게, 멀리 원산풍경도 바라보고, 들판이며 흐르는 강물도 보고 있노라니 저쪽에서 한 병사가 자전거를 타고 달려왔다. 웬 병사일까, 모두 시선이 쏠리고 있는데 가까이 다가왔을 때 보니 그는 학교동기인 J군이었다. 반가워 쫓아가 서로 얼싸 안고 무사함을 기뻐했다. 그는 3사단 문서연락병인데 시간이 없어 빨리 가야한다기에 더 붙잡지 못하고 아쉽게 보내야 했었다.
우리의 전방부대는 지금쯤 함흥을 거처 삼수갑산으로 전진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두만강까지 추격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감격적인 일이었다. 남북통일을 눈앞에 두고, 우리는 전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벌써부터 학도병들은 집에 돌아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우리들은 앞으로 진출할 원산, 함흥 등 새로운 지역에 대한 환상으로 들떠 있었다.
(200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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