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서 온 편지
2006.06.14 09:31
감옥에서 온 편지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야) 고 강 영
설을 며칠 남겨두지 않은 농협사무실은 창구마다 손님으로 붐볐다. 나 역시도 공‧사적으로 매우 바쁜 나날이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많은 우편물이 배달되었는데 언뜻 항공우편봉투를 사용한 편지 한 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편지를 집어 겉봉을 보니 전주 우체국 사서함 72-0000으로 소인이 찍혀 있었다. 수신은 내 주소가 분명한데 겉봉의 발신자 주소와 이름은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내용물을 꺼내 훑어보았다.
고강영 組合長 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現在 전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이00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초면에 큰 결례를 무릅쓰고 편지를 올리게 되어서, 어디서부터 무어라 말씀을 어떻게 드려야 할지, 너무 황당스럽고 놀라시게 해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너그럽게 이해를‧‧‧‧‧‧.
이렇게 시작된 편지는 한자를 섞은 달필로 깔끔하고 빽빽하게 두장이나 채워져 있었다. 그 편지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본인은 본의 아니게 죄를 지어 2년 내외 수형생활을 해야 되는데 집안의 가장으로서의 역할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지내게 되는 것이 너무 힘이 든단다. 그런데 어머님의 75세 생신이 돌아오고 결혼 20주년을 맞게 되는 아내한테 너무 미안하고 특히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서울 일류대학에 합격하여 입학하게 되었는데도 아버지로서의 몫을 다하지 못하고 축하해 줄 수 없는 본인의 형편에 막막함을 느끼며 체면불구하고 부탁을 드린다면서 설이 다가오는데 우리 가족에게 우리 농산물을 선물하여 어머니와 아내 아들에게 축하로 대신하고 싶다고 했다. 뒷자락에는 2년 뒤 출감하면 꼭 찾아뵙고 보답하겠다는 약속을 몇 번이 나 거듭 되풀이하며 죄송하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내가 혹시 의심할까봐서인지 어머니의 함자는 물론 아내와 아들의 이름,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정확하게 밝혀놓았다. 편지를 다 읽은 나는 가슴 한쪽에서부터 무엇인가 뭉클하며 뜨거운 무엇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마음이 아려 깊은 한숨을 토해내니 눈물이 고였다.
나를 어떻게 알았을까? 무척 궁금하기도 했지만 가족을 그리며 옥중에서 자기의 가슴을 두드리며 안타까워하는 이씨의 애틋한 마음이 안타까웠고 남겨진 가족들에게 연민의 정이 솟았다.
나는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것은 분명히 이씨를 대신해 가족들을 돌보라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명령인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주위의 고아나, 과부들, 또한 생활에 고통을 받는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라는 사명을 주셨다. 그리고 때때로 그런 대상들을 붙여 주시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하며 감당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생활에 얽매다 보면 마음과 같지 못할 때가 많이 있었으니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소로웠겠는가?
또한 내가 하는 공부 가운데 ‘교정 복지’에 대한 리포트를 작성해본 일이 있었다. 수형자를 위문하고 상담하는 일, 그들의 가족에게 생계를 지원하고 자녀학자금을 지원하는 일, 수형자 영치금지원 및 편지주고 받기 등 리포트를 작성하면서 기회가 되면 나도 그러한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해야겠다고 다짐까지 했었다. 부족한 나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나를 사랑하시기에 이러한 기회를 다시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가? 나는 너무 들뜬 마음으로 즉시 농협 하나로 마트로 달려가 매장에서 가장 좋은 사과 한 박스를 구입하고 이씨의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동봉하여 경기도 안산까지 택배로 보냈다. 나는 오후 내내 마음이 훈훈하고 기분이 좋았다.
퇴근길에 나는 차안에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아내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하였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난 아내는,
“사과만 보냈어요?”
하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한참 생각하던 아내는,
“형편이 그런 가정이라면 돈이 더 필요할 텐데, 사과만 보내는 것보다 돈도 좀 보내드렸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하면서 아쉬워했다. 나는 아내의 말을 듣는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으면서 아내에게 미안스럽기까지 했다. 아내는 항상 내 곁에서 선생역할과 바른 충고를 잘 해주는데 아내의 판단에 가끔 내가 놀랄 때가 있다. 아마 여성들의 섬세함 때문인 것 같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금일봉을 우편환으로 바꾸어 다시 이씨의 어머님에게 등기로 발송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나 혼자 세상의 좋은 일을 다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냥 사무실을 서성이고 있었다, 얼마 뒤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나 이00의 에미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고 놀라기도 했고 너무 고맙다면서, 자기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씨는 안산에서 조그마한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사업가로 사업을 잘 운영하며 남부럽지 않게 살았단다. 특히 이씨는 무척 효자였고 성격이 조용하고 가정적이어서 아내와 아들에게도 흠 없는 가장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경제가 좋지 않아 사업이 기울면서 모든 걸 다 팔아 부도를 막아보려 했지만 결국은 부도를 맞게 되었고 이씨는 경제사범이 되어 수형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 현재 사는 집도 어느 고마운 분의 도움으로 단칸방이나마 얻어 남은 세 식구가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 이씨의 아내는 식당일로, 아들은 서울 S대학을 휴학하고 공장에서 학비를 벌고 있으며 어머님 본인은 위암수술을 받고 요양 중이라는 것이었다. 어머님은 아들의 면회를 한번도 못 갔다고 하시면서 울먹이셨고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되풀이 하셨다.
두 번째 편지를 받은 다음날도 전화를 하셨다. 이씨의 어머니와 통화를 하면서도 나는 75세 되신 노모님의 훌륭한 인격을 발견하면서 그런 분의 아들이라면 죄가 없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이씨가 어머님과 가족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 어머님은 그 아들을 한없이 사랑하며 누구보다도 믿고 계신 것을 느낄 수가 있어 나의 마음이 한층 더 흐뭇해졌다. 그리고 이씨가 가정으로 돌아 갈 때까지 기도하며 그 가정을 돌보겠노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성경말씀 한 구절이 생각난다.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2006. 6. 10 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야) 고 강 영
설을 며칠 남겨두지 않은 농협사무실은 창구마다 손님으로 붐볐다. 나 역시도 공‧사적으로 매우 바쁜 나날이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많은 우편물이 배달되었는데 언뜻 항공우편봉투를 사용한 편지 한 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편지를 집어 겉봉을 보니 전주 우체국 사서함 72-0000으로 소인이 찍혀 있었다. 수신은 내 주소가 분명한데 겉봉의 발신자 주소와 이름은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내용물을 꺼내 훑어보았다.
고강영 組合長 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現在 전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이00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초면에 큰 결례를 무릅쓰고 편지를 올리게 되어서, 어디서부터 무어라 말씀을 어떻게 드려야 할지, 너무 황당스럽고 놀라시게 해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너그럽게 이해를‧‧‧‧‧‧.
이렇게 시작된 편지는 한자를 섞은 달필로 깔끔하고 빽빽하게 두장이나 채워져 있었다. 그 편지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본인은 본의 아니게 죄를 지어 2년 내외 수형생활을 해야 되는데 집안의 가장으로서의 역할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지내게 되는 것이 너무 힘이 든단다. 그런데 어머님의 75세 생신이 돌아오고 결혼 20주년을 맞게 되는 아내한테 너무 미안하고 특히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서울 일류대학에 합격하여 입학하게 되었는데도 아버지로서의 몫을 다하지 못하고 축하해 줄 수 없는 본인의 형편에 막막함을 느끼며 체면불구하고 부탁을 드린다면서 설이 다가오는데 우리 가족에게 우리 농산물을 선물하여 어머니와 아내 아들에게 축하로 대신하고 싶다고 했다. 뒷자락에는 2년 뒤 출감하면 꼭 찾아뵙고 보답하겠다는 약속을 몇 번이 나 거듭 되풀이하며 죄송하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내가 혹시 의심할까봐서인지 어머니의 함자는 물론 아내와 아들의 이름,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정확하게 밝혀놓았다. 편지를 다 읽은 나는 가슴 한쪽에서부터 무엇인가 뭉클하며 뜨거운 무엇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마음이 아려 깊은 한숨을 토해내니 눈물이 고였다.
나를 어떻게 알았을까? 무척 궁금하기도 했지만 가족을 그리며 옥중에서 자기의 가슴을 두드리며 안타까워하는 이씨의 애틋한 마음이 안타까웠고 남겨진 가족들에게 연민의 정이 솟았다.
나는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것은 분명히 이씨를 대신해 가족들을 돌보라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명령인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주위의 고아나, 과부들, 또한 생활에 고통을 받는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라는 사명을 주셨다. 그리고 때때로 그런 대상들을 붙여 주시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하며 감당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생활에 얽매다 보면 마음과 같지 못할 때가 많이 있었으니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소로웠겠는가?
또한 내가 하는 공부 가운데 ‘교정 복지’에 대한 리포트를 작성해본 일이 있었다. 수형자를 위문하고 상담하는 일, 그들의 가족에게 생계를 지원하고 자녀학자금을 지원하는 일, 수형자 영치금지원 및 편지주고 받기 등 리포트를 작성하면서 기회가 되면 나도 그러한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해야겠다고 다짐까지 했었다. 부족한 나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나를 사랑하시기에 이러한 기회를 다시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가? 나는 너무 들뜬 마음으로 즉시 농협 하나로 마트로 달려가 매장에서 가장 좋은 사과 한 박스를 구입하고 이씨의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동봉하여 경기도 안산까지 택배로 보냈다. 나는 오후 내내 마음이 훈훈하고 기분이 좋았다.
퇴근길에 나는 차안에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아내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하였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난 아내는,
“사과만 보냈어요?”
하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한참 생각하던 아내는,
“형편이 그런 가정이라면 돈이 더 필요할 텐데, 사과만 보내는 것보다 돈도 좀 보내드렸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하면서 아쉬워했다. 나는 아내의 말을 듣는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으면서 아내에게 미안스럽기까지 했다. 아내는 항상 내 곁에서 선생역할과 바른 충고를 잘 해주는데 아내의 판단에 가끔 내가 놀랄 때가 있다. 아마 여성들의 섬세함 때문인 것 같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금일봉을 우편환으로 바꾸어 다시 이씨의 어머님에게 등기로 발송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나 혼자 세상의 좋은 일을 다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냥 사무실을 서성이고 있었다, 얼마 뒤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나 이00의 에미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고 놀라기도 했고 너무 고맙다면서, 자기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씨는 안산에서 조그마한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사업가로 사업을 잘 운영하며 남부럽지 않게 살았단다. 특히 이씨는 무척 효자였고 성격이 조용하고 가정적이어서 아내와 아들에게도 흠 없는 가장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경제가 좋지 않아 사업이 기울면서 모든 걸 다 팔아 부도를 막아보려 했지만 결국은 부도를 맞게 되었고 이씨는 경제사범이 되어 수형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 현재 사는 집도 어느 고마운 분의 도움으로 단칸방이나마 얻어 남은 세 식구가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 이씨의 아내는 식당일로, 아들은 서울 S대학을 휴학하고 공장에서 학비를 벌고 있으며 어머님 본인은 위암수술을 받고 요양 중이라는 것이었다. 어머님은 아들의 면회를 한번도 못 갔다고 하시면서 울먹이셨고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되풀이 하셨다.
두 번째 편지를 받은 다음날도 전화를 하셨다. 이씨의 어머니와 통화를 하면서도 나는 75세 되신 노모님의 훌륭한 인격을 발견하면서 그런 분의 아들이라면 죄가 없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이씨가 어머님과 가족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 어머님은 그 아들을 한없이 사랑하며 누구보다도 믿고 계신 것을 느낄 수가 있어 나의 마음이 한층 더 흐뭇해졌다. 그리고 이씨가 가정으로 돌아 갈 때까지 기도하며 그 가정을 돌보겠노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성경말씀 한 구절이 생각난다.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2006. 6. 10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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