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천 해설 / 초월적인 세계의 미학적 품격

2012.04.20 09:55

유봉희 조회 수:487 추천:37

초월적인 세계의 미학적 품격   1시집 [소금 화석] 해설  
§ 초월적인 세계의 미학적 품격

/ 글 : 박제천 / 2002-12-12 /


1.

유봉희 시인은 자연의 모든 것에서 자연 그 자체의 메시지를 듣는다.
눈이나 비와 같은 자연의 현상은 물론 산과 강과 같은 자연의 형상에서도
메시지를 수신하고 그 뜻을 해독한다. 그것은 일찍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이 지상에 남기는 발자국을 본떠서 문자를 만들어내던 창힐 식의
이치라 할 수 있다.

산(山)과 같은 상형문자가 갖는 상형(象形)의 수신 장치는 물론 명(名)과 같은 문자가 품고 있는 회의(會意)의 해독 장치를 가동시킴으로서 자연을 상형하고, 그 문자의 용례를 넓혀나가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자연의 메시지로 문자를 만들되 그 뜻까지 새겨 읽는 방법론이 유봉희 시작업의 중심이 되고 있다.
자연의 메시지를 듣는 것은 물론 시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러나
수신된 메시지를 해독하고, 해독된 암호를 문자화하여, 개인별로 내용별로
그 뜻에 갈래를 펴나가는 것은 시인의 고유한 권한이다.

유봉희의 시적 작업은 자연의 메시지를 수신하고 해독하는 독자적인 장치로서 자연의 디테일을 오브제로 가공하고, 그 오브제를 통해서 자연 그 자체의
메시지를 듣는 것이다. 가령, 눈이 내리는 날은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한다.
눈은 우리 눈썹에 새의 날개를 펴기도 하고, 눈에 젖어가는 우리 머리칼을
통해 메마른 우리 가슴에 따듯한 훈김을 피어오르게 한다.
그래선가 눈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신명이 난다. 어른들은 가슴의
응어리를 뱉어내고 어린이들은 절로 발이 붕 뜨는 것처럼 뛰어다닌다.
어린이뿐이랴. 동물의 어린 것들, 개며 달이며 오리의 병아리들도
눈이 오는 날에는 눈을 따라 바쁘게 뛰어다닌다.
색채학자의 말로는 색맹인 눈에 무언가 움직이는 희끗거림이 동물들을
뛰어다니게 한다지만, 그보다는 눈이 형체로 보여주는 하늘나라의 메시지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기쁨이라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아기들은 태어나면서 일정기간 동안 저들이 살고 있었던 외계의 언어로 의사가 통한다는 우스갯소리마저 실감이 들 정도로 아이들은 눈과 일심동체가 된다. 눈에 젖은 몸이 꽁꽁 얼어붙어도 잔칫날처럼 눈을 반짝이며 눈 속을 뛰어다니던 유년의 추억을 아예 떠올릴 수 없는 사람은 아마도 드물 것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어린 것들은 눈을 보면서 눈나라의 말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사람들이 나이 들면서 잃어버리는 그 순수영성의 힘을 되돌려주는 힘이 눈에게 있다면, 그것을 수신하고 해독하는 것이 바로 유봉희 시인의 몫이 되는 것이다.

오월의 눈이 차창에 날린다
끝없는, 저 순백의 수화는
아무래도 누군가가 보내는 메시지인 것만 같아
문득 창문을 메우며, 하늘을 채우며
내게로 들어서는 산, 록키
몸의 모든 이음새를 없애며 절박한 포옹에 숨이 멎을 때
산인지 하늘인지 알 수 없는 곳
수천 수만의 흰나비들
억겁을 날아다니는 날개짓 속에
내가 있다

다시 보면, 산의 높이만큼 계곡은 깊다
서로 바라보는 아득한 거리
그러나 낙하하던 아픔의 기억도
오르려는 숨가쁜 좌절도 지우며
흰 날개짓 소리, 천상의 노래 들린다

예사롭지 않던 저녁 바람결에 들려오던 그 음절
여기 록키에 와서 깨닫는다
그가 일 만년 전부터 나를 부르고 있었음을.
―「‘천상의 노래’ ― 캐나다 록키에서」 전문

산과 들을 눈세계로 바꾸어주는 눈 내리는 날의 풍경화는 어떤 장치예술가도 따를 수 없는 장엄한 구도와 품격을 보여준다. 록키산맥에서 맞닥뜨리는
눈의 광채, 눈의 수화는 또 어떠한가. 이 세계에 누군가 초월자가 있어서
그가 보여주고 느끼게 하고 말해주는 신성을 체감하게 한다.
‘몸의 모든 이음새를 없애주는 절박한 포옹’ 속에 눈은 흰나비로 전이된다.
눈이 내리는 날에는 빈 가지밖에 남은 게 없는 꽃나무들은 물론
사철나무들의 푸른 빛도 일년 중 가장 빛나는 색깔을 갖게 된다.
사람만이 자연의 메시지를 수신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모든 것들이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장치, 자연의 언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눈도 하나의 생명체이고, 나비도 자연의 한 표상일 뿐이다.
이 때문에 시인은 자연의 영성에 주목하고,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참모습을 찾음으로서 초월적인 세계의 메시지, 자연의 언어를
수신하고 해독한다. 시인이 수신하는 메시지도 하염없이 많은 내용이고,
그 하염없이 많은 내용들을 해독하는 시인의 장치 역시 하염없이 많기 때문에 시인은 끊임없이 문자를 만들어내고 그 뜻을 입혀나갈 수밖에 없다.
시인이 수신하는 메시지는 물론 그가 마주 대하고 있는 삶의 갖가지 고비에서 마주치는 기쁨과 아픔일 터이지만, ‘일만년 전부터’ 시인을 부르는 ‘음절’이자 그 아득한 바닥까지 다녀온 시인의 발자취가 되어 ‘바람결’의 긴 울림으로
듣는 이들의 가슴을 휘돌아나가는 서정의 물꼬를 트는 것이다.

2.

유봉희가 수신하는 자연의 메시지는 다양하다.
문득 마주친 검은 돌멩이에 박혀 있는 하얀 점에서 깊은 겨울밤 내리는
흰눈을 떠올리고, 그 흰눈 속을 걸어가면 나오는 고향의 밤을 만난다.
돌멩이 하나가 지니고 있는 메시지를 수신하고, 해독해본즉 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시인의 고향 밤인 것이다. ‘돌’에서 찾아낼 수 있는 메시지는 ‘고향밤’만은 아니다. 시를 쓰고 있는 그 시점의 시인에게 고향이 절박하였기에 돌 속에
고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공자는 이러한 이치를 가리켜 ‘시즉절’이라는 말로
간추려주고 있다. 가장 절실한 감정만이 스스로 형상을 갖출 수 있는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검은 몸에 하얀 점 박혀 있는 돌

그곳은 깊은 겨울 밤
흰 눈 내리고 있네
끝없이 내리고 있네

잊었던 고향 밤, 흰 눈 내리는 밤
그 돌 속에 들어와 있었네
눈밭에 발자국
자꾸 찍으며 고향길 가고 있네.
―「돌 속에 내리는 눈」 전문

다시 말해 ‘돌’ 속에서 고향을 만나는 시점은 이국에서 오랜 세월을 지낸
시인의 개인적 심회가 자연의 메시지와 맞아떨어진 상황대라 할 수 있다.
시인은 돌 속에서 고향을 만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돌이 몇 만년 전에는
하늘의 별일 수도 있음을 상기시킨다. 하늘의 별이 지상에 내려온 이름이
운석이기 때문이다. 저들은 누구의 부름으로 인해 이 지상에 달려온 것일까.

닿을 수 없는 산을 바라만 보다가
그 높이에서 떨어져 나왔을 바위를 어루만진다
저 깎아지른 곳을 떠나며
잔혹한 하강의 의미를 새겼을 몸체는
이제 고른 숨을 쉬며 완전한 평정에 들어 있다
급변하는 날씨에도
바위는 체온을 잃지 않고 있다
어둠이 산 속 가득 고이면
바위는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 안는다
그 속의 비밀스런 소리들
바위가 별들을 불러내고 있다
아득한 시간 넘어 별이었을 바위가
아직도 자기들의 언어를 기억하고 있는지,
별들이 대답하며 산과 바위 사이로 모여들고 있다
어떤 별들은 부르는 소리 듣기도 전
회답 먼저 보내고 있다, 몇 만년 전에

크로노스*가 잠깐 던져 놓은 낫이
초승달로 떠 있는 저물녘.
―「몇 만년 전의 답신 ― ROCKY 산에서」 전문

시인에게는 초승달이 그리스의 신 크로노스가 들고 있던 큰 낫으로 보인다.
그것은 제논의 화살처럼 영원히 정지한 것으로 보이는 시간의 표상이지만,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그 자체와 달리 시간의 신은 덧없는 발걸음을
끊임없이 옮겨가고 있다. 그 정중동의 시간 속에서 시인은 바위와 만나,
그 바위가 산의 일부였음을 깨우친다.
모든 것은 이처럼 가족과 헤어지는 것이다.
이제는 ‘닿을 수 없는 높이’에서 떨어져나왔음을 느끼는 자의 고통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마치 운석이 되어 지상에 내려온 별과 같은 아득함일 것이다. 바위는 옛 가족인 별들에게 끊임없이 교신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 교신은 별의 언어로 수신되고 해독된다. 이 때문에 ‘어떤 별은
이미 몇 만년 전에 답신’을 보내오기도 한다. 시인이 해독한 별과 바위의 교신 내용은 고향과 가족을 떠나 사는 자의 심회가 음각된 자연의 언어인 셈이다.

풋콩 한줌 꺼내 물에 씻으니
시냇물 속에서 서로 어깨 비비는 작은 돌
물에서 건지니 둥지 속의 새알들
새알을 뚫고 노란 부리가 나오고 있다
단단한 자갈을 뚫고 싹눈이 나오고 있다

냉장고 안 생살 얼리는 추위 속에서도
눈을 떠도 감아도 무덤 같은 어두움 속에서도
제 뜻을 않는,
싹눈을 키워내는 그 열망을
못 본 체할 것인가
풋콩 한 알, 무서운 씨앗, 꿈꾸는 생명
너의 뿌리와 줄기 그리고 잎과 열매를 미리 본다.
―「그 속에도 꿈이」 전문

3.

지훈은 일찍이 ‘눈에 보이는 것 같고, 귀에 들리는 것 같고, 가슴에
그대로 버리지 느껴져야 한다’고 좋은 시를 정의내린 바 있다. 정리하자면
시각적 이미지, 청각적 연상, 내용의 감동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지만, 이
세 가지 조건을 한편의 작품에서 동시적으로 충족시키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훈이 말하는 ‘시각’과 ‘청각’을 시의 단계별 구조에 적용한다면 도입부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의 구조를 4단으로 설정한다면,
제1단의 도입부는 이미지, 제2단의 전개부는 상상력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이미지’로 시각과 청각을 아우르고, ‘상상력’을 통해 설득과 감동을 가져와야 하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도 ‘이미지’는 독자와 접속하는 제1의 조건이다.

유봉희의 시가 보여주는 선명한 이미지는 보여지는 순간 독자와의 접속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잇달은 전환을 통해 형상과 내용을 일체화시키고 있다.
유봉희가 해독하는 자연의 언어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전이되고
변환됨으로써 우리들 사람의 삶을 보여주는 언어의 그림으로 구체화된다.

‘풋콩 한줌’ 이 물과 만나는 순간 ‘시냇물 속에서 서로 어깨 비비는 작은 돌’ 이 되고, ‘물에서 건지니 둥지 속의 새알들’로 바뀌면서 ‘새알을 뚫고 노란 부리가 나오고 있다’는 인식은 유정함과 무정함의 변증법적 대립을 거쳐
‘단단한 자갈을 뚫고 싹눈이 나오고 있다’는 생명의 약동감으로 비상한다.
이러한 상상력의 화려한 변주는 시의 이미지가 곧 한편의 시를 자아내는
상상력의 바탕이며, 내용임을 알려준다.

시인이 쓰고 싶어 하는 추상적인 감정 상태를 명확하고 구체화할 수 있는
오브제는 구체적 사물의 형상을 통해 시인이 의도하는 바를
가장 인상적이고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매재라 할 수 있다.
엘리엇은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논하면서 객관적 상관물
‘objective Correlative’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감정을 예술 형식으로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 상관물’을 찾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 특유한 정서의 일정한 형상이 될 만한 일종의 사물이나 장면, 일련의
사건들을 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결국은 감각경험으로 마무리되어지는 외부적 사실들이 주어졌을 때에, 정서가 즉각적으로 환기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감정이나 정서는 비이성적이기 때문에 그 상태만으로는 독자에게 전달될 수가 없다. 시인이 자기의 정서에 맞추어 찾아낸 이미지나 장면들을 통해서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독자는 그 객관적 상관물을 통하여
시인의 정서를 추체험하게 된다.
유봉희의 ‘이미지’가 선명한 것은 ‘풋콩’ ‘자갈’ ‘새알’ ‘싹눈’과 같은 가시적인
시각적 ‘오브제’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유봉희의 이미지는 이러한 오브제들을 탄력적으로 연속시킴으로서 동화상의 효과까지 거두고 있다.

시계 소리만 커지는 아침 열시
누군가 자꾸 벽을 두드리는 소리
그 울림 집안을 채운다
나가보니 머리에 빨간 모자를 쓴 딱따구리가
콘크리트 벽을 쪼으고 있다
많은 나무 놓아두고 하필이면 벽을?
부리 아프게 두드려 보아도 벌레 한 마리 없는
집 한 칸 세들 수 없는 벽을.

눈 먼 새인가?
시각이 멀면 청각이 밝아진다는데
벽 속에 숨겨진 나무 소리를 듣나 보다
잠자고 있는 집안의 가구들을 깨워
그들이 먼 기억으로부터 일어나는
소리를 듣나 보다

저것 보세요!
책상 나무 무늬가 파도처럼 출렁인다
마루 바닥이 물씬 송진내를 토해낸다
창틀에서 푸른 가지가 피어난다
어떤 나뭇가지는 벌써 하늘을 가릴 만큼 커져 있다

빨간 모자 쓴 딱따구리가 휙 날아간다
나무 창틀이 솟아올린 숲으로.
―「나이테의 소리가 들리나요」 전문

이 작품은 어느 날의 범상치 않은 동기부로 시작된다.
벽을 두드리는 소리를 따라 밖으로 나가본즉
‘머리에 빨간 모자를 쓴 딱따구리가/ 콘크리트 벽을 쪼으고 있다.’
딱따구리가 벽을 쫀다는 있을 수 없는 일을 기정사실화하되, 사실적이면서도 의인화된 수식어를 개입시킴으로써 독자의 위화감을 상쇄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묘미는 독자의 심리에 남아 있는 위화감을 시 전편에 걸쳐 하나씩 지워나감으로써 논리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독자를 시인쪽으로
끌어당기는 데 있다. 딱따구리에 대한 시인의 심정적인 추리력이 ‘눈먼 새’로 낙착되고, ‘시각이 멀면 청각이 밝아진다’는 반전을 배치함으로써
책상과 마룻바닥이 가진 나무의 원시성을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집안의 가구들이 자연의 원목으로 되돌아가고, 이에 따라 주택은 한 그루의
나무로 변이되는 상상미학의 실체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른바 객관적 상관물로 제시된 이미지의 묘사가 단계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시인이 뜻하는 의미로
직조되고 가공됨에 따라, 예상치 못한 성과물로 실체화되는 것이다.

4.

월간 『문학과 창작』에서 유봉희의 시를 2회에 걸쳐 추천하면서 심사를
맡았던 강우식 시인과 필자는 1회 추천시에 ‘유봉희의 작품은 질박하지만
정공법에 의존해 사물의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고 평했고,
2회 당선 때에는 ‘유봉희는 시적 오브제가 주로 이국적 사물에 의존하고 있는 점이 약점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을 다시 시인의 정신세계에서 일반적인 정서의 새로운 이미지로 구축해 내는 솜씨가 상찬할 만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유봉희의 작품들은 정석대로 도입부에 시각적인 이미지를 장치하고 있지만,
그 이미지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오브제를 가공한 이미지라기보다는 자연의
풍경을 단면적으로 잘라내는 것이 특징적이다. 자연을 실체대로 처리하는 대신 디테일로 접근하면서 유봉희의 자연은 자연의 변형, 전이의 단계에 따라서
자연을 오브제로 재가공해 내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시집의 표제작인 「소금 화석」을 보자.

죽음의 계곡*에서 바라보는 산은
하얀 눈 목도리를 아직도 두르고 있다
어떤 센서로 저 산 위의 눈을 금방
해발 마이너스 95m까지 옮겨온 것일까
그러나 이곳은 지열을 뿜어내는 발 밑까지 하얀
소금의 평원, 바다가 육지로 몸을 바꾼 곳
소금은 더 단단한 결정체로 가려는지
뜨겁게 달구어진 불볕을 삼키고 있다
색 없는 색으로 발 밑에서 갈라지고 있다
새로운 생을 받아들이는 자리는
이렇게 흰 색이 마땅한 것인지
그들은 한때 일렁이고 출렁이던 기억들을 버린 것일까
아니면 오랜 시간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하얗게 빛 바랜 화석으로 일렁이는 것일까
(일렁이지 않는 물체가 어디 있을까)
갑자기 발 아래 소금밭이 쨍 빛을 낸다
하얗게 출렁이는 소금의 빛, 잠시
바다였던 소금의 물결들이 밀려오고 있다.
―「소금 화석」 전문

「소금 화석」의 도입부는 ‘눈’과 ‘목도리’를 결합시킴으로써 자연 풍경을
오브제로 가공한다. 죽음의 계곡을 배경으로 ‘바라다 보이는 산’을 인격화
함으로서 자연의 풍경이 순간 지열이 훈훈한 삶의 현장으로 바뀌는 것이다.
세밀한 관찰에 추정어법이 덧붙여지는 심리적인 추론 단계를 밟아나감으로써 독자가 가질 수 있는 위화감을 거세시키는 것이다. 바다가 육지로 바뀐
소금의 평원에서 다시 바다였던 소금의 물결이 몰려오는 풍경을 찾아냄으로써, 자연의 원형을 회복하는 것이 유봉희 시인의 해독인 것이다.

가름하자면 유봉희 시인이 이번에 펴내는 시집 『소금 화석』은
자연의 메시지를 독자적으로 수신하고 해독하는 미학적 장치를 개발함으로써 그가 보고 듣고 마주치는 일체의 자연을 재해석하고 가공하여 시인의 분신으로 전이시키는 특별한 감성을 선보이고 있다. 자연을 단면적으로 절삭하여 오브제로 재가공하고, 그 오브제에 상상력의 담금질이 가해짐으로써 탄력적인 내용이 증폭되는 것이다.
남종의 문인화가 보여주듯 시인이 보여주는 자연은 실체의 자연이 아니라
시인의 자화상이 되고, 시인이 심정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자연은 마티에르의 체질감을 북돋음으로써 초월적인 세계를 가시적으로 구도화하고, 그 미학적
품격을 한층 드높여주는 것이다. 자연이 유봉희 문학 지도의 새로운 명소로
변모하는 변신의 기법이다.
황산곡(黃山谷)은 선가(仙家)의 연단법(鍊丹法)을 빌려
‘시의 뜻은 무궁한데 사람의 재주는 한이 있다. 한이 있는 재주로 무궁한 뜻을 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 뜻을 바꾸지 않고 그 말을 만드는 것을 가리켜 환골법(換骨法)이라 하고 그 뜻을 본받아 형용(形容)하는 것을
가리켜 탈태법(奪胎法)이라 한다.’고 말한다.
유봉희의 이제까지의 시작업이 환골 탈태를 실체화하는 것이라면
다음번 시작업에는 완당 김정희가 보여주는 「세한도」의 여백과 팔대산인의 점청이 첨가됨으로서 뜻이 곧 형상이 되는 진경산수나 남종화의 정수가
깃들어지기를 바란다. ◑(시인, 문학아카데미 대표)

◑ 유봉희 시인이 보고 듣고 마주치는 일체의 자연을 재해석하고 가공하여
시인의 분신으로 전이시키는 특별한 감성을 선보이는 시 작품 수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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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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