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외된 사람들/이정애
2012.05.10 07:55
제외된 사람들
전주꽃밭정이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이정숙
울외 장아찌통을 열었다. 탱탱하던 울외가 탄력을 잃고 쭈글쭈글한 얼굴로 축 처져서 코끼리 주름을 하고 나온다. 안색도 본래의 색깔이 아니다. 맛을 내느라 공들인 양념 속에서 기다리며 참으며 긴 시간을 누워있다 보니 그렇게 된 모양이다. 달려있던 줄기에서 따내고 배를 가르고 속을 긁어내고 소금에 절여지는 동안 아프고 슬펐던 이야기를 담은 얼굴이다.
사람의 피부는 나이가 들면 재생능력이 떨어지고 회복속도가 느려지면서 탄력을 잃어 주름살이 생긴다고 한다. 이유와 과정은 다를지 몰라도 장아찌와 나를 번갈아가며 보니 쪼글한 외모도 긴 세월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오랜 친구처럼 푸근한 느낌이 든다. 생각만으로도 군침을 돌게해서 식욕을 돋구는 맛이 신식 요리에 못지 않은 장아찌에 비해 나는 남을 입맛나게 하는 사람은 못되니 그것이 다른 점이다.
요즘 나는 수필 공부를 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발끝에 채이는 것, 모두가 다 수필의 소재라는데 보이고 잡히고 들리고 채이는 게 암만 둘러봐도 보이지 않을 땐 답답함을 느낀다. 소재속에 숨어있는 이야기 거리를 아직 볼 줄 모르고, 캐낼 능력이 아직은 모자라는 탓일 것이다. 일주일에 많게는 두 편씩, 아니면 한 편씩 써내는 사람들에게 소재와의 눈맞춤을 어떻게 하는지 절실하게 배우고 싶다. 마음이 조금 조급해질 땐 젊지않음의 여유와 젊음의 열정 두가지를 함께 가지고 있는 같은 반 문우들을 보며 힘을 낸다.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내가 타고 있는 꿈의 열기구가 가라앉지 못하도록 띄워주곤 한다. 이처럼 어렵긴 하지만 서두르지 않고 수필쓰기에 정진할 수 있는 것은 차분히 공부할 수 있도록 멍석을 펴준 꽃밭정이노인복지관 덕이다.
내가 월요일마다 출석하는 복지관은 커다란 장아찌 공장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처럼 길쭉한 사람, 깻잎 닮은 넓적한 사람, 매실같이 동글동글한 사람, 울외처럼 통통한 사람들을 통에 담고 얼마 남지않은 인생의 도착지에 다다를 때까지 좋은 맛, 좋은 냄새를 내면서 살라고 숙성시키고 발효시키는 법을 가르친다. 30종류가 넘는 양념과 조리법을 준비해 놓고 노인들을 부른다. 그러고는 보이지 않는 한켠으로 치워져 살지말라고 말한다. 어둑한 횃대에 할 일 없이 앉아 졸지 말라고 한다. 모양이 좀 예쁘지 않은들 어쩌랴.
단 하나밖에 없는 나이니까 괜찮다고 위로한다. 힘을 내라고 토닥이며 격려도 해준다. 여기서 푹 익혀줄 테니 나가서 맛있게 살라 한다. 그 덕에 색깔도 모양도 조금씩 다른 각양의 사람들이 모양은 없으나 입맛 돌게하는 근사한 맛을 기대하면서 이 공장에서 장아찌처럼 빛깔 좋게 익어가고 있다.
복지관을 출입하는 사람들의 나이와 외모는 비슷해서 내가 노인이라는 위치를 순간 잊을 때가 있다. 소인국에 가면 다 소인이라서 작은 것이 특별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인 듯하다. 배움의 열정 때문인지 사람들 모두가 밝고 활기찬 모습 때문일 수도 있고 선생님과 학생이 모습만으로 잘 구분이 되지 않는 것도 그 이유 중에 드는 것 같다. 이정표에 도착지의 남은 거리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건 그곳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무언의 안내다.
복지관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거의가 다 삶의 목적지가 가깝다는 이정표를 읽고 마음으로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나이의 사람들이다. 가지고 내려야할 물건이 어떤 것들인지 머릿속으로 챙겨보며 정리도 해볼 즈음이다. 핑크빛이 무엇인지 어떤 색깔인지 알았던 시절도 지났다. 어깨를 누르는 무거운 삶의 무게로 힘겹게 타박타박 먼길 걸어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살짝 건드리면 웃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감각과 정서가 있음에도 두 다리 쭉 뻗어볼 여유가 없어 덤덤한 사람처럼 살아 왔으리라. 길이 왜 이렇게 팍팍하냐고 힘드냐고 투덜거리며 원망하며 올라와 보니 어느새 정상이다. 잠시 땀을 닦으며 지나쳐 온 길을 내려다 보니 힘든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바빠서, 욕심에 눈이 가려져서, 또 끌탕하느라 못봤을 뿐 아름다운 것이 천지에 깔려 있음이 그제야 보인다.
이제 지나간 것은 부끄러움도 자랑도 아닌 나이, 뜨거운 국물을 마시며 시원하다고 말하는 나이까지 왔다. 그동안 바쁘게 걷느라 휘저은 팔에 누가 맞았는지, 내가 쏟아낸 말의 폭력, 생각의 폭력에 몇 명이나 다쳤는지 돌아볼 짬도 못내다가 이제야 헤아려보는 지점에 섰다. 장아찌는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가 모양없는 주름이 생긴 후에야 제맛이 나는 것처럼 우리의 주름이 왜 아름다운지 설명을 할수 있을것 같다. 이제 거의 다 내려온 길이긴 하지만 진달래도 따먹고 꽃반지도 만들어 끼워보고 냇물에 발도 한 번 담그면서 느긋한 걸음으로 남은 길 마저 내려가야 하지 않을까.
세상이 덤비면 맞받아치려고 쥐었던 주먹도 이제는 풀고, 그 손바닥으로 감당할 만큼 세상을 품어야 하리라. 어느날 텔레비젼에서 나이에 맞는 운동법을 소개했다. 20대부터 시작해서 30대, 40대로 올라가면서 자세하게 설명해 갔다. 나는 60대에 맞는 운동법은 뭘까하고 순서를 기다렸다. 그런데 50대까지만 소개를 하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60대부터는, 운동은 알아서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그저 그런 세대로 분류되는 모양이다. 우리를 흔들리는 싸리 울타리쯤으로 여기는 것 같아 서글펐다.
또 어느날은 모르는 발신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상대방이 납작 엎드려 최상의 존대어로, 살살 녹이는 말투로 학습지 회사라고 소개를 했다. 손자가 그 즈음에 받아보던 곳인가 해서 몇가지 물음에 응대하던 중 내 나이를 물었다. 내 나이는 그쪽에서 잡고 싶었던 물고기가 아니었던지 '죄송합니다. 대상이 안되시는군요.' 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렇듯 이런저런 서러움을 당하며 사는 <제외된 사람들>을 품고 오늘도 복지관이란 공장은 가동을 쉬지 않는다. 우리는 숙성이 잘된 맛있는 장아찌들로 너른 세상에서 살 것이다. 우리의 길을 감사하며 평안히 갈 것이다.
(2012. 5. 11.)
전주꽃밭정이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이정숙
울외 장아찌통을 열었다. 탱탱하던 울외가 탄력을 잃고 쭈글쭈글한 얼굴로 축 처져서 코끼리 주름을 하고 나온다. 안색도 본래의 색깔이 아니다. 맛을 내느라 공들인 양념 속에서 기다리며 참으며 긴 시간을 누워있다 보니 그렇게 된 모양이다. 달려있던 줄기에서 따내고 배를 가르고 속을 긁어내고 소금에 절여지는 동안 아프고 슬펐던 이야기를 담은 얼굴이다.
사람의 피부는 나이가 들면 재생능력이 떨어지고 회복속도가 느려지면서 탄력을 잃어 주름살이 생긴다고 한다. 이유와 과정은 다를지 몰라도 장아찌와 나를 번갈아가며 보니 쪼글한 외모도 긴 세월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오랜 친구처럼 푸근한 느낌이 든다. 생각만으로도 군침을 돌게해서 식욕을 돋구는 맛이 신식 요리에 못지 않은 장아찌에 비해 나는 남을 입맛나게 하는 사람은 못되니 그것이 다른 점이다.
요즘 나는 수필 공부를 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발끝에 채이는 것, 모두가 다 수필의 소재라는데 보이고 잡히고 들리고 채이는 게 암만 둘러봐도 보이지 않을 땐 답답함을 느낀다. 소재속에 숨어있는 이야기 거리를 아직 볼 줄 모르고, 캐낼 능력이 아직은 모자라는 탓일 것이다. 일주일에 많게는 두 편씩, 아니면 한 편씩 써내는 사람들에게 소재와의 눈맞춤을 어떻게 하는지 절실하게 배우고 싶다. 마음이 조금 조급해질 땐 젊지않음의 여유와 젊음의 열정 두가지를 함께 가지고 있는 같은 반 문우들을 보며 힘을 낸다.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내가 타고 있는 꿈의 열기구가 가라앉지 못하도록 띄워주곤 한다. 이처럼 어렵긴 하지만 서두르지 않고 수필쓰기에 정진할 수 있는 것은 차분히 공부할 수 있도록 멍석을 펴준 꽃밭정이노인복지관 덕이다.
내가 월요일마다 출석하는 복지관은 커다란 장아찌 공장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처럼 길쭉한 사람, 깻잎 닮은 넓적한 사람, 매실같이 동글동글한 사람, 울외처럼 통통한 사람들을 통에 담고 얼마 남지않은 인생의 도착지에 다다를 때까지 좋은 맛, 좋은 냄새를 내면서 살라고 숙성시키고 발효시키는 법을 가르친다. 30종류가 넘는 양념과 조리법을 준비해 놓고 노인들을 부른다. 그러고는 보이지 않는 한켠으로 치워져 살지말라고 말한다. 어둑한 횃대에 할 일 없이 앉아 졸지 말라고 한다. 모양이 좀 예쁘지 않은들 어쩌랴.
단 하나밖에 없는 나이니까 괜찮다고 위로한다. 힘을 내라고 토닥이며 격려도 해준다. 여기서 푹 익혀줄 테니 나가서 맛있게 살라 한다. 그 덕에 색깔도 모양도 조금씩 다른 각양의 사람들이 모양은 없으나 입맛 돌게하는 근사한 맛을 기대하면서 이 공장에서 장아찌처럼 빛깔 좋게 익어가고 있다.
복지관을 출입하는 사람들의 나이와 외모는 비슷해서 내가 노인이라는 위치를 순간 잊을 때가 있다. 소인국에 가면 다 소인이라서 작은 것이 특별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인 듯하다. 배움의 열정 때문인지 사람들 모두가 밝고 활기찬 모습 때문일 수도 있고 선생님과 학생이 모습만으로 잘 구분이 되지 않는 것도 그 이유 중에 드는 것 같다. 이정표에 도착지의 남은 거리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건 그곳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무언의 안내다.
복지관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거의가 다 삶의 목적지가 가깝다는 이정표를 읽고 마음으로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나이의 사람들이다. 가지고 내려야할 물건이 어떤 것들인지 머릿속으로 챙겨보며 정리도 해볼 즈음이다. 핑크빛이 무엇인지 어떤 색깔인지 알았던 시절도 지났다. 어깨를 누르는 무거운 삶의 무게로 힘겹게 타박타박 먼길 걸어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살짝 건드리면 웃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감각과 정서가 있음에도 두 다리 쭉 뻗어볼 여유가 없어 덤덤한 사람처럼 살아 왔으리라. 길이 왜 이렇게 팍팍하냐고 힘드냐고 투덜거리며 원망하며 올라와 보니 어느새 정상이다. 잠시 땀을 닦으며 지나쳐 온 길을 내려다 보니 힘든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바빠서, 욕심에 눈이 가려져서, 또 끌탕하느라 못봤을 뿐 아름다운 것이 천지에 깔려 있음이 그제야 보인다.
이제 지나간 것은 부끄러움도 자랑도 아닌 나이, 뜨거운 국물을 마시며 시원하다고 말하는 나이까지 왔다. 그동안 바쁘게 걷느라 휘저은 팔에 누가 맞았는지, 내가 쏟아낸 말의 폭력, 생각의 폭력에 몇 명이나 다쳤는지 돌아볼 짬도 못내다가 이제야 헤아려보는 지점에 섰다. 장아찌는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가 모양없는 주름이 생긴 후에야 제맛이 나는 것처럼 우리의 주름이 왜 아름다운지 설명을 할수 있을것 같다. 이제 거의 다 내려온 길이긴 하지만 진달래도 따먹고 꽃반지도 만들어 끼워보고 냇물에 발도 한 번 담그면서 느긋한 걸음으로 남은 길 마저 내려가야 하지 않을까.
세상이 덤비면 맞받아치려고 쥐었던 주먹도 이제는 풀고, 그 손바닥으로 감당할 만큼 세상을 품어야 하리라. 어느날 텔레비젼에서 나이에 맞는 운동법을 소개했다. 20대부터 시작해서 30대, 40대로 올라가면서 자세하게 설명해 갔다. 나는 60대에 맞는 운동법은 뭘까하고 순서를 기다렸다. 그런데 50대까지만 소개를 하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60대부터는, 운동은 알아서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그저 그런 세대로 분류되는 모양이다. 우리를 흔들리는 싸리 울타리쯤으로 여기는 것 같아 서글펐다.
또 어느날은 모르는 발신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상대방이 납작 엎드려 최상의 존대어로, 살살 녹이는 말투로 학습지 회사라고 소개를 했다. 손자가 그 즈음에 받아보던 곳인가 해서 몇가지 물음에 응대하던 중 내 나이를 물었다. 내 나이는 그쪽에서 잡고 싶었던 물고기가 아니었던지 '죄송합니다. 대상이 안되시는군요.' 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렇듯 이런저런 서러움을 당하며 사는 <제외된 사람들>을 품고 오늘도 복지관이란 공장은 가동을 쉬지 않는다. 우리는 숙성이 잘된 맛있는 장아찌들로 너른 세상에서 살 것이다. 우리의 길을 감사하며 평안히 갈 것이다.
(2012. 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