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진/허명기
2013.12.15 05:34
가족사진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허명기
색상과 명암이 조화로운 한 장의 컬러사진이 거실 한 쪽 벽에 걸려있다. 사진 속 인물은 나와 아내를 비롯한 아들과 딸 내외 등 다섯 명이다. 따사로운 햇살이 우리 집 거실에 들어와서 도란거린다. 모나리자 얼굴처럼 항상 신비스런 웃음을 보내는 우리 가족과 친해지고 싶은 모양이다.
어느 사진관을 가더라도 진열장(show window)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단란한 모습의 가족사진이 눈에 띈다. 사진관을 지나칠 때마다 나도 언젠가는 큼지막한 가족사진을 찍어 눈에 잘 띄는 거실 벽에 번듯하게 걸어놓고 싶었다. 가장을 중심으로 아내와 자식들이 함께 있는 사진에서 그 가정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고, 가족 중 어느 누가 힘들 땐 용기와 격려를 보내주는 수호신 같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아 가족사진을 찍을 기회가 왔다. 5년 전 딸이 결혼하면서 가족사진을 찍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사위도 가족의 일원으로 들어와 사진 속에 자리 잡고 있으니 분명 아들 하나를 더 얻은 셈이다.
난 초등학교 이전에 찍은 사진은 별로 없다. 있다면 백일 때 누님이 나를 안고 찍은 사진과 초등학교 졸업앨범 속 얼굴 부분만 찍힌 사진이 전부다. 그 당시 사진을 찍으려면 결혼식 때 말고는 사진 찍기가 어려웠고, 사진기도 귀할 때였다. 그래서 사진을 찍으려면 일부러 사진관에 가야 했고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시골에서 사진 찍을 기회가 온 건 설이나 추석 명절 무렵 사진관에 종사하는 사진기사가 시골 마을을 순회하면서 돈을 받고 찍을 때였다. 친구들과 삼삼오오 짝을 지어 무표정한 얼굴로 카메라 렌즈에 시선을 둔 부동자세의 사진이었다. 그것도 줄을 서서 기다리며 찍어야 했다. 그때 사진사들은 대목을 맞아 수입이 꽤 짭짤했을 것이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벽에 걸려있는 빛바랜 사진액자를 볼 수 있다. 큼지막한 영정사진과 그 옆의 액자 속에 크고 작은 흑백사진 속 인물들이 근엄한 자세로 자리 잡고 있다. 사진을 보노라면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묻어난다. 칼라 사진에서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향수를 느낄 수 있다. 이제 사진 속 어린아이는 만고풍상 다 겪은 초로의 어른이 되어 손자들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고 있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정말 행복하다. 시대를 잘 타고나 배고픔을 모르고, 재능에 따라 얼마든지 자기 길을 갈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문호가 활짝 열려있으니 얼마나 좋은 시대인가. 엄마는 태아에서부터 성장 과정을 디지털카메라에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모두 담고 있다. 그것도 웬만하면 동영상으로 찍어 생생한 모습을 그대로 담아 기록한다. 이 아이는 어른이 되어 그 모습을 보면 얼마나 감개무량해할까. 부모 또한 성장하는 모습을 수시로 재생해 보면서 귀엽고 재롱을 떨던 지난날을 추억하며 행복해 할 것이다.
나는 아버지 대(代)의 가족사진이 없다. 찍을 만한 경제적 여유도 그런 의식조차 가지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먹고 사는 문제가 지상과제였으니 가족사진 하나 장만하는 것이 어찌 보면 사치로 생각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또 부모님의 명함판 사진 한 장도 없다. 있다면 주민등록증 발급 받을 때 사진이 거의 전부였다.
아버지가 병석에 계실 때의 일이다. 돌아가시기 전에 영정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했다. 그 무렵엔 마을을 순회하면서 전문적으로 영정사진을 찍어 영업행위를 하는 사진기사가 있었다. 사진 찍을 몸 상태가 아님에도 머리와 수염을 다듬고 얼굴에 분장하며 깨끗한 한복으로 갈아입고 사진을 찍었다. 늙고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 어디 가겠는가. 평소 인자하고 과묵하시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항상 초췌하고 병든 모습의 사진이었다. 더군다나 흑백이 아닌 칼라로 찍었으니 더 확연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게 마음이 아프고 보기가 싫어서 돌아가실 때만 사용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 두었다. 그래서 영정사진도 인생의 원숙미가 넘칠 때 찍어야 할 것 같았다.
언제부턴가 사진 찍기가 싫어졌다. 아마 그때가 40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사무관 승진과 더불어 수원에 있는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교육을 받을 때 반명함판 사진을 내라고 했다. 급하게 카메라로 찍어 제출했으나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사진 속 내 모습이 너무 변한 게 아닌가. 아마 그때 체감나이가 50대 중반을 넘어선 그런 모습이었다. 40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동안(童顔)에 총각 같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는데 너무 충격이었다. 지금 같으면 포토샵(photo shop) 처리라도 하여 어느 정도 막아주었을 텐데 말이다.
평소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과 사진을 찍었을 때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는 게 착시 현상인지 아닌지 지금도 수수께끼다. 아마 그때 세월 따라 나이를 머는 걸 체감했고 나이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한 것 같다.
지금 우리 집 거실에는 큼지막한 가족사진이 번듯하게 걸려있다. 가족사진 중심에 자리 잡은 나는 기둥이고 아내는 대들보다. 그 옆에 자식들은 서까래다. 집을 이루는 가족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다. 가족의 중심축인 나의 존재감이 사진 속에서 클로즈업된다. 얼마 안 있으면 아들을 따라 식구 하나가 더 늘어 가족사진 속에 새 인물이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손자와 외손자들도 불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족사진을 다시 찍어야 하리라. 그러면 사진 속의 고운 미소들이 우리 거실을 더욱 환하게 밝혀 줄 것이다.
(2013. 12. 15.)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허명기
색상과 명암이 조화로운 한 장의 컬러사진이 거실 한 쪽 벽에 걸려있다. 사진 속 인물은 나와 아내를 비롯한 아들과 딸 내외 등 다섯 명이다. 따사로운 햇살이 우리 집 거실에 들어와서 도란거린다. 모나리자 얼굴처럼 항상 신비스런 웃음을 보내는 우리 가족과 친해지고 싶은 모양이다.
어느 사진관을 가더라도 진열장(show window)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단란한 모습의 가족사진이 눈에 띈다. 사진관을 지나칠 때마다 나도 언젠가는 큼지막한 가족사진을 찍어 눈에 잘 띄는 거실 벽에 번듯하게 걸어놓고 싶었다. 가장을 중심으로 아내와 자식들이 함께 있는 사진에서 그 가정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고, 가족 중 어느 누가 힘들 땐 용기와 격려를 보내주는 수호신 같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리 오래 가지 않아 가족사진을 찍을 기회가 왔다. 5년 전 딸이 결혼하면서 가족사진을 찍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사위도 가족의 일원으로 들어와 사진 속에 자리 잡고 있으니 분명 아들 하나를 더 얻은 셈이다.
난 초등학교 이전에 찍은 사진은 별로 없다. 있다면 백일 때 누님이 나를 안고 찍은 사진과 초등학교 졸업앨범 속 얼굴 부분만 찍힌 사진이 전부다. 그 당시 사진을 찍으려면 결혼식 때 말고는 사진 찍기가 어려웠고, 사진기도 귀할 때였다. 그래서 사진을 찍으려면 일부러 사진관에 가야 했고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시골에서 사진 찍을 기회가 온 건 설이나 추석 명절 무렵 사진관에 종사하는 사진기사가 시골 마을을 순회하면서 돈을 받고 찍을 때였다. 친구들과 삼삼오오 짝을 지어 무표정한 얼굴로 카메라 렌즈에 시선을 둔 부동자세의 사진이었다. 그것도 줄을 서서 기다리며 찍어야 했다. 그때 사진사들은 대목을 맞아 수입이 꽤 짭짤했을 것이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벽에 걸려있는 빛바랜 사진액자를 볼 수 있다. 큼지막한 영정사진과 그 옆의 액자 속에 크고 작은 흑백사진 속 인물들이 근엄한 자세로 자리 잡고 있다. 사진을 보노라면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묻어난다. 칼라 사진에서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향수를 느낄 수 있다. 이제 사진 속 어린아이는 만고풍상 다 겪은 초로의 어른이 되어 손자들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고 있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정말 행복하다. 시대를 잘 타고나 배고픔을 모르고, 재능에 따라 얼마든지 자기 길을 갈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문호가 활짝 열려있으니 얼마나 좋은 시대인가. 엄마는 태아에서부터 성장 과정을 디지털카메라에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모두 담고 있다. 그것도 웬만하면 동영상으로 찍어 생생한 모습을 그대로 담아 기록한다. 이 아이는 어른이 되어 그 모습을 보면 얼마나 감개무량해할까. 부모 또한 성장하는 모습을 수시로 재생해 보면서 귀엽고 재롱을 떨던 지난날을 추억하며 행복해 할 것이다.
나는 아버지 대(代)의 가족사진이 없다. 찍을 만한 경제적 여유도 그런 의식조차 가지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먹고 사는 문제가 지상과제였으니 가족사진 하나 장만하는 것이 어찌 보면 사치로 생각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또 부모님의 명함판 사진 한 장도 없다. 있다면 주민등록증 발급 받을 때 사진이 거의 전부였다.
아버지가 병석에 계실 때의 일이다. 돌아가시기 전에 영정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했다. 그 무렵엔 마을을 순회하면서 전문적으로 영정사진을 찍어 영업행위를 하는 사진기사가 있었다. 사진 찍을 몸 상태가 아님에도 머리와 수염을 다듬고 얼굴에 분장하며 깨끗한 한복으로 갈아입고 사진을 찍었다. 늙고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 어디 가겠는가. 평소 인자하고 과묵하시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항상 초췌하고 병든 모습의 사진이었다. 더군다나 흑백이 아닌 칼라로 찍었으니 더 확연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게 마음이 아프고 보기가 싫어서 돌아가실 때만 사용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 두었다. 그래서 영정사진도 인생의 원숙미가 넘칠 때 찍어야 할 것 같았다.
언제부턴가 사진 찍기가 싫어졌다. 아마 그때가 40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사무관 승진과 더불어 수원에 있는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교육을 받을 때 반명함판 사진을 내라고 했다. 급하게 카메라로 찍어 제출했으나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사진 속 내 모습이 너무 변한 게 아닌가. 아마 그때 체감나이가 50대 중반을 넘어선 그런 모습이었다. 40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동안(童顔)에 총각 같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는데 너무 충격이었다. 지금 같으면 포토샵(photo shop) 처리라도 하여 어느 정도 막아주었을 텐데 말이다.
평소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과 사진을 찍었을 때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는 게 착시 현상인지 아닌지 지금도 수수께끼다. 아마 그때 세월 따라 나이를 머는 걸 체감했고 나이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한 것 같다.
지금 우리 집 거실에는 큼지막한 가족사진이 번듯하게 걸려있다. 가족사진 중심에 자리 잡은 나는 기둥이고 아내는 대들보다. 그 옆에 자식들은 서까래다. 집을 이루는 가족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다. 가족의 중심축인 나의 존재감이 사진 속에서 클로즈업된다. 얼마 안 있으면 아들을 따라 식구 하나가 더 늘어 가족사진 속에 새 인물이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손자와 외손자들도 불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족사진을 다시 찍어야 하리라. 그러면 사진 속의 고운 미소들이 우리 거실을 더욱 환하게 밝혀 줄 것이다.
(2013. 1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