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죄송해요

2008.03.30 09:22

노기제 조회 수:752 추천:136

20080330                어머 죄송해요

        왜 화가 날까? 맹렬하게 나를 비난하는 말도 아닌데. 다른 방송들은 그냥 목사님 설교로 시작하는데 왜 집사님이 기도를 설교 전에 하느냐며 대뜸, 안  좋다 라며 얼굴을 삐죽인다. 어머 죄송해요. 했더라면 좋았을 걸. 얼굴을 보니 낯설다. 손님으로 오신, 옛날 한국에서 목회하시던 목사님이란 분이다.
        순간 욱하며 치미는 것을 느꼈다. 이거 뭐야. 우리 방송하는데 도와준 거 있어? 왜 남의 제상에 배 놔라 감 놔라 참견이람. 속으로 그러고 말아야 하는데 금방 격앙된 소리로 말대꾸를 했다. 변명처럼 들리는 설명을 하느라 목청을 돋았다. 비죽비죽 웃음을 흘리며 그 목사라는 분, 내 곁에 바짝 따라 다니며  기도를 빼란다.
        어릴 적, 제일 처음 칭찬을 받고 황홀하게 간직하고 살던 특기가 낭독이었다. 아나운서를 해보려 맘만 먹고, 여의치 않아  성우 공부를 했지만 기회를 잡지 못하고 이민 생활 23년 되던 해에 선교방송을 시작했다. 우연인 듯 찾아 온 기회였지만, 평생을 가슴에서 숙성 시킨 하늘이 주신 달란트였다.
        준비하고 연습하고 할 사이도 없이 방송 펑크 나기 직전 대타로 마이크를 잡았지만 한 시간짜리 선교방송을 흠 잡히지 않게 진행해 나갔다. 그렇게 시작 된  방송 일을 통관사란 내 본업과 겸하면서 이어오기 어언 13년. 물론 방송국도 옮겼었고 도중 끊어지기도 했고, 다시 이어지고, 또 끊기고....실지로 계산 해 보면 그저 5년차 경험자라고 자부 할 수 있는 입장이다.
        2년여의 공백을 깨고 요즘 다시 방송을 한다. 옛날 내가 한 시간짜리 선교 방송을 꾸며서 하던 것과는 달리 목사님의 말씀을 전파로 보낼 때, 앞뒤 간단히 멘트만 넣는다. 아무래도 목사님 설교로 30분을 다 채운다면 말씀 하시는 목사님에게도 무리고, 듣는 청취자에게도 무리가 따른다. 여러 해 방송을 하면서 얻어진 의견이다. 그래서 멘트를 담당한 아나운서가 적당히 양념을 치면 효과적일 수도 있다. 가끔 애청자에게서 전화도 받는다. 목사님 말씀과는 다른 어떤 맛이 있어서 좋았다고. 같은 평신도로서 하는 말이기에 공감이 더 잘된다는 용기 되는 말도 듣는다.
        어찌 칭찬만 듣겠는가. 비난도 있을 터. 솔직히 비난에 익숙할 수가 없다. 극소수의 비난이라도 귀담아 듣기는 한다. 고칠 점 지적당하면 고치려 노력하고 울화가 치밀어도 공인이란 그런 거라는 말씀에 잠잠해지곤 한다. 그러나 그 비난이란 아주 가까운 우리 교단 안에서 나온다. 주로 은퇴 하신 목사님들이다. 그래서 내 반응은 뾰족하니 언성이 높아진다.
        이번 경우도 똑 같다. 70대의 은퇴 목사님. 그것도 손님으로 오셔서 처음 얼굴 대하는 내게 예의도 안 차린 말투로 그냥 해라 조로 말씀하시니 내 속은 마구 뒤 틀리고 부글댄다. 한 번 그렇게 지나가고 비난에 귀 기울이신 우리 목사님과 의논 끝에 그럼 기도를 빼고 짧은 시작 멘트 후 곧바로 목사님 설교로 들어가고 있다. 내가 깨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순종하기로 했다. 설교를 하시는 우리 목사님은 나보다 20년이나 뒤에 태어 나셨다. 어찌 보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어디 젊은 사람하나 찾으시라고 말씀도 드렸다.
        넉넉한 살림에 라디오방송국 사용료 지불하고, 목사님, 아나운서 수고비 주면서 내 보내는 방송이 아닌 봉사 직이다.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 중,   어느 정도 방송 능력을 갖춘 자원봉사자를 찾는 일이 쉽지 않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내가 도중하차 한다면 그건 더 큰 교만이다. 여유를 두고 다음 타자를 물색해야 하는 일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일하는 사람은 자기 고집이 있다. 나도 웬만하면 내 고집대로 밀고 나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여기선 내가 주연이 아닌 조연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우리 목사님께 폐가 될까봐 내 고집은 다 버린다. 다시 방송이 시작되던 날도 목사님의 구상대로 시도했다가 누군가 비난 전화를 했다고 황급히 바꾼 순서가 내 기도였는데 또 화살을 맞았다.
        극소수의 불평을 무시 못 하고 우왕좌왕 방송 편성을 바꿔야 한다면 도대체 어디까지 끌려 다닐 건가 속이 탄다. 이제 한 달 되어 가는데 이런 식으론 안 하고 싶다. 어머 죄송해요. 곧 바꾸겠습니다. 어머 죄송해요. 어머 죄송해요. 연습을 안 했더니, 한 주 안 보이던 그 목사님, 예배 후 점심시간에 첫 술 뜨려는 차 어느새 곁에 오시더니, 딴 방송들은 다 아나운서들이 하는데 집사님만 전문가가 아니더라. 어머 죄송해요 가 안 나오고 나도 오랜 경험자라고 대꾸했더니 어쨋던 집사님 목사린 너무 투박해서 안 된단다.
        어머 죄송해요. 왜 이 말이 안 나오는지 모르겠다.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허겁지겁 먹는 내 모양새가 보인다. 분명 체하겠다. 나도 안다. 내 목소리가 젊은 사람 목소리가 아니다. 어려서 전화를 받으면 꼭 사모님이세요? 라며 엄마로 오인들 했던 목소리다. 오히려 엄마가 받으면 아아, 미스박야? 라며 혼동들 하던 목소리다. 그러나 투박하다는 표현은 처음이다. 차분하고 안정감 있어서 마음을 파고드는 목소리라고 좋아들 했는데. 아니, 아직도 어느 출판기념회에서 작품 낭독을 하면 사람들 넋을 빼 놓는 목소리로 인정받고 있는데.
투박하니 집어 치우라는 이 대접을 내 어찌 감당해야 하는지.
        그렇지. 가까이 지난해 동창회 연말 파티에서 사회를 맡아 내 작품을 낭송했을 때도, 분명 사회할 때 목소리 보단 낭독할 때 목소리가 너무 좋다고, 너무 좋다고, 들은 것이 넉 달도 안 됐는데.....억울하다. 절대로 어머 죄송해요 소리를 못 하겠다. 내 나이 생각하고 내가 먼저 물러나려 맘을 먹었던 일인데 이렇게 등 떠밀려야 하는 상황이 되니 분통만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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