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 논쟁중에 생각 난 꽃 값

2008.07.23 05:10

노기제 조회 수:879 추천:148

20080606
                        비극 논쟁에서 생각 난 꽃 값

        “갚아야 할 사람은 잊었는데 받을 사람은 안 잊고 있는 것, 그건 대단한 비극이다 너.”
‘그러게, 저앤 왜 내돈 안 갚는거야? 그렇다고 달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얼굴 마주하면 눈 째려 보며 속으로만 들 끓는거지 뭐.”
        오랜만에 만난 가까운 중고 동창 다섯이 만난 점심 모임이다. 우연히 주고 받던 이야기 끝에 실제로 겪었던 경험 한 토막을 떠 올리며 억울햇던 순간을 Y가 말한다.   “글쎄말야, 동창이 가게를 오픈했으니 모아서 화분이라도 사준다고 여기 저기 전화를 했거든. 직접 참석하는 동창들이야 즉석에서 추렴이 되지만, 참석 못 하는 동창들은 뭐든지 좋은걸로 사고 나중에 분담금을 알려 달라기에 내 돈으로 몇 사람분을 대납했거든. 한 달 만에도 받고, 두 달 만에도 받았는데 지독한 건 일곱 달 만에 겨우 받았다는거 아니겠니. 그 동안에 내 속이 얼마나 부글부글 했었는지. 그 후엔 다시는 그런 짓 안 한다 얘.”
     시작은,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를 웃자고 명애가 꺼낸 화제였다.  우연히 경험자 Y가 나섰고, 얼굴색이 울그락 푸르락 바뀌며 그 순간의 감정을 되 돌려 실감나게 연출을 한다. 네명 모두 재밋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보조를 맞춘다. 거의 낄낄대는 수준인데 내가 그만 웃음보가 터졌다. 신기하게도 딱 맞는 경험을 했던 것이 생각 난거다. 그것도 바로 내 앞에 앉아 비극 논리를 꺼낸 명애가 해당자다. 평생 한 번도 생각나지 않았던 일이다. 이건 거의 신비에 가까운 수준이다.
     미국에서 사는 내가 한국방문중에 한국에서 사는 동창들과 아주 오랫만에 마주한 자리에서 이런 대화가 시작이 되고 바로 그 당사자가 자연스럽게 꺼낸 화제다. 갑자기 머리속에서 펼쳐지는 장면들을 혼자 보면서 정체 모를 흥분을 느낀다. 팽창되는 가슴이 따뜻해 진다. 참을 수 없는 폭소를 터트린다. 발을 구르며 탁자를 두드린다. 경험을 얘기하는 Y가 은근히 분노를 표시하고 있었지만,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건 기쁨이다.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화제의 이어짐에 그 오랜 기억이 고스란히 되 살아나고 있다.
     이건 당연히 갚아야 할 빚을 갚지 않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아니다. 남달리 가까웠던 두 친구의 추억이다. 그래도 조금은 조심스럽다. 내 마음이 왠지 모를 기쁨으로 이렇게 펄쩍펄쩍 뛰고 있으니  명애의 눈치를 살피다 그만 묻어버릴 일이 아니다. 함박웃음이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데 이게 무슨 숨길 일인가. 그 당시 며칠은 부글부글 끓기도 했을 법 하지만, 그 후론 이 나이 되도록 한 번도 생각나지 않다가 오늘 이 시간, 이 모임에서 생각 난 것이 내겐 큰 의미로 다가온다.
     박장대소하는 내 모습에 슬그머니 의문을 제기하는 눈치들이다. 웃음을 멈추지 못하면서 말문을 꺼냈다. “명애가 들으면 얼굴 빨개질지 모르지만 나도 그런 경험 있거든. 중학교 2학년 때, 강신호 선생님이 편찮으셔서 결근을 하셔서, 댁으로 병문안을 간 적이 있었어. 나야 강신호 선생님 흠모하던 가시나였으니 당연하지만 도대체 어떤 이유로 명애가 동행 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근데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아줌마를 본 명애가 꽃을 사자는 거야. 당연히 지가 사는 줄 알았지. 근데 하는말이 자기는 일요일에 돈을 안 쓰니까 나보구 내라는거야. 속으로 별꼴이라 생각하면서 그렇게 했지. 무슨 꽃을 얼만큼 샀는지는 당근 기억 안 나구. 믿거나 말거나 그런일이 있었단다.”
     다들 눈이 둥그레지며 순간 침묵이다. 누가 명애더러 묻는다. “너 생각나니?”  “아니, 근데 맞는 말이야. 그 당시 우리 집에선 일요일에 돈을 안 쓰는 걸로 되어 있었거든.” 순간 다들 큰 소리로 웃는다. “사실은 기억에 없지만, 확실한 증거는 있다는 얘기 아냐? 아니 그런데 50년 전 일을 어떻게 여지껏 말 한 마디 않고 있었니? 진작 말을 하지.” 아무래도 믿을 수 없다는 듯 Y가 적극적이다.  “그러게, 나도 생각이 안 났던 거지 뭐.”.
     아무래도 억울하단 투로 명애가 말을 잇는다. “아니 그 총기 좋을 때 일을 내가 어찌 50년 동안이나 잊고 있을 수가 있냐 말야. 거참, 거짓말이 아니란 건 확실하니….” 자칫 다른 모양의 대화로 이어질 위험이 잠시 느껴지더니 명애의 현명한 판단이 내려진다.  “야, 요즘 병 문안 가려면 십만원은 들여야 꽃을 살 수 있으니 그 반, 오만원 지금 갚는다. 이제 빚진 거 없다. 확실하게 갚었다.”
“이그 됐네요 됐어. 웃자고 한 소리지 내가 정말 그 돈 받으려고 밝힌 건 아니다 뭐. 50년이 아니고 48년 이다. 아무리 화폐 가치가 올랐어도 이건 너무 크다. 됐으니 넣어 두셔 엉?”
     지갑을 열고 꺼낸 오만원을 고집스레 들고 있는 명애 손에서 따스한 전율이 느껴져 온다. 내게 용돈을 주고 싶은가보구나. 그래 고맙게 받자. 이어지는 명애의 음성, “지금 안 받고 미국가서 부글부글 속 끓이지 말고 받아 두라구.” “야아 이거 웬 횡재냐. 알았다.” 분위기 바뀔가 두려워 그냥 받았다.여전히 Y의 진지한 계산이 명애를 거든다.  “그래두 그렇지 그 때 뭐 그리 비싼 꽃을 샀겠니? 오만원은 너무 했다.”  
     글쎄. 내게 느껴지는 건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닌, 이 기회에 내게 용돈이라도 찔러 넣어 주고자 하는 명애 마음 아닐까. 경제적 능력 있는 명애니까 여행 중인 내게 베푸는 사랑을 그냥 받아 두리라. 명애도 나도 돈 오만원이 아쉬운 형편들은 아니다. 50년 가까운 추억을 들춰 내어 함께 깔깔댈 수 있는 우리 사이가 소중한 것이다.
     행여 누구에게 돈 꿔 주고 계속 부글부글 속 끓일거면 멱살이라도 잡고 달라고 해야겠다. 꿔 쓴 사람은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을 받을 사람만 기억하고 있다는 건 확실히 비극은 비극일성 싶다. 다행히 나도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 비극은 아니었고, 순식간에 생각나고 당장 받았으니 해피엔딩이 된 거다. Y처럼 행여 내게 곱지 않은 시선 보낼 동창도 있겠지만 친구는 친구. 서로가 같은 마음으로 생각하고 사랑을 주는 것이라 생각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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