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주는 숙제/'이 아침에'미주중앙일보
2010.10.15 20:47
가을이 주는 숙제
조옥동/시인
집밖엔 어느 새 가을이 색색의 선물을 싣고 도착했다. 금세 짐을 부릴 태세다. 더 이상 지고 업고 기다리기 어렵다고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다. 며칠 전만 해도 다가온 계절을 모르는 척 따가운 햇볕에 어중간한 표정을 매달고 있던 뒤 울안의 열매들이 분명한 얼굴을 하고 손짓을 한다.
석류와 사과 오렌지와 대추의 붉음도 열매 따라 농도가 다르고 한 알의 열매도 부분적으로 색조가 다르다. 봄부터 여름까지 푸름과 초록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가을은 아주 대조되는 색상으로 슬그머니 마음 속을 점령한다.
며칠에 한 번씩 남편과 함께 발보아 호수 주위를 산책한다. 복잡한 도심에 이만한 철새 도래지가 있음을 아는 사람은 알지만 대부분은 걷기나 낚시를 하러 찾아오는 곳이다.
며칠 사이에 물빛이 물결이 그리고 주위 모습이 변했다. 항상 머무는 것도 있으나 철따라 날아오고 떠나는가 하면 피고 지는 것들로 호숫가 풍경은 쉼없이 변한다. 물가의 초목과 철새들의 대화에 얼마나 귀를 기울였을까. 어찌 사람만이 자연을 느끼고 생각하겠느냐는 듯 백조 한 마리가 한 발을 날개 속에 감추고 외발로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이 묵상하며 서 있다.
가을은 둥글다. 마른 막대기 같던 어린 줄기는 싹이 트고 자라면서 세모꼴 네모꼴 마름모꼴… 꽃이 되었다가 열매가 되고 점점 가을 밤 달처럼 둥글어지고 만다. 봄부터 햇살과 별빛과 이슬과 소나기 구름과 바람소리 물소리 모든 천지의 숨결을 마시고 나면 둥근 나이테를 두른다.
더 이상 자기 속에 빈자리가 없어질 때까지 채우고 채운 모습 충만하고 매끄럽게 다듬어진 표면은 먼지조차 앉을 수 없이 깨끗하다.
날카로움이 없는 넉넉하고 평화스러운 것의 표상은 둥근 것이다. 달과 해의 태양계 원자와 생명체의 세포와 핵과 나뭇잎까지 모두 우주는 둥글다.
가을엔 나는 산이 되고 싶다. 그 위에 무겁게 앉은 바위가 되어 산비둘기 소쩍새 노래하며 날아드는 산골짝 물소리 바람소리에 모난 얼굴 둥글게 깎이고 싶다. 바다로 흘러 흘러가다 둥글고 예쁜 조약돌 다듬어 만지는 강물위에 부서지는 달빛이 되고 싶다.
가을밤엔 새로 얹은 초가집 지붕 위를 굴러 내리며 섬돌 밑 마른 땅을 두드리고 두드려 작은 웅덩이 하나 파내는 소나기가 되고 싶다. 바닷가 갈매기 찍고 간 발자국을 지우려 파도가 쓸고 미는 동안 둥근 진주하나 잉태하는 조가비가 되고 싶다. 멍석 위의 빨간 고추가 되어 봄부터 여름까지 부풀린 욕망과 허영의 물집을 말리며 투명한 가을 하늘 아래 누워있고 싶다.
넓은 인공호수는 공급 받은 깨끗한 물을 그대로 담아 고여 있기만 하지 않고 한 쪽으로 흘러내는 배수로가 있어 언제나 일정한 수질과 수위를 유지한다. 우리의 깊은 마음의 샘물도 행복과 고뇌 욕망과 사랑 미움으로 터질 듯 가두지만 말고 무거운 앙금으로 침전하기 전에 생각의 배수로를 만들어 비워내며 새로운 마음으로 채워야 하겠다.
이젠 텅 빈 가지 위의 까치밥이 되고 싶다. 가을이 준 숙제를 풀며 겨울이 어떻게 오는지 기다려 봐야겠다.
10-13-2010 '이 아침에'/미주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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