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굴 닮았니?

2009.06.30 06:23

이영숙 조회 수:51 추천:2



  요즘 할머니들은 참 힘드실 거다.  젊은 시절 자녀를 낳아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고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며 키워내셨다.  그렇게 키운 자녀들이 잘 자랐으니 이제는 고생에서 벗어나 편안한 노후를 누리며 행복만 가득히 안고 살아감이 마땅할 게다.  그런데 이 무슨 고생의 문이 다시 열리는가.  많은 젊은 부부들이 맞벌이를 하기에 자기들의 아이들을 할머니께 맡기고 있는 실정이다.  연세 들어 다시 시작되는 그 고생.

  우리 집안이라 다를 것이 뭐가 있을까.  나를 비롯해서 동서들이 모두 일을 가졌으니 아이들은 당연, 할머니 몫이 되고 말았다.  한 번씩 시댁을 가보면 완전 유아원이었다.  내 아이를 제외하고 4명의 꼬마들이 올망졸망 할머니 치마꼬리를 잡고 매달리는 모습이란.  그 무렵에 내 아이는 이미 다 컸으니.  다행이 내 아이는 혼자서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 하며 자랐다.  그 후에 동서들이 한꺼번에 아이를 맡기는 바람에 할머니 집이 유아원이 되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것이 아이들에게는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혼자나 아니면 둘이서 자라는 요즘 아이들이 할머니 집에서 사촌들과 함께 어울려 자라며 싸우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하면 일찍부터 사회를 배우는 과정이 될 수도 있음이니.  

  오래전, 어린 것들을 키우시며 힘들어하시던 시어머니가 하루는 찡찡 보채는 막내동서의 아이를 업고 잠을 재우시다가 짜증스럽게 하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얘는 외탁을 했나봐.  왜 이렇게 잠투정이 심한지 모르겠다.  우리 집에는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었는데.”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얼마나 웃음이 나던지.  하지만 어른 말씀에 웃을 수도 없고 그저 “네, 그런가보죠?”라고 말았다.  어른들은 왜 손주들의 나쁜 면을 보면 자신들의 집안이 아닌 상대편 집안을 닮았다고 생각들 하시는지.  뭔가 잘 하는 모습을 보시면 언제나 “제 아빠가 어릴 때 꼭 그랬어.”하시며, 잘 못하는 부분에서는 늘 ‘외탁’이라 말씀을 하신다.

  사실은 그것이 어른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게다.  나를 비롯하여 엄마 아빠들도 같은 마음이 아닐까.

  딸아이가 유난히도 정리정돈이 잘 되지 않는다.  요즘 아이들이 다 그렇다고들 하기지만 남의 아이들이 어떤지는 자세히 보지 못했으니 알 수 없고.  도대체가 딸의 방은 완전히 마구간이다.  방에 들어가 보면 가관이다.  옷은 벗어서 방바닥에 그냥  팽개쳐져 있고 책도 여기저기 옷과 함께 어울려 불협화음을 이룬다.  책상은 앉아서 공부할 공간이 없을 정도로 흐트러져 있다.  책상 앞에 앉을 자리가 없다.  그래서 딸이 요즘 공부를 잘 안 하나?  이런 지저분한 모습이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면 안 되겠지 하는 걱정에 정리 해 준다.  열심히 정리하다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자꾸 정리해주니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고.  하여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속만 끓인다.  

  남편이 한 번씩 미국에 오면 그 모습을 보고 짜증이 가득하다.  남편은 유난히 정리정돈이 깔끔한 성격이기에 더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습을 보면 남편은 늘 “제 엄마 닮아서 정리를 못해.”라는 말을 빼지 않는다.  문론 내가 남편만큼 깔끔하게 정리하는 성격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나도 꽤나 정리를 잘 하는 편인데도 남편은 늘 그런다.  

  딸이 어릴 때는 부지런히 무엇이던지 열심이던 아이가 사춘기 들면서부터 시작된 게으름이 지금까지 도대체 고쳐지려 하지를 않는다.  뭐든지 하기 싫어하고 게을러서 꾸물거리는 것도 속이 답답하다.  그럴 때 내가 하는 말이 있다.
  “너는 아빠를 닮아서 게으르고 잠도 많나봐.”
  사실 잠은 내가 더 많은데도 불구하고.

남편이 계속 같이 있지 않는 것이 나에게는 다행이다.  남편이 딸에게 “네 엄마를 닮아 그렇게 못하는구나.”하는 말보다 내가 딸에게 잘못된 것을 지적하며 “그건 아빠를 닮았기 때문이야.”라는 말을 더 많이 할 수 있으니.  이제는 딸이 무언가 잘못해서 내게 잔소리를 들을 때는 의례건 “누굴 닮아서 그렇겠어요?”라고 묻는다.  난 당연하게 “네 아빠를 닮아서 그렇지.”라 답하고.  

  사실 누구를 닮았겠나.  부부모두를 닮은 아이일터인데.  그럼에도 꼭 잘못하는 것을 보면 상대를 닮아서라고 생각한다.  잘하는 일을 보면 “얘는 어쩌면 나를 이렇게도 쏙~ 빼닮았을까.”하는 착각에 빠지게 되니.  그러나 착각은 자유라는데 누가 막으랴.



6/30/200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059 구두 한 켤레 한길수 2009.07.06 48
7058 두 세상의 차이 박성춘 2009.07.05 57
7057 피라미드-4행시 지희선 2009.07.05 46
7056 <font color=blue>훌쩍 새 박봉진 2011.02.02 90
7055 어머님 기일에/ 박영숙 박영숙 2009.07.04 63
7054 아부지 / 박영숙 박영숙 2009.07.04 34
7053 용기 줄 수 있는 방법 노기제 2009.07.04 60
7052 잭슨호수에 가면 오연희 2010.11.01 80
7051 피라미드 윤석훈 2009.07.02 48
7050 암이란 터널을 거의 빠져 나올 때 노기제 2009.07.02 50
7049 아빠의 젖꼭지 (동시) 박성춘 2010.02.17 51
7048 행복 값 이영숙 2010.02.19 60
» 누굴 닮았니? 이영숙 2009.06.30 51
7046 동물들의 합창 정용진 2009.06.30 40
7045 폭삭, 황금휴가 노기제 2009.07.02 54
7044 In Flanders Fields. 박정순 2009.06.28 53
7043 악플 / 석정희 석정희 2009.06.28 50
7042 모래성 최상준 2009.06.28 57
7041 삼삼하게 끓인 외로움 최상준 2009.06.28 61
7040 새는… 고대진 2009.06.29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