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저편의 아버지


                                        조옥동/시인

할리우드 포레스트 론 양지 바른 풀밭의 낯선 이웃 틈에 아버지가 홀로 누워계신다. 아버지와 나는 멀리 한국과 미국이라는 다른 세계에서 수 십 년 동안 소식이나 전하며 살았다.

30여년 전 가족이민을 온 후 겨우 세 번 아버지를 만났고 6년 전 네번 째엔 아버지의 유해를 안고 돌아와 이곳에 모셨다. 앞으로 얼마쯤 세월이 가면 어머니께서 옆에 함께 하실 것이고 더 지나면 우리 내외도 갈 곳이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아버지는 학비도 생활비도 보내지 않았다. 멀리 객지에서 공부하는 허약한 딸을 돌보기 위해 어머니께서 집을 잠깐씩 비운 틈에 아버지는 여자를 보았다. 종갓집의 장자로 대를 이을 아들을 얻겠다는 아주 그럴듯한 핑계가 있었다.

차츰 왕래가 뜸해지고 그 분은 아예 발길을 끊었다. 그전까진 나는 대가족 속의 귀여운 공주였고 사랑을 독차지한 딸이었다. 금지옥엽인양 아껴주던 아버지였기에 상처는 한층 깊었고 슬픔과 아픔은 원망으로 변했다.

내 아버지 같은 사람도 다른 여자에 마음을 뺏기고 하나밖에 없는 자식과 아내를 버릴 수 있다는 배신감으로 내 마음에 남자는 아예 믿을 수 없는 존재로 치부하게 되었다. 이런 가족적인 불행이 없었으면 아마도 나는 좀 더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을 것 같다.

가슴 졸이며 사랑의 불꽃을 태운다는 데이트를 나는 무조건 거부하며 심장이 얼어붙은 여자처럼 지냈다. 오죽하면 영하 13도란 별명까지 붙었을까. 이런 나에게 한 남자를 남편으로 주신 것은 온전히 은혜이며 행운이다.

허니문 베이비로 첫 딸을 낳았다. 그때만 해도 아들을 선호했던 어른들 때문에 계속 딸만 낳지 않을까 몹시 불안했다. 다행히 아들을 낳은 뒤에는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했다. 아들로 인하여 받은 기쁨과 행복이 얼마나 컸던지 아들이 자라며 간혹 나를 실망시킬 때에도 너그러워지려 했다. 딸들에겐 내 비칠 수 없는 속마음일 뿐이다.

언제나 후회하고 있을 때는 이미 무엇인가 귀한 것을 잃은 때이다. 아무리 효심이 깊다 해도 나를 낳으신 부모의 사랑을 뛰어넘을 수 없다. 자식을 낳아봐야 비로소 부모의 사랑을 진정 알게 됨은 진리다.

나를 아주 잊었다고 생각했던 아버지는 뜻밖에도 카메라를 들고 내 대학 졸업식에 나타나셨다. 그 분은 이미 나와 어머니께 용서를 바라고 있었다. 생각하면 한국전쟁 직후 그 시기의 형편에서 더욱이 시골벽촌에서 대전의 여학교에 딸을 입학시킨 일은 요즘 외국유학을 보낸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아버지의 그 결단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모든 것을 아버지 없이도 내 스스로 이룬 것같이 착각한 불효한 딸이다. 묘지를 내려오며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가 새롭다. 훗날 내 아이들도 부모의 사랑을 기억하며 이 길을 내려오리라.

〔 이 아침에〕 9-30-2010 미주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