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指紋)-------------------덴버
2009.10.11 11:18
지문(指紋)
이월란(09/10/11)
21년 전 구정이었겠다
태평양을 건너는 비자를 받아놓고, 티켓을 끊어 놓고
엄마는 말랑말랑 굳어가는 흰 떡가래 시루 앞에 나를 앉히며
떡을 썰으라 하셨다
내 어미 가슴 아래 웅크린 생애 마지막 명절이었다
이뿌게 썰거래이, 한석뽀이 엄마처럼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던 삶이 썰어내기 좋을만큼 굳어졌을 때를
엄마는 정확히 알고 계셨다
짓물러가는 가슴살을 현실의 날로 썰어내야 할 때를 분명히 알고 계셨다
덜 굳었다면 떡살이 날을 물고 늘어질 것이며
너무 딱딱하다면 아무리 날선 칼도 돌처럼 굳은 기억을 깎아내진 못할 것이다
어쩐지 잘 썰린다 했다
잘려나가는 떡조각들은 생의 바다 한 가운데로
정처없이 버려지는 유년의 짧디 짧은 날들
똑깍똑깍 썰다 나는 왼손 검지 손톱 밑을 칼끝으로 찍고 말았다
가고나모 천날 만날 눈에 밟힐낀데 밟을거 모지라까바
살점까지 썰어놓고 가는기가
손가락을 싸매주시며 내 전신에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하시던 손
지금도 남아 있는 반달모양으로 잘린 검지끝 지문이
내 가슴의 현주소를 묻는 지문감식대 앞에 설 때마다
잘린 기억의 강처럼 흐르다 잠시 멈춰
나를 식별해내는 몸끝 살갗의 무늬
지문보다 더 깊게 골진 칼자국에 일별을 던지는 것인데
댓글 0
|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 7359 | 허공에 쓰는 편지 | 노기제 | 2009.10.11 | 42 |
| » | 지문(指紋)-------------------덴버 | 이월란 | 2009.10.11 | 46 |
| 7357 | 수신확인 2 | 이월란 | 2009.10.11 | 57 |
| 7356 | 닥터 토비(견공시리즈 38) | 이월란 | 2009.10.11 | 62 |
| 7355 | 멍키, 학교에 가다 | 이월란 | 2009.10.11 | 40 |
| 7354 | 노벨문학상 유감 | 황숙진 | 2009.10.11 | 46 |
| 7353 | 불꽃처럼 나비처럼 | 박정순 | 2009.10.10 | 46 |
| 7352 | 천사와 악마 (Angels and Demons) | 박정순 | 2009.10.10 | 42 |
| 7351 | Black | 박정순 | 2009.10.10 | 54 |
| 7350 | 미안하다. 미안해. | 성민희 | 2009.10.09 | 53 |
| 7349 | 나는 날마다 운다 | 장정자 | 2011.07.29 | 51 |
| 7348 | 절대로 이해 못 할 일 | 성민희 | 2009.10.06 | 44 |
| 7347 | 어제는 자유 | 이월란 | 2010.10.29 | 80 |
| 7346 | 사각지대 | 이월란 | 2009.10.05 | 59 |
| 7345 | 혼자 노는 사랑(견공시리즈 36) | 이월란 | 2009.10.05 | 56 |
| 7344 | 한인 영문소설에 나타난 민족 혼의 신화적 가치 (2) | 박영호 | 2009.10.05 | 52 |
| 7343 | 당신은 지금--------------------덴버 | 이월란 | 2009.10.05 | 39 |
| 7342 | 만추(晩秋) | sonyongsang | 2012.10.23 | 66 |
| 7341 | 중국 바로알기 | 김우영 | 2013.03.07 | 50 |
| 7340 | 성탄 아기 | 지희선 | 2013.03.06 | 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