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무엇을 두려워하나
2010.09.11 02:29
시인들은 용감하다. 용감한 시인들의 시는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며 머리에 충격을 가해 온 몸을 떨게 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시인들은 감옥도 가난도 혹은 명성까지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시와 하나된 그들의 삶과 온 몸으로 쓰는 그들의 시를 경외의 눈길로 바라보고 또 읽는다. 독자들까지 연병장에 새워놓고 “차렷, 열중 쉬엇, 차렷,…” 하며 길들이겠다고 하는 시인이 있고 보면 정말 시인은 두려워하는 것이 별로 많지 않은 사람들인 것 같다.
이런 용감한 시인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정말 있을까? 마누라? 그건 시인뿐만 아니라 결혼한 모든 남자에게 해당된 것이고 남녀 시인들이 두려워하는 대상 말이다. 누구도 대놓고 이것이 시인의 약점이다 라고 하지는 않지만 ‘시인이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수학이며 과학과 관계된 과목이고 수학자 혹은 과학자다 ‘라고 한다면 잘못된 관찰일까? 혹시 시인들 가운데 자녀들이 수학이나 과학에 관한 질문이라도 하면 나 지금 무척 바쁘니 엄마에게 물어보아라 혹은 내가 학교 다닐 땐 그런 거 안 배웠는데 아빠에게 물어보아라 하며 미룬 적은 없는지?
과학을 잘 못한다고 시인들이 과학자 앞에서 너무 주눅들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많은 과학자들도 시인은 신선이나 도사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서로를 두려워하는 이 두 집단은 서로에 대한 무섬증 때문에 과학은 … 혹은 시 혹은 문학은… 하며 서로를 경계하고 비판하기에 바쁜 것 같다. 하지만 깊이 들어가면 수학과 과학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이 –그렇다. 과학에서도 아름다움이란 말을 쓴다 – 시에서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얼마나 닮았는지 모른다.
이승훈 시인의 시론에 의하면 과학자는 사물의 추상적 체계를 논리적으로 연구하고 시인은 상상력에 의해 새로운 사물의 세계를 감성적으로 수용한다고 한다. 과학이 이성적 논리적 추상적 세계를 지향하고 시는 상상적 감성적 구체적 세계를 지향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다른 시인들의 이론도 이와 비슷하다. 하지만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말하건대 이는 잘 못된 관찰이다. 시도 시인의 감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구성과 전개가 있어야 하고 과학도 구체적이고도 풍부한 상상력이 없이는 새로운 이론이나 연구다운 연구가 나올 수 없다. 시인의 상상력이 구체적인 이론으로 열매 맺을 때 비로서 과학다운 과학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에게 최대의 찬사는 당신의 연구의 결과가 참 아름답다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시인의 과학에 대한 두려움은 이상옥시인의 <바이오테크시대의 과학자와 시인>이라는 평론에 잘 나와있다. 이 시인은 바아오테크 시대는 과학과 시의 쟁투장이 될 것이라고 하며 사와 과학이 불화하면서 시인은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과학자의 발목을 붙잡을 거라고 한다. 더 나가 인간 지놈푸로젝트 등의 생명, 유전공학과 시는 더욱 불화함으로 과학을 추문화할 것이라고 한다. 그는 과학자들은 스스로 신이 되려 하는 교만한 자이고 시인은 자신의 몸을 스스로 낮추고 양지보다 음지를 향한다고 한다. 아마도 많은 시인들이 이 말에 동의하는 듯 하다.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이론이 처음 발표했을 때도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시인이 과학을 모르거나 피상적인 지식에 의존해 과학을 두려움으로만 대한다면 닫힌 마음을 가졌던 그리하여 지금은 웃음거리가 되는 중세기 종교 지도자들과 다름이 있을까?
시인은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아니 몰라야 하는 사람이다. 모든 영역을 열린 마음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현대 과학을 통하여 상상력을 넓히므로 시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 용감한 시인이 해야 할 일이다. 물론 장석주 시인의 “시와 과학은 서로를 돕는 이란성 쌍둥이다” 라는 글에 나와 있듯이 과학도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그들의 영역을 넓힌다.
시인들의 구체적인 두려움의 예로 숫자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해보자. 이는 큰 숫자 혹은 작은 숫자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상은 이 두려움을 극복하려 했던 시인이다. 시인 이상은 당시 최신의 과학 정보를 배웠던 공학도였다. 물리학 시간을 통해 당시로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상대성원리’도 배웠을 것이다. 수학은 그가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언어였고 그러기에 그의 시에는 수학적 부호와 용어가 많이 나온다. 이상은 그의 일련의 시 <선에 관한 각서>에서 우주의 크기를 (우주는멱에의하는멱에의한다) 라고 표현한다. 우주의 크기는 대략 137억 광년이라고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1.37x10^10 광년이라 쓰고 10의 10멱 혹은 10승으로 읽는다 (주: 10^10 은 1에 0이 열개가 있는 숫자 즉 100억을 말한다). 관측 가능한 우주에 는 약 천억(10^11) 의 은하가 존재하고 각각의 은하에 약 천억(10^11) 개 정도의 별이 존재함으로 우주 안의 은하 수와 각 은하에는 약10^22개의 별이 존재하는데 이 숫자는 (10^11)^2 으로 멱의 멱으로 표기해야 쉬운 것이다.
숫자가 이렇게 멱의 멱으로 되면 그 크기를 느낄 수 없으므로 감성적 수용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시인은 (사람은숫자를버리라) 라고 한다. 무슨 말이 필요한가? 그래서 숫자를 적는 매트릭스에 숫자대신 점으로 채우고 그 커다란 우주의 크기 앞에 선 자신을 전자의 양자라고 한다. 원자의 크기가 100억 분의 1 미터 즉 10^(-10) 미터이고 그 속의 전자의 크기는 약 10^(-18) m, 양자의 크기는 1000조 분의 1 의 0.9 배 즉 10^(-15) 미터 즉 원자의 크기의 10만 분의 1 (10-5) 이다. 전자에는 양자가 없지만 전자를 원자라 하고 전자 속에 양자 같은 작은 입자가 있다고 상상하면 (틀린 상상이지만) 전자의 양자의 크기는 10^(-18) x10^(-5) 이 되어 10^(-23) 미터 정도의 크기니 (고요하게나를전자의양자로하라) 라는 시인의 말은 이 엄청난 수의 대비에서 나는 無와 같다는 말이 된다. 이상은 이렇게 숫자를 시어로 변형함으로 크기의 감성을 표현하려 한다. 물론 이상 시대에는 우주의 크기나 양자의 크기가 지금같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단위의 크고 작은 정도는 알려져 있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과학도의 느낌을 얼마나 독자들에게 전달 할 수 있었는가가 문제이다. 그는 독자를 포기한 듯 전혀 배경에 대한 설명이 없다. 독자에게 숫자를 버리라고 하면서 자신도 독자를 버린 것이다.
선에관한각서 1(線에關한覺書 1) <이상>
1 2 3 4 5 6 7 8 9 0
1 • • • • • • • • • •
2 • • • • • • • • • •
3 • • • • • • • • • •
4 • • • • • • • • • •
5 • • • • • • • • • •
6 • • • • • • • • • •
7 • • • • • • • • • •
8 • • • • • • • • • •
9 • • • • • • • • • •
0 • • • • • • • • • •
(우주는멱에의하는멱에의한다)
(사람은숫자를버리라)
(고요하게나를전자의양자로하라)
…중략
시인과 과학자를 겸할 수 있는가? 과학을 시로 만드는 것이 가능한가? 이상의 시에서 보다시피 과학을 소재로 하는 시는 다른 시에서 필요가 없는 배경을 어디선가 설명해야 한다. 독자와 시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자체가 차지해야 하는 양이 너무 많아 짧음이 특징인 시에는 걸맞지 않다고 생각하고 기 이상 같은 시인은 설명 없이 과학시를 발표한 것 같다. 물론 이러한 시는 난해시란 레이블이 붙고 독자들을 쫓아낸다.
이런 면에서 과학자이자 시인인 마종기 시인은 시에 과학을 다루면서도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그 예를 들어보자. 지구의 나이는 약 46억년이라고 생각하는데 400만년 전을 인류의 시작으로 추정한다. 현생 인류는 약 30만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현생 인류의 화석은 12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 살았던 사람의 화석이다. 마종기 시인은 그 사실을 시의 부분 ‘잡담’에 포함시킴으로 먼저 독자에게 과학적 사실을 제시하여 시를 읽을 준비를 시킨 다음 그의 시를 전개한다. 잡담을 길들이는 것이다. 30만년의 인류 진화의 역사를 시에 담았음에도 하나도 어렵지 않게 가슴에 전달되는 것은 이런 구조를 이용한 배경 설명 때문이다.
잡담 길들이기 2 <마종기>
--얼마 전 고고학자들이 찾아낸 부서진 뼛조각을 연구하다가, 그것이 30만 년 전쯤 에티오피아의 물가에 살던 최초의 유일한 인간이었고 여자였음을 밝혀내고 루시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번에는 지질학자 팀이 남아프리카의 남서쪽 해안 가에서, 11만 7천 년 전에 살았던 여자의 발자국을 암반에서 찾아내고 이것이 제일 오래된 인류의 발자국인 것을 증명했다.--
루시는 혼자 물가를 걸었다.
작고 큰 물고기와 물장구도 치고
풀잎을 나물 삼아 뜯어먹으면서
아프리카 서쪽 해안을 따라
18만 3천 년쯤 걸었다.
꽃물을 짜서 얼굴을 씻고
튼튼한 유방을 햇살로 키워도
칼날 같은 밤에는 소리 죽여 흐느끼고
적막한 수평선에서 벗은 몸을 떨었다.
그 흐느낌과 떨림이 유전인자로 남았다.
1미터 58의 키와 작은 손과 발로
아프리카 당이 끝나는 물 속에서 드디어
루시는 남자를 만났다.
또 11만 7천 년쯤이 지나갔다.
나도 물가에서 루시를 만났다.
인간 지놈푸로젝트등의 생명, 유전공학 등의 과학의 발달은 시인을 두렵게 한다.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 또는 기술이 지배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누구에게 없으랴. 더구나 현대과학과 컴퓨터의 발달은 속도를 더해가고 시인들은 그 속도에 멀미하여 달리는 지구에서 내리고 싶어한다. 그들은 과학자들이 모든 지식을 파악하여 스스로 신이 되려 한다고 하면서 무서워한다. 그리고 공포의 대상으로 규정한다.
1967년도에 씌어진 클라크의 단편 ‘90억가지 신의 이름’ 에서 이 두려움을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 이야기는 티베트의 수도승이 티베트의 글자로 가능한 90억의 모든 신의 이름을 티베트 사원에 와서 작성해달라고 컴퓨터회사에 용역을 맡기는 데서 시작한다. 신들의 모든 이름을 목록으로 작성하면 신의 목적이 완성되고 인류는 더 이상 수행할 일이 없어진다고 믿는 라마승들. 이들의 용역을 맡아 일하던 두 컴퓨터과학자들은 목록이 거의 끝나갈 무렵 결과가 실패할 것 같아 도망가는데 목록이 완성될 시간이 되자 하늘의 별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을 본다는 스토리이다. 정말 과학이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때가 오면 신의 영역이 없으므로 소설처럼 하늘의 별들같이 시와 문학이 모두 사라질까? 지금이 그 때인가?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필자의 경험으로는 하나를 설명할 수 있는 과학적 사실이 발견되면 거기에서 열 개의 새로운 모르는 것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인간 지놈푸로젝트가 완성된 뒤 몇 년이 지났지만 거기서 우리가 얻은 것은 엄청나게 쏟아지는 과학적 질문들이다. 이를 하나씩 해결하려면 아마 몇 백 년이 걸릴 것이고 또 하나를 해결할 때마다 열 가지 새로운 질문이 생겨 인간이 모르는 것은 점점 늘어나기만 할 것이다.
진정한 과학은 과학자들을 교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겸손하게 만든다. 아무리 별을 세고 우주를 연구해보아도 과학이 측정할 수 있는 우주는 아주 작은 부분이며 나머지는 모두 알 수 없는 물질들. 우리는 이를 암흑 물질이라 부른다. 나희덕시인은 <어둠이 아직> 이란 시에서 이러한 과학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
그러니 시인이여 과학자를 두려워 말자. 그들은 자신이 알 수 있는 지식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가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작은 과학자가 밤 잠을 설치며 과학적 사실을 찾는 일은 겸손한 시인이 잠을 못 이루며 한 줄의 시를 만드는 일과 다름이 없다.
어둠이 아직 <나희덕>
얼마나 다행인가
눈에 보이는 별들이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암흑 물질이
별들을 온통 둘러싸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어둠을 뜯어보지 못했다는 것은
별은 어둠의 문을 여는 손잡이
별은 어둠의 망토에 달린 단추
별은 어둠의 거미줄에 맺힌 밤이슬
별은 어둠의 상자에 새겨진 문양
별은 어둠의 웅덩이에 떠 있는 이파리
별은 어둠의 노래를 들려주는 입술
별들이 반짝이는 동안에도
눈꺼풀이 깜박이는 동안에도
어둠의 지느러미는 우리 곁을 스쳐 가지만
우리는 어둠을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못하지
뜨거운 어둠은 빠르게
차가운 어둠은 느리게 흘러간다지만
우리는 어둠의 온도와 속도도 느낄 수 없지
알 수 없기에 두렵고 달콤한 어둠,
아, 얼마나 다행인가
어둠이 아직 어둠으로 남겨져 있다는
것은
시인의 시작 노트: 천문학에서는 은하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을 ‘암흑 물질(dark matter)’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없거나 알 수 없는 존재들에 대한 겸허한 긍정이나 고백인 셈이다. 알 수 없음에서 출발해 미지의 어둠을 항해한다는 점에서 시인과 천문학자는 비슷한 운명이다. 그나마 어둠의 문을 열 수 있는 것은 하늘에 드문드문 빛나는 별이 있기 때문이다. 별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어둠이라는 배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존재라는 점에서 더욱 빛난다. 인간이여, 끝내 알게 되지 않기를. 암흑 물질이라고 이름 붙일 수밖에 없는 세계에 대하여. 별은 그 탕진되지 않는 어둠 속에서 영원히 빛날 것이니!
미주문학 2010 가을호
댓글 0
|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 8119 | 하느님께 올리는 연서(편지) | 지희선 | 2010.09.13 | 52 |
| 8118 | 공동제 수필-<나의 글쓰기> | 지희선 | 2010.09.13 | 41 |
| 8117 | 흘러가기 | 윤석훈 | 2010.09.12 | 50 |
| 8116 | 슬픔은 강물처럼 | 김수영 | 2010.09.11 | 44 |
| 8115 | 삶은 곧 예술이다/'이 아침에'(미주중앙일보) | 조만연.조옥동 | 2010.09.11 | 52 |
| 8114 | 걸으며 생각하며 | 김영교 | 2010.09.11 | 48 |
| » | 시인은 무엇을 두려워하나 | 고대진 | 2010.09.11 | 48 |
| 8112 | 울음 요법 | 김수영 | 2010.09.11 | 49 |
| 8111 | 고행을 생각하다 | 박정순 | 2010.09.09 | 50 |
| 8110 | 인셉션 | 박정순 | 2010.09.09 | 49 |
| 8109 | 물청소 | 정용진 | 2010.09.08 | 50 |
| 8108 | 카츄마레이크 | 구자애 | 2010.09.07 | 61 |
| 8107 | 실낱같은 인연 하나 | 최상준 | 2010.09.07 | 55 |
| 8106 | 코스모스 | 김수영 | 2010.09.07 | 55 |
| 8105 | 어떤 귀가 | 정찬열 | 2010.09.07 | 59 |
| 8104 | 국화꽃 향기 속에서 | 김수영 | 2010.09.08 | 42 |
| 8103 | GI 신부 | 이월란 | 2010.09.06 | 40 |
| 8102 | 묘지의 시간 | 이월란 | 2010.09.06 | 54 |
| 8101 | 해체 | 이월란 | 2010.09.06 | 51 |
| 8100 | 편지 4 | 이월란 | 2010.09.06 | 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