깍두기 별 / 김영교
2011.08.11 01:44
깍두기 별
오래전 이야기다. 나를 무척 따르던 에스터란 이름을 가진 친구 딸이 앓고 있는 나를 생각해서 SAT시험 준비에 바뿐 데도 굴까지 넣고 담군 깍두기 한병을 가져다주었다. 입맛 없는데 곰국에 밥 말아 먹고 어서 나으라 했다. 감동으로 글썽였고 그 눈물은 열 오른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어 내려 나는 쾌차되었던 적이 있었다. 전화 통화만 여러 번 그 후 일상의 빠른 물살 속을 헤엄치던 나는 앞만 보고 허우적댔다. 남편의 직장 따라 서울로 주거지를 옮긴 친구, 자연스럽게 깍두기의 고마움은 멀어져 갔고 가끔 에스터 생각은 어느 대학으로 진학했을까 하는 정도였다. 에서터의 깎뚜기는 흘러간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옛날을 가끔씩 묶어 줄 뿐이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감동하기를 잘하는 내 가슴은 감격의 분출물로 가득차곤 했다. 습작기간 내면의 세계에 몰입해 있다가 탈고의 순간에 솟아나는, 카타르시스며, 아름다움을 만날 때면 희열의 물줄기가 저절로 밖으로 흘러나온다. 촉각이 민감하게 날을 새워 열린 감성과 합세하여 박수치며 반응하곤 했다. 지속되는 불경기 스트레스에 움출어 들고 무디어진 요즈음이 아닌가 싶어 글쟁이 이래도 되나 의아할 때가 많다. 문득 에스터의 깍두기 감동이 그리워졌다.
오늘 같이 지쳐있을 때 눈 감으면 조용히 찾아오는 감동의 기억들이 있다. 수집은 듯 피부에 와 닿는 스위스의 미풍과 그 맑은 호수, 또 장엄한 융 프라우가 가슴이 저리도록 아름다웠다. 겨울 바다위로 붉게 숨어드는 일몰을 지켜보면서 집안 가득 넘실대는 바하나 모자르트는 감동의 경지를 초월하여 흐르는 눈물 속에서 가짜 나의 껍데기를 허물 벗기곤 했다. 한 인간이 지닌 숭고한 영혼이 신의 영원한 사랑을 설파하는데 그토록 진지할 수 있고 심혈을 다 쏟을 수 있었던 것은 영혼구원을 그의 삶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 었다. 전문적인 지식과 학벌 그 모든 것 내려놓고 선교에 헌신한 이용규교수의 <내려놓음>는 문필로서 진리를 끌어내어 영혼을 흔들어 주었다. 완벽하게 진실을 엮어 짯기에 문학성이 놀라웠다. 몽고를, 한국을, 온 인류를 울리는데 그의 진실은 관통하고 만 것이다. 감동의 원천은 바로 여기에 있다. 눈물은 아름다움과 진실 앞에 더 없이 맑게 피고 어둠을 몰아내는 반짝이는 별로 떠오른다.
로마서 8장과 12장, 데살로니가 전서 4장 5장을 외우시는 실명하신 노모님이 계시다. 좔좔 외우시는 저물어 가는 나날을 말씀으로 견디시는 어머니, 에서터의 ‘죽으면 죽으리라’가, 말씀을 외우게 하신 성령님의 의도가 바로 이 절대위기, 이 실명의 이때를 위함이 아닌가 하고 어머님은 알고 계셨다. 어머니는 암송, 나는 성경을 읽으며 하기사 기억력이 똑똑하신가 나는 점검 차원에서 읽어내려 갔다.
<에스터>를 깊이 알고 싶어 졌다. 구약의 “에스터”는 과연 어떤 여자일까. <에스터>서를 읽으며 멤 돌았다. 결국 나를 감동시킨 에스터의 깍뚜기 에피소드는 나에게 <성서>라는 냇가로 가는 지도를 펼쳐주었고 어머니로 하여금 <에스터>와 더 가까워지도록 차표 역할을 한 셈이다. 새로운 눈뜸이었다. 목이 추겨지고 가슴에 일던 모래바람이 잔잔해지고 있었다.
원래 <에스터>는 별이란 뜻으로 구약성서 가운데 <릇기>와 더불어 유일하게 여자 이름을 주제로 삼았다. <에스터>란 미모의 한 유대여인이 페르시아 황후로 선택된다. 관찰해 보면 <에스터>서에는 교리도 또 신학도 없으며 율법이나 죄에 대한 말은 더 더욱이 없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여러 가지 사실들이 있어 우리들 마음속 깊이 간직된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대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터 4:16) 모르드게에게 회답한 에스터, 목숨을 건 결단의 대사가 가슴을 감동으로 젖게 만든다.
짧지만 <에스터>는 나를 반성으로 몰고 간다. <에스터>서는 조국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애족 애국심을 고취시켜주는 역할에 큰 몫을 한다. 역사의 해빙기는 우리를 향해 손짓한다. 조국분단의 아픔일랑 아랑곳 하지 않은 체 혈육이별의 슬픔마저 외면하지나 않았는지. 돈과 물질이 모든 면에서 척도가 되는 풍조에 정신마저 물들지나 않았는지.
베르린 장벽이 사라졌고, 호응해서 여기저기 흑암의 장막이 무너질 조짐의 바람, 불고 있다. 기아선상에 있는 많은 이북 어린이 생각, 그 가난은 38선 만큼이나 슬프다. 내일의 주인공들, 굶주리고 병들어 미래가 안 보이는 게 비극이다. 쌀가마가 바다를 건너고 밀가루 포대가 산을 넘고 황량한 들판을 돌아 이남의 소들이 월북, 개성공단이 돌아가고 국수공장 가동 뉴스도 접한다. 가진 의술이나 지식을 베풀며, 받은 생명을 나누는 것은 창조 섭리에 함께 참여하는 일이다. 이미 우리는 생명권에 선택된 자녀들이기에 주는 자 쪽에서 누리는 기쁨이 더 크지 않는가.
“에스터”는 슬기롭다. 멸사순국의 애국정신, 희생정신, 결단성과 용기의 여인으로 간주된다. 말하자면 21세기에 적합한 여인상이다. 그녀는 맡겨진 중대한 과업을 침착하고 재치 있게 성취해 나간다. 역사의 물줄기 흐름을 바꾸어 놓은 어제의 “에스터”, 오늘은 우리 주변을 어둠에서 빛으로 삶의 방향을 옮겨 놓는데 필요하다. 구원역사는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다. 친구 딸 “에스터”야 말로 좋은 예다. 대학에서 가정과를 나온 엄마와 서울 공대를 나온 아버지* 딸, 그녀는 어딜 가던지 주위를 행복하게 만드는 피스 메이커다. 정성 다해 담군 깍두기로 아픈 이웃을 위로 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이야 말로 바로 작은 의미의 애국 애족이 아닌가 싶다. 크고 작은 무우 한알 한알이 믿음과 화목과 희생의 개체로 존재하다가 사랑이란 양념으로 잘 버무려져 -나는 죽고 너 깎두기로 큰 하나의 맛이 되는 의미- 또 다른 목적과 그 성취, 동참한 숨은<에스터>의 진실된 사랑의 맛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 역시 미세한 지체임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을 주어 가슴이 잔잔하게 행복해했다.
내 가슴이 어두울 때 마다 만나러 가는 <에스터>, 그 별은 내 가슴에서 더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있다. 깍두기 처방으로 내 병을 고쳐준 에서터는 두 자녀의 엄마별이 되어 남가주에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고 있다. 깍두기별, 가는 곳마다 빛나고...
* 서울서 등산하다 심장마지로 돌아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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