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향기 '에스프레시보'/'이 아침에' 미주중앙일보
2011.11.12 22:22
11-12-2011 '이 아침에'
가을의 향기를 ‘에스프레시보’ 하게
조옥동/시인
간밤에 내린 늦가을비로 맑게 씻긴 낙엽을 따라 길을 나섰다. 낙엽 밟는 소리를 프랑스 시인 구르몽은 영혼처럼 운다고 했었지.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그의 소리가 내 옆에 다가와 속삭인다.
어느 시인은 마른 가을 잎이 지는 때를 기다려 자신의 비옥한 시간을 가꾸기를 바라며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호소하고, 어떤 이는 가을비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사랑하는 이를 위해 한 송이 들국화를 피우고 싶다 했고, 오솔진 숲속을 헤매며 떨어진 나뭇잎과 굳어가는 나무줄기를 어루만지던 시인은 “상처 없는 영혼이 있을까요” 흐느끼며 조용히 마음의 맨 밑바닥을 쓸어내린다.
꽃씨를 심은 봄, 잉태했던 우리의 희망은 무성한 여름의 푸르른 날들을 지나서 “가을 날, 빈손에 받아 든 작은 꽃씨 한 알”을 얻는다. 폭풍과 장대비에 쓸리고 떨어져 하마터면 정말로 빈손이 될 뻔도 한데 귀하게 얻은 그 작은 열매 속에 품은 뜨거운 노을의 입김과 뭇 새들의 노래와 익을 대로 익은 그리움과 외로움의 눈물을 읽는다. 눈시울을 적시는 고마운 계절, 모두 낮은 데로 내려앉는 낙엽을 따라 시선을 낮추면 마음까지 비우고 겸허해진다.
가을이란 향기를 나누려 이리 저리 닿고 싶은 계절, 여행을 훌쩍 떠나기도 한다. 가을은 우리의 감각세포들이 아주 예민하게 깨어나는 계절 같다. 그래선지 가을엔 문학, 음악과 미술 등 갖가지 문화행사가 연속으로 이어져 굳어진 정서를 자극한다.
오랜만에 걸친 버버리코트 주머니에서 지난 가을에 갔던 음악회의 묵은 초대장이 나왔다. 손에 잡힌 작은 음악회가 기억에 새롭다. 영혼을 두드리며 다가오는 클래식 음악은 마치 데스밸리의 팍팍한 모래벌에서 선명한 빛깔로 피어나는 사막의 꽃처럼 아름답다. 불멸의 명곡을 남기기까지 대부분 음악가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영혼을 사르며 꽃을 피워냈다. 훌륭한 음악을 들을 때마다 작고가나 연주자, 그들의 열정이 졸리운 감성을 깨우 듯 선율은 공명을 일으켜 청중의 몸속에 퍼진다.
한국의 중진 수필가인 친구가 ‘음악의 에스프레시보’란 자신의 에세이집을 보내왔다. 그 속에서 위대한 음혼들을 만나게 되니 이 가을이 나에겐 더욱 풍성하다.
며칠 후면 윤동주, 이상화, 이육사, 한용운 등 민족시인들을 기리는 행사가 다가온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기까지, 국권을 잃은 조국의 모습을 보고도 남들이 입술을 다물고 있을 때 그들은 우리의 언어조차 말살 당했음에도 결연히 일어서 애통하고 비탄하는 민족의 혼을, 사랑과 꿈을 우리의 말로 쓰고 노래하였다. 그것이 죄가 되어 감옥에 갇히고, 심지어 생체실험 끝에 목숨까지 잃었다. 우리 한자리에 모여 그들의 시혼과 영혼을 부르며 올 해는 갈대마저 흐느끼는 달 밝은 이 가을밤을 기념하려한다.
에스프레시보란 ‘표현력 풍부하게’라는 뜻이다. 음악과 문학 미술 등 예술인은 물론 감상하고 공감하는 모든 이들이 에스프레시보 하게 풍요한 가을의 향기를 나눠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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