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오늘 저녁엔 한번 찬찬히 살펴 보시길  

봄비 스스스 내리는 저녁무렵 
혹시 당신 양복 뒷단을 
희고 찬 낯선 손이 몰래 다가와 
살며시 잡아당기지는 않는지  

혹시 당신 아파트 문 위에 
손톱자욱이 나 있지는 않은지
자동응답기에 숨죽인 흐느낌이 
녹음되어 있지는 않은지 
당신이 시내로 들어가는 전철을 기다리면서
일간지에 코를 박고 있는 동안, 그리곤
불밝은 전동차 안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들어가는 동안,
혹시, 건너편, 시외로 빠져나가는 플랫폼
어두운 한구석에 숨어서 한 여자가 당신을 
막막히 애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그녀가 가슴을 불어가는 바람을 견디느라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참고 있지는 않은지  

당신이, 문밖으로 쫓아 버린 여자 
당신이, 도시에서 살기 위해서 잊어버린 여자  

그 여자, 당신의 일상이 잊어버린, 그러나
어쩌면 당신의 영혼이 아직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김정란 (1953 -  ) 「건너편의 여자」전문
  이 글을 읽는 독자가 남자라면 '건너편의 여자'는 언젠가 버려버린 여자를 먼저 떠올릴 수도 있고, 여성 독자는 잊고 지내고 있는 자신의 자아를 생각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잊을 수 없는 옛사랑의 그림자, 차가운 도시에서 잃어버린 따스한 사람의 입김 등으로 한용운의 '님'처럼 다양하게 해석해볼 수 있는 여자. 건너편의 여자. 내 초라한 영혼까지도 사랑해줄것 같은 '그 여자'를 잃어버린 상실감이 오늘 저녁 우리를 한없이 쓸쓸하게 한다.

*** 11

잠이 든다 생각해 봐, 마음을 아주 편하게, 눈도 귀도 모두 닫고, 그렇지 숨도 고르게,

- 전생은 무슨 새였다지? 부리 끝이 바알간....

어느 아득한 봄날 나는 키 큰 나무였다네
비듣는 저물녘을 너 지쳐 날아가다
그 나무 둥지 속에서 비를 긋고 갔었는지?

     이승은 (1958 - )「최면」전문

잠이 든다 생각해보시라.

그리고 전생에 무엇이었는지 더듬어보면, 우리 오래 전에 한번쯤 새와 나무로 잠시 만났던 기억이 날지도 모른다. 비오는 저물녘 그 스산한 추위와 비바람을 가려주던 나무, 지친 날개를 쉬면서 먼 나라의 얘기를 들려주던 철새로 다시 한번 만나는 경험을 가져보시라. 다시 만나게 된다는 기약도 없이 훨훨 날아가버리기 전에....

이승은 시인은 비교적 젊은 편이지만 이미 1979년에 문공부주최 전국민족시 백일장에 장원으로 등단해서 약 25년 동안 시조를 써온 작가이다. 짧은 시에 이만한 세월을 담아낼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런 연륜의 결실일 것이다


*** 12

1947년 봄 
심야(深夜) 
황해도 해주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김종삼 (1921 - 1984)「민간인(民間人)」전문
김종삼 시인은 작가의 말을 아끼는 간결한 시를 주로 썼다. 
위 시에서도 간단한 상황만을 그리고 해석은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1947년 심야에 초병을 피해 월남하고 있는 몇 사람 중엔 영아가 끼어있었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래서 모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 영아를 물에 빠트려 죽이고 만다. 
그 때로부터 스무 몇 해가 아니라 쉰 몇 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분단은 여전하다. 아이를 어쩔 수 없이 죽이고 목숨을 구한 사람들의 가슴에 흐르는 강물의 깊이를 누가 알랴. 황해도 해주 앞바다 그 수심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 13

새 해가 되었다고
새 사람 되어지는 것도 아니지.
새해란 한 발 더 죽을 준비를 해야 하는 때,
여보게 친구 죽을 준비가 되어있는가
서둘러 준비해야지 살아있는 동안
친구야, 남는 건 친구와 아내라더라
올해는 죽마고우 관포지교 찾아보며 살아보세나
기름만 넣고나면 떠나가는 친구, 주유소 친구
그런 친구 말고
걸어가도 좋으니 같이 갈
그런 친구 되어주며
살아보세나 올해는 그런 맘으로
그렇게 살아보세나

   임창현  (1938 - ) 「할아버지 그리고 우리들을 위한 시」부분
죽마고우, 관포지교를 얘기하다 갑자기 현대로 뛰어넘어 주유소 친구라니 어리둥절하다. 조금 더 읽어보면 아하 주유소 친구란 기름만 넣고 떠나가는 친구, 자기 실속만 챙기는 사람을 가리키는 거였구나 하고 웃게 된다. 시인은 새해엔 죽을 준비를 하라고 한다. 그 준비란 주유소 친구가 아닌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고 또 그런 친구를 만드는 거란다. 시인이 시로 들려주는 설날 덕담이다.


*** 14

이대로 끝장났다 아직은 말하지 마라
대가리에서 지느러미, 또 탱탱 알 밴 창자까지
한 소절 제주사투리, 그마저 삭았다 해도. 

자리라면 보목리 자리, 한 일년 푹 절여도
바다의 야성 같은 왕가시는 살아 있다.
딱 한 번 내뱉지 않고는 통째로는 못 삼킨다. 

그렇다. 자리가 녹아 물이 되지 못하고 
온 몸을 그냥 그대로 온전히 내놓는 것은
아직은 그리운 이름 못 빼냈기 때문이다.

                오승철 (1957 - )「자리젓」전문

오승철 시인은 제주에서 낳고 자라서 현재도 그곳에서 살고 있는 제주도 토박이다. 

그는 제주도에 오름이 몇 개 있고 어느 동굴에 4.3의 한이 서늘하게 남아 맴돌고 있는 지를 낱낱이 알고 있다. 파도 소리에 떠오르는 어머니의 숨비소리와 이어도 노래에 이 섬의 여인네들이 감내해야 했던 삶의 무게를 기억해낸다. 
아가미와 지느러미 같은 곳에 삭지 않고 뱉어내야하는 단단한 가시를 갖고 있는 자리젓을 먹으며 제주도를 소개해주던 오시인의 구수한 목소리가 들린다. 자리젓의 가시는 아직은 그리운 이름을 못 빼냈기 때문이란다. 삭지 않은 그리운 이름들이 오승철 시인의 시가 되어 우리들 가슴을 찔러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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