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여행 단상

2006.11.07 01:39

정찬열 조회 수:55 추천:2

  한국의 중등학교에서 수학 여행지를 국내와 국외 두 곳 중 한곳을 선택해서 가도록 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는 보도를 보았다. 가정형편 때문에 수학여행을 갈 수 없는 학생들이 학교마다 적지 않았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든다.  
  나는 고향 읍 소재지에 있는 중학교를 다녔다. 2학년 가을쯤, 우리는 수학여행을 서울로 가기로 결정했다. 농촌생활이 다들 힘들고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부모한테 떼를 써서라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갔다. 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나는 그들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서울이야 다음에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곳이라고 부모님께서 나를 설득 했지만 그 말이 귀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가고 싶은 마음에 어머니를 막무가내로 졸라댔다. 자식 성화에 못이긴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저녁나절 동네로 돈을 꾸러 나가셨다.
  그런데 밤이 깊도록 어머니가 돌아오시지 않은 것이었다. 걱정이 되어 마중을 나갔는데, 멀리 어둠 속에서 어머니가 축 처진 어깨로 땅을 내려다보며 걸어오시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 생각이 짧았음을 후회했다. 보내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 싶기도 했고, 어머니를 저렇게 힘들게 하면서까지 여행 갈 필요는 없다고 맘을 고쳐먹었다.
   친구들이 수학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가지 못한 아이들이 더 큰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은 여행을 다녀온 다음이었다. 한 동안 교실은 수학여행 이야기로 흘러넘쳤다.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은 여행 때 찍어온 사진을 나눠보면서 저희들끼리 웃음꽃을 피웠다. 잠잘 때 성냥개비로 불침을 놓은 이야기라든가 선생님 눈을 피해 무슨 재미있는 일을 했다는 등, 자기들끼리의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못 간 아이들은 며칠 동안 풀이 죽어 지냈고,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쭈삣쭈삣 겉돌기 마련이었다. 허지만, 고만한 나이쯤의 아이들에게 가지 못한 친구들의 마음까지 헤아려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였을 터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광주 인근에 있는 Y 중.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부임한 첫해에 중학교 2학년 담임을 맡았다. 수학여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조사를 해보니 가정형편 때문에 여행을 갈 수 없다고 대답한 아이들이 몇 명 있었다. 면담을 했더니 모두들 딱한 사정이었다. K도 그 중의 한명이었다. 그는 공부는 물론 운동도 잘할 뿐 아니라 학급 부반장을 맡은 똑똑한 아이였다. 홀어머니 밑에서 힘들게 살면서도 구김살 없이 자라는 아이로, 내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학생이었다.
  어느 날 녀석을 조용히 교무실로 불렀다. 수학여행비는 선생님이 부담할 것이니 함께 가자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 녀석이 “솔직히 수학여행은 가고 싶지만 선생님의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가고 싶지는 않다”고 하며 내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아이 답지 않은 대답에 속으로 놀라면서도 함께 가야할 이유를 다시 설명했다. 사실은 나도 어릴 적 형편이 어려워 수학여행을 갈 수 없었다는 얘기를 해 주었다.
   지나고 보니 무슨 일이든지 때가 있는 법이고, 제때에 하지 못하면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더라고 했다. 이번 일로 선생님한테 부담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고, 만약 나한테 빚을 졌다고 생각한다면 어른이 된 다음 다른 어려운 사람을 위해 도움을 주는 것으로 그 빚을 갚으라고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녀석을 데리고 수학여행을 갔다. 함께 가지 못한 아이들이 몇 명 더 있어 안타까웠지만, 그 시절 교사의 봉급으로 모두 데려갈 수는 없었다
  여행 마지막 날, 녀석이 머리를 극적이며 저녁밥을 먹고 있는 내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말인가 할 듯하더니 어색한 듯 부끄러운 듯 기념 타올 한 장을 내 앞에 놓고 달아났다. 지금은 어엿한 성인이 되어있을, 환하게 웃던 녀석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2006년 11월 8일 광주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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