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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효자

2009.03.29 23:34

윤석훈 조회 수:262 추천:15

  
  1980년 11월 말,눈발이 간간이 내리던 밤이었다.친구들과 어울려 노닐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골목을 환하게 비추고 있던 조등을 보았다.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쉰 둘 봄 같은 연세에.그토록 빨리 돌아가실 줄은 정말 몰랐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형님 두 분과 여동생,누님은 연락이 되어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했다.힘없이 내려앉은 어머니의 어깨에는 무거운 어둠이 녹아 내리고 있었다.쉰 둘에 간경화로 생을 마감하신 아버지의 술잔엔 고통 없는 나라의 노래가 가득 울려 퍼졌을 것이다.세상의 빛과 그늘 사이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시고 현실과 이상이 만든 경계의 땅에서만 평생을 살다가신 아버지의 고되고 힘들었던 결핍의 시간들이 내 젊은 가슴에 겨울비처럼 쏟아졌다.삐딱하게 닳아빠진 구두뒷굽 같은 아버지의 일생이 내 눈물에 범벅이 되어 강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짧고도 불안했던 아버지의 세월을 덮어 주려는 것인지 밤이 깊을수록 눈발은 점점 더 거세어 졌다.실용에 내어주지 못한 아버지만의 인문학이 하얀 눈으로 변하여 지상에 쌓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2000년 6월 30일,새벽 한시 경에 전화벨이 울렸다.잠결에 아내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예사롭지 않다.눈을 뜨고 거실에 나가보니 아내가 울고 있었다.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단다.어머니가 돌아가셨다!일흔 둘 아직은 아침처럼 건강했던 분이.혈압으로 쓰러지셔서는 일어나지 못하셨다고.단 한 번의 쓰러지심으로 본향에 바로 입성하신 어머니의 내공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한 걸음에 달려갈 수도 없는 태평양 건너에서 나는 또 한번 기막힌 임종 소식을 전해 들었다.태평양을 등지고 돌아앉아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린 나의 두 눈에서는 붉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두 번이나 임종을 지키지 못한 회한이 얼음이 되어 뼈에 스며들었다.길고 긴 오열의 밤이었다.다섯명의 자식들 다 보듬고 기우시느라 고생 많으셨던 어머니,술 좋아하시는 아버지 때문에 젊으셨을 때부터 맘 많이 태우셨던 어머니가 흘려보낸 인고의 세월이 나의 가슴에서 온밤내 빗물이 되었다.강물이 되었다.바다가 되었다.

  일전에 대학 1년생인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생각하다가 돌아가신 아버지가 많이 많이 보고싶었다.그땐 술을 너무 좋아하시는 아버지를 늘 불평했었다.아버지없이 보냈던 젊은 시절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수없이 들끓었던 젊은 날의 내적 소용돌이 속에서 몸의 아버지 대신 영혼의 아버지를 만났던 기억도 났다.그러나 얼마나 그리웠던 몸의 아버지였던가!젊을 땐 미처 알지 못하던 느낌들이 이제는 새롭게 마음을 적신다.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면 그 좋아하시는 약주를 마음껏 받아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드는이유는 무엇일까?아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할 때면 가슴 한구석이 칼에 도려진듯이 늘상 애리다.아들과의 관계가 끈적거릴수록 아버지가 그립다.아들과의 관계가 서먹할수록 아버지가 그립다.아들이 마음에 안들수록 아버지가 더 더욱 그립다.아들과 떨어져 있는 동안 가끔 보고싶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너무도 그립다. 침묵의 뜨개질로 인고의 세월을 깁고 또 기우며 견뎌 내셨던 내 어머니,만질 수 없는 내 어머니가 몹시도 그립다.

  세월은 점점 더 아버지께,어머니께로 나의 시간을 실어 나르고 있다.가슴으로,마음으로 두 분께 가깝게 흘러들수록 당신들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드리지 못한 송구스러움이 온몸으로 퍼져 나는 뼈 없는 아지랭이가 된다.가슴의 창에 눈물이 번진다.창 밖으로 보이는 어지러운 아픔 속에서도 봄날은 여전히 초록이다.두 분은 변함없는 사랑의 봄강으로,초원으로 나의 온 세계에 흐르고 펼쳐진다.부모님의 풀섶을 서성거리는 짐승이 보인다.아직도 나는 두 분께 그저 연약하고 조그만 한 마리 염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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