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10 12:19

그리운 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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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타인
                                                               백남규


   아름다운 여자를 만났다.  우아한 갈색머리칼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머리를 흔들며 사뿐 사뿐 걸어가는 여자의 모습을 보자, 윤수는 숨이  컥 막혔다. 버몬 8가에서 아침바람에 머리를 흩날리며 걸어가는 그 여자를 보자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지 않을 수 없었다.  경쾌하게 걸어가는 그녀를 보자, 다급한 일이 생긴 것처럼 가까운 주차장을 찿아서 차를 세우고 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까닭없이 길거리에 내팽개쳐진 기분이 들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끌리는 여자를 만나게 되면  자신도 제어하기 힘든 감정에 빠져든다.

   윤수는  옛날 생각이 났다.  서울에서 대학교 다닐 때였다.  이유없이 외롭고 괴롭고 막막하던 시절이었다.  적성과는 맞지 않는 학과에 들어간 윤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을 마셨다.  술이 취해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올 때. 신촌에서 종로를 거쳐 동대문,청량리를 지나가는 차창 밖에 명멸하는 네온사인을 쳐다보며 그는 황홀감에 젖곤 했었다. 휙휙 지나치는 거리가 아름다운 꿈속의 나라같이 보였다. 꿈속에서 윤수는 막연히 여자를 기다렸다. 여자-구원의 여자. 어떤 여자인지는 모르지만 그 나이에 맞게 윤수는 어떤 여자와의 사랑을 꿈꾸었다.  이쁘고 상냥한 여자가 자기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는한 자기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을거라는, 황당한 생각을 골똘히 했었다.  그래서 공부도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수업을 마치면 다방에 죽치고 앉아서 친구들과 노닥거리든가 당구장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그에겐 스스로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여자에 대한 생각이다. 구원의  여자가 그리웠다. 자기를 사랑하는 여자가 운명적으로 자기를 향해 다가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마치 감나무에서 감이 익어서 떨어지듯이. 첫눈에 반해서 자기를 향해  손을  내밀 것이라고, 그러면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그는 일어나 씩씩하게 세상을 향하여 걸어나갈 것이라고.
  그러나 젊은 시절을 다 보내는 동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가 먼저 남자에게 접근하는 일이란 흔하지 않는 법이다.   물론 지금이라면 그런 일이 일어 날 지도 모른다. 지금은 21세기 자본주의가 극성을 떨고 있는 시대이다.  돈 많고  잘 생긴 남자를 노골적으로 좋아하는 여자가  점점 많아지는 것같다. 아니 남자가 잘 생기지는 못해도 돈만 많다면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친구나 직장동료들이 가끔 소개해 주는 여자를 만났을 때, 상대 여자가 처음에는 심드렁한 눈빛이었다가
“서울에 아버지가 물려 준 빌딩이 하나  있지요.” 라고 말하면 상대여자의 눈빛이 문득 생기를 띄는 것을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프리랜서 기자이다. 이따금 소설이나 영화평을 쓴다. 아는 선배의 소개로 본국 일간지의 미주판 신문에 가끔 기고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돈이 생기는 일은 아니다. 돈이라면 이재에 밝은 아버지 덕분에 별 어려움이 없이 살고 있다. 그러나 산다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안다.

    윤수는  젊은 시절이나 마흔이 다 되어가는 지금이나 사랑의 신화를 믿고 있다. 여자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한 자기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래서 지금까지 졸린  표정으로,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한 것 같은 얼굴로 살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여자를 안 만난 것은 아니었다.  세상을 항상 한 발짝 슬쩍 비켜서서 사는 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여자는 없었다. 그래서 몇 해전부터는 태도를 바꾸어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기로 했다. 집에서는 한결같이 장가가라, 참한 여자 있다고 성화였지만 아무 여자와 결혼하기는 싫었다. 돈보고 시집오는 여자라면 질색을 했다. 뭐 영화배우나 공주같은 여자를 기다리며 세월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첫 눈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여자면 족했다. 지난해에 미국배우 니콜라스 케이지가 나이트 클럽에서 한 여자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듯이 말이다. 만나는 순간 모든 것을 잊게하는 여자, 지위나 재산, 종교와 윤리를 깨끗이 잊게하는 여자. 전적으로 그 여자에게 빨려들어 순수한 에너지의 파동을 느끼게 되는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가슴을 두둘기는 사나운 북소리에 떠밀려  마구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여자.혼을 쑥 빼놓고 바라보게 되는 여자는 쉽게 만날 수 없었다.

큰 키에 버쩍 마른 체구를 가진 윤수는 늘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꺼칠하고 활기 없는 그에게 여자다운 여자가 다가올 리 없건만  그는 여자에 대한 기대를 버릴 수 없었다. 단 한 사람의 여자만이 그를 채워줄 수 있다. 일어나 걷게 할 수 있는 여자는 언제 나타날 것인가?


윌셔쪽으로 달리듯이 걸어가면서 여자를 찿았다. 여자는 막 건널목을 건너려는 참이었다.
여자는 얼굴이 갸름하고 창백했다. 키는 작지만 꼭 끼는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를 맵시있게 입고 있었다. 사뿐 사뿐 걷고 있는 뒷모습이 눈에 띈다. 팽팽한 둔부를 보자 윤수의 내부에서 스멀스멀 눈 뜨기 시작하는 욕망은 어느덧 주체할 수 없이 저절로 자라기 시작했다. 다급하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여보세요!”

여자는 뒤돌아보며 놀란 표정으로

  “왜 그러시죠?”

쌀쌀한 어조로 말하며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아, 예 ”

이런 경우 뭐라고  말을 해야하나 알 수 없는 윤수는 그저 멍청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열적은 표정이 되어 어정쩡한 태도로 그녀의 뒤를 비실비실 쫓아갈 수 밖에 없었다.

여자는 이상한 놈 다 봤다는 표정을 짓고 홱 돌아서 걸어간다.
뭐가 그리 바쁜지 찬바람을 내면서 빨리 걸어갔다.  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다급하게 쫓아가서 여자의 어깨를 잡았다.

“바쁘시더라도 잠깐 이야기 하고 싶은데요.”
“무슨 이야기요?”
“아무 얘기든지 좋아요.”
“아, 그만 이 손 좀 치우세요.“

  뒤돌아 서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성의 없이 말했다.

“지금은 바쁘니 전번 주세요.”
“전번요?”
“전화번호요.”

윤수는 명함을 지갑에서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집에 돌아와 아쉬운 마음을 달래보려고 맥주를 마셨다. 조금 전에 헤어진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도데체 무얼하고 있는 여자일까? 결혼은 했을까? 고향은 어디일까? 수많은 의문이 구름처럼 머리에 오락가락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우연한 기회에 경험하게 되는,다시 말하면 행운만 있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인가? 윤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사랑에 목말라 하고 있다. 수많은 영화와 소설과 유행가들이 무수히 사랑 이야기를 펼쳐놓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랑이 인생살이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사랑에 성공하여 행복한 사람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세상은 점점 각박해지고 있고 소중한 가정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현대의 유행은 가정적이고 얌전한 여자보다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여자들이 인기가 있다. 현대 문화의 특징인 상업성-탐나는 물건이면 현금이나 월부로 사는 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매력있는 상품을 고르듯이 사람을 선택한다는 사실을 윤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낭만적인 사랑이 그리웠다. 상대의 지위나 재산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순수하게 사람자체에 끌리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
  그는 여자를 선택하는 기준에 대하여 한동안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납득할만한 대답을 찿기 어려웠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외모와 학벌, 집안 내력, 성격, 재산, 직업 등등  매력적인 조건이 기준이 되겠지만 그는 애써 상식적인 기준을 멀리해왔다.
그저 직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보는 순간 가슴이 후끈해지는 것을 선택기준으로 삼았다. 인간의 육감이란 때로 초능력에 가까우니까.

  며칠후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며칠이 그토록 긴 줄은 정말 몰랐었다. 괴롭고 설레이고 초조한 며칠이었다. 기다리는 시간은 괴로웠다. 전화가 올 것인지, 말 것인지. 언제 연락이 올 것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아이구, 바보야. 끝까지 따라 가서 최소한 직장이 어디인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아 놓고 돌아 올 걸’. 혼자 자책하며 가슴을 쳤다.  그녀의 고운 모습이 눈앞에서 어른 거려 도무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외롭게 빌빌거리며 한인타운을 배회하고 다니던 그에게 그녀와의 조우는  삶에 대한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이렇게해서 그녀와 어느 카페에 마주 앉게 되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한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말없이 이렇게 가만히 마주 앉아 바라보니 기분이 좋았다.  자세히 보니 여자는 정말 아름다웠다. 이마가 시원스럽게 반듯하고  매끈했다.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한 눈동자는 초롱초롱 반짝였다. 눈두덩은 얇고 눈이 깊었다.

   “선량하게 생기셨군요.”
  
불쑥 그녀가 말했다.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입술에서 슬몃 흘러나온 말에 귀가 번쩍 띄었다. 그녀의 표정에서 착하게 생긴 사람이 왜 점잖지 못하게 여자에게 추근대느냐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면 ‘왜 여기 나왔느냐?’ 는 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여자는 조용히 말했다.

“그날 당신의 표정이 너무 절박하더군요.”
그래서 어떤 남자일까? 궁금해서 도저히 연락을 하지 않을 수 없었노라고 수줍게 말했다.

그 날 카페에서 밤이 이슥할 때까지 술 잔을 기울이며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사랑에 대하여 이것 저것 알고 있는 것을 주절거린 듯하다. 낙랑공주와 호동왕자를 이야기할 땐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낙랑공주이야기의 핵심은 사랑 때문에 아비와 나라를 배반했다는 것. 그것 때문에 자신이 죽어야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인을 위해서 자명고를 찟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전설같은 이야기가 왜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을까? 사랑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표현하면 ‘무상성(無償性)이라고 할 수 있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상대에게  무엇인가를 주어도 , 주어도 아깝지 않은 마음이 사랑의 본질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요즘 세상에 그런 사랑이 가능할까요?”  
그녀가 빙긋이 웃으며 반문했다.
“글쎄요. 흔하진 않겠지요.”

  그는 어눌하다. 유쾌한 태도와 흥미 있는 대화로 여자를 즐겁게 할 줄 몰랐다. 더우기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횡설수설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사랑이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이 문제일 뿐이라고 고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까지 혼자 지내는 것은 올바른 상대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살고 있다. 그는 진지했다. 사랑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소모해야하는 엄청난 에너지와 열정이 나이가 들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동안 온갖 순정과 정성을 다 바쳤음에도 그의 곁을 떠난  수명의 여자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여자가 떠나고 나면 한동안 풀이 죽어 방구석에 처박혀서  꼼짝하지 않고 며칠을 보냈다. 처음보자 마자 한 눈에 확 빨려들어간 사람이 자기만이였고 상대는 아니었다는 사실에 실망과 한숨을 쉬었을 뿐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미남은 아니었으나 이마는 넓고 머리 숱이 많았다.  어깨가 좁은 걸 보니 여자를 따뜻하게 감싸줄 위인은 아닌 것 같다. 눈빛은 맑았다. 나이에 비하여 때가 묻지 않은 듯하다. 여자 앞에서 저렇게 버벅대는 걸 보면, 순진한 남자일지도 모르겠다. 빙긋 웃을 땐 귀여운 느낌이 드는 남자였다. 전체적으로 선량한 인상이었다. 다리긴 했지만 후즐근한 곤색 바지에 체크 무늬 외투를 걸쳐 입은 상체는 빈약했다. 하지만 뭔가가 있었다.  뭐라고 규정할 수는 없었지만 남자에게서 풍겨나오는 독특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오래되고 낡은 무엇이 느껴졌다.

  그는  그녀의 술잔에 술을 따루었다. 술잔을 쥔 그녀의 손이 팔에 스쳤다. 순간  움찔했다. 아른 아른 잠에 빠지기 직전 누군가가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 팔뚝에 전해져왔다.

“‘무작정’ 이란 낱말을 좋아하세요?”
“글쎄요.”

남자는 무작정이란 낱말을 좋아했다. 계획없이 즉흥적으로 떠나는 여행이라든가  그런 여행중, 아름다운 풍경을 만났을 때 무작정 가던 길을 멈추고 내리지 않을 수 없는 남자였다. 아무튼 마음에 드는 남자다.  여자는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러지.“

민숙은 무작정 살아 온 여자는 아니었다. 계획을 세워 집을 사고  일주일 식단을  짜서 그대로 실천하는 여자였다. 아침에 된장찌개며 북어국등 제대로 된 밥상을 차릴 만큼 부지런했다. 어려서부터  모범생체질이 몸에 배어서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가지 말라는 곳엔 가지 않았고  지켜야 할 것은 꼭 지켰다.  사실 거리에서 따라오는 남자들은 많았었다. 그러나 품행이 방정한 그녀와 데이트에 성공한 남자는 거의 없었다. 지금 남편도  고모님이 중매를 해서 만난 남자였다.  외모와는 달리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지키고 살아왔다. 엄한 아버지때문이기도 하지만 스스로도 별로 남자에게 흥미가 없었었다. 연애다운 연애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대학 졸업후 바로 결혼해서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러나 이즈음 그녀는 헌신적이며 흐트러짐이 없는 삶의 태도가 오히려 삶을 건조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행콕 파크라는 동네는 절간처럼 조용하다. 사람들이 오가지도 않았고 깊은 산속같이 적막한 동네다. 도시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이렇게 물속처럼 조용하다니, 처음에는 잘 꾸며진 정원이며 밝은 햇살이 참 좋게 여겨졌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세월이 갈수록 청명한 햇살이 가득 쏟아져 내리는 아름다운 동네가 눅눅한 우물안 처럼 느껴졌다. 축축하고 음습한 냄새마저 코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면 착하고 여리다고 했다. 유순하고 조용하고 단정한 아이였다. 청순한 외모에 연약함이 깃들어 있었다. 찟어진 청바지를 입지도 않았고, 브라우스도 항상 단추를 목까지 채웠다. 책읽기는 좋아했었다. 헤세의 ‘데미안’과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탐독했었고 특히 ‘갈매기의 꿈’을 좋아했었다. 멀리 높이 날아가고 있는 새를 쳐다보기 좋아했다. 민숙은 결혼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절절한 사랑이 있어야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의 생각과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혼이란 나이찬 여자가 가야할 길이라 것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희미하게 깨달아지는 요즈음이다. 아버지가 심어준 삶에 대한 자세를 위반하고 싶은  욕망이 세차게 솟구쳐올라왔다.

“결혼 생활은 어떠세요?”

민숙이 결혼한 여자임을 알고 크게 실망한 듯이 그는 물었다.

대답대신 여자는 윤수에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어느날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팻말 너머에 아름다운 집이 있더군요. 꽃이 만발한 정원엔 이름모를 나비들이 경쾌하게 날고.....”

“.........”
“그런데 팻말에는 ‘들어 오지 마시오” 라고 쓰여있어요.


여자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눈가에 그늘이 지는 것을 보니 결혼 생활이 그리 행복한 것 같진 않았다. 자세히 보니 발랄한 외모와는 달리  고독하고 우울한 표정이 슬쩍 엿보였다.
뭔가 분출되지 못한 정열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얼굴을 창밖으로 돌리고  한동안 침묵했다. 그날은 그 쯤에서 헤어졌다.

민숙은  결혼할 즈음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났다. ‘사랑이란 별거 아니다.  일단 결혼하고 살다보면 저절로 생기는 게 사랑이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아버지도 알고 계셨을텐데 왜 그러셨을까.  아버지를 어떻게 원망할 수 있으랴. 연속극 대발이 아빠같이 무소불능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두려운 존재였다. 큰 소리로 야단치는 것도 아닌데 위엄이 있는 분이었다. 항상 바쁘셔서 집에서 마주치기도 어려웠지만 아버지의 영을 거역하기는 어려웠다. 그게 무엇이든지간에. 어머니도 오빠도 모두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러나 표면상 거스르지 않았다고 해서 마음 속 깊은 곳의 위반에의 욕망마저 거세된 것은 아니었다.

한 달이 지났다.  윤수는 민숙이 결혼한 사실을 알았던 순간 묘한 배신감과 허탈감이 느껴졌었다.  그래서 될 수 있는한 그녀를 잊어보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한 달이 지나도 여자는 잊혀지지 않았다. 아니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같은 예감에 몸이 떨렸다. 그럼에도 해가 뜨고 밤이 왔다. 변화 없는 일상이 모래시계에 떨어지는 모래처럼 흔적도 없이 흘러갔다. 한 차례 몸살을 앓았다. 크게 앓았다. 심장에서 들려오는 그녀에게로 향하는 사나운 북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녀를 향한 애모의 정이 그의 전신을 강타하여 몸져 누웠다.자신은 정상적인 인간인가? 그런 생각이 머리를 가득채워 더욱 어지러웠다. 여자를 선택하는 기준이 잘못 인가 생각해보았다. 첫 눈에 가슴이 후끈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저 외모에 끌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스스로 납득할만한 대답은 찿기 어려웠다. 다만 직감에 의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방법이라는것만  스스로에게 확인했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감이란 거의 초능력에 가까우니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날  늦은 저녁시간에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술이 반쯤 취한 목소리였다. 여기 6가에 술집인데 나와 줄 수 없느냐고 했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다 되었다.  두말없이  옷을 주섬 주섬  주워 입고 급히  문밖을 나섰다. 비가 추적 추적 오고 있었다.

빗속을 운전하며 기대와 흥분이 뱃속아래에서 슬며시 위로 올라왔다. 오늘밤 어쩌면 그녀와 관능적인 사랑에 흥건히 빠져 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당치도 않는 기대때문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파킹보이에게 열쇠를 건네고 문을 열고 들어서니  왁자지껄한 소음과 음악소리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구석자리에 혼자 앉아서 술잔을 홀짝이고 있었다. 조금 풍성한 외투 속의  젖가슴이  그의 눈에 크게 들어왔다.  하얀색 티셔츠에  헐렁한 밤색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몸에 달라붙는 티셔츠 위로 탐스런 젖가슴이 불룩하게 솟아있다. 그녀는 모조석고상처럼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얀 손으로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다음 허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먼 곳을 쳐다보는 눈빛에 알 수 없는 우수가 조금 묻어나왔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과  반대의 모습으로 살아보고 싶을 때가 있다. 얌전하게 살았다면 한번쯤은 얌전하지 않게 살아보고도 싶은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충실하다가도 바람이 불고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엔 하늘을 쳐다보다가, 문득 ‘이렇게 사는 게 다 인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기도 한다. ‘내 인생은 무엇인가?’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불쑥 머리속을 복잡하게 하기도한다. 이런 의문이 떠올라도 금방 잊어버리고 또 열심히 일상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그러나 가끔은 일상에서 멀리 일탈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기도 한다. 여자가 오늘은 그런 날인가보다.
  
여자는 비오는 창밖을 내다보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깊이 꺽어 단숨에 마셔버린다.

오늘도 남편은 오지 않았다. 남편은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 더 많았다. 자정이나 새벽에 들어와서 아침 일찍 나가버린다. 술 마시고 깨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인 것처럼 그는 지치지도 않고 마셔댔다. 여자는 그럭저럭 참아왔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되는지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술을 왜 그리 자주 마시느냐?  술을 그렇게 마시고 무슨 일을 제대로 하겠느냐고 바가지를 긁지 않은 건 아니다.

남편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늘 허둥대었다. 성격이 꼼꼼하지 않아서 늘 서류가방을 두고 나간 뒤 헐레벌떡 다시 돌아오기를 밥먹듯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변호사가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남편과 결혼한 것은 미국의 유명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졸업과 동시에 굴지의 로펌에 입사해서 경력을 쌓은 후 지금은 엘 에이에서 개업한 변호사라는 데 마음이 끌린 건 아니었다.  남편은 착실한 모범생이었다.  서울에서 대학 졸업후 유학와서 전공을 법학으로 바꾸고 앞 뒤 돌아 볼 사이 없이 집과 도서관, 학교를 맴돌다 졸업한 사람이었다. 그저 남들처럼 애 낳고 키우고 살만한 사람이라 여겨졌었다. 뉴욕의 로펌을 그만 두고 엘에이로 옮긴지 얼마 안 되어 정보도 좀 얻어야되고 친해 두어야할 사람도 있고. 그래서 술도 좀 마시는 것이라고 했다. 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생활비를 제 때에 안 주는 것도 아니었다.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려고 열심히 돈을 버는 것이라고 조금만 이해해 달라고 남편은 말했다. 돈이라니? 그게 핑계가 안되는 건 그도 안다. 돈이라면 시아버지께서 걱정을 도맡아 하신다. 아들에게 그런 걱정을 시키실 분이 아니다. 그런건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행콕파크라는 동네의 조용한 집에 앉아 있으면 이상하게도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도 찿아오지 않는 집에서 청명한 햇살을 받으며 음악을 듣는다. 가끔 미풍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뜨락을 내다보면 새들이 평화롭게 지저귀기도 한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 소리지만 그 평화로운 새소리를 들을 때 견딜 수 없는 권태감이 여자에게 찿아들곤한다. ‘이런게 사는건가?’  마치 조용한 연못의 고인 물처럼 시나브로 썩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불쑥 불쑥 들었다.
서른 두해, 사는 것이 뭔지 모르고 살아왔다. 특별히 불행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즈음 그녀는 괴로웠다. 밝은 햇살이 쏟아지는 깨끗이 정돈이 잘 된 뜰에서서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을 멍하니 보고 있을 때, 느닷없이 사는게 참 재미없다는 생각이 가슴에 꼳혔다.
어쩌다가 쉬는 날 남편은 하루종일  TV만 쳐다봤다. 주로 스포츠 중계를 즐겼다. 대형화면 가득히 클로즈업된 얼굴에서 땀이 번들거린다. 부릅뜬 두 눈은 고통으로 일그러져있다. 관중석의 고함 못지 않게 남편도 소리치고 발을 구른다.

“ 나 어디 아픈거 같아.”
  
“응, 그래...어디가 아픈데.”

남편은 건성으로 민숙을 쳐다보지도 않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심드렁하게 대답했다.우리는 사이좋은 이웃같기는 하다. 만나면 반갑지만 헤어져도 아쉽지는 않는 관계이다. 남편의 관심을 받지 못해도 화가 나지 않았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남편의 질문이 있다.

“마음에 드세요?”
“뭐가요?”
“내가 마음에 드시냐구요?”

민숙은 뭐라고 대답해야할 지 몰랐다. 왜냐하면 좋다든가 싫다든가하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후 물론 그녀도 밥을 짓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했다. 마켓에서 먹을 것도 산다. 다만 아무 흥미도 가지지 않은 채 버릴 수 없는 습관처럼 왔다 갔다 했을 뿐이다. 이 집에는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전했다. 울고 싶었다. 그러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소리내어 울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다만 생각일 뿐이었다.

윤수를 처음 만난 날, 남편이 서류를 두고 나가서 윌셔가에 있는 사무실에 가기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선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남편외에 다른 남자가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 싫지 않았다. 남자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 하고 싶다는 접근을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연애가 하고 싶었다. 상대의 마음을  애태우고 싶었다. 결혼전 남편은 베낀 게 틀림없는 연애편지지만 일주일이 멀다하고 보냈었다. 그러나 일단 결혼하고 나니 밖으로만 돌려고 한다. 막상  마누라가 되고 나면 신선한 느낌이 사라지나보다.
  남편이 회사로 떠나고 휭하니 비어버린 빈 집에서 혼자 남은 여자에게 텅 빈 시간이 펼쳐진다. 옅은 바람에 흔들리는 집 앞의 노란 꽃을 바라보며. 여자는 미풍속에서  뭔가 유혹하는 소리가 숨어 있는 듯 귀를 기울였다.

윤수를 불러낸 날, 남편은 급한 일이 있으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고 전해왔다.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더니 곧 장대비가 되어 물을 쏟아부었다. ‘올해는 유난히 엘 에이에 비가 많이 오는구나.’ 혼잣말을 하는 중에 뉴스에서 말리부쪽 산등성이가 무너져 사람들이 다치고 집이 무너졌다고 한다. 느닷없이 눅눅한 습기가 가득찬 집에 잠시도 있기가 싫어졌다. 평소에 입지 않던 몸에 달라붙는 야한 티셔츠를 입어 보았다. 잘익은 과일같은 젖가슴이 탐스럽게 솟아있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았다. 겨드랑이에 진한 향수를 듬뿍 발랐다. 입술을 새빨갛게 칠했다. 차를 몰고  가까운 술집으로 향했다.

민숙이 깨닫지 못했겠지만 인간은 옛날부터 진탕 먹고 마시고 떠드는 것으로 고독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아직도 남아 있는 남미의 카니발 같은 것이 그런 의식이다. 카니발에 참가한 사람들은 잠시 동안 광희상태에 빠져 외부와의 단절을 잊고 황홀경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문명이 발달해서인지 후퇴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이전의 집단적인 의식이 현대로 올수록 점점 사라지고 말았다. 집단적인 카니발은 사라지고 개인적인 의식으로 변질되어 외로운 개인이 혼자서 홀짝 홀짝 마시다가 알콜 중독이 되기도 한다. 현대사회의 취약한 점이다.
   민숙은 술을 마시고 싶었다.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자 용기가 생겼다. 핸드백에서 윤수의 명함을 꺼내어 전화를 걸었다.

붉은 등불아래 하얀  얼굴, 까만 눈썹, 입술이 빨간 민숙이 휘황하게 빛나고 있었다.
스탠드바식으로 된 긴 탁자가 있는 술집이었다. 윤수는 가까이 다가가 옆에 앉았다. 여자는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진한 향수냄새가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슬몃 그의 관능이 살아나는 듯 머리카락이 쭈볏해졌다. 여자의 주량은 센 듯했다. 남자체면상 그녀에게 질세라 평소의 주량을 초과해 마구 마셨다. 막걸리에 취해서 내다보는 풍경은 어디나 고향같다. 희미한 등불 아래 그녀의 풍성한 외투속에 얼굴을 묻으니 고향냄새가 났다. 외투속으로 윤수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뭔가에 푹 빠져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근처의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정이 지나자 썰물처럼 손님들은 사라지고 두 사람만이 남았다. 붉은 조명아래 흐느적거리며 그녀는 춤을 추면서 노래를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적으로 셔츠를 가슴위로 올렸다가 내렸다. 탐스런 젖가슴이 그대로 노출 되었다. 예기치 않던 장면에 윤수는 입이 벌어졌다. 아름답다는 경탄이 저절로 나왔다.자리로 돌아온 민숙은 윤수의 얼굴을 잡고 입술을 맞추었다. 촉촉하고 뜨거운 느낌이었다. 윤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몸이 굳어져왔다.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후 그는 곤드레가 되도록 마셨다. 여자가 평생 어떻게 한 사람하고만 섹스할 수 있는가.지겹지 않는가... 어쩌고 저쩌고 횡설수설을 시작하는 순간 그는 골아떨어져버리고 말았다.

아침결에 간신히 눈을 떠 정신을 차려보니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까마득한 옛일처럼 생각되었다. 처음 부분은 조금 생각이 나는데,나중 부분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 내 집까지 오게 됐는지. 뭐라고 큰 소리로 싸운 것 같기도하고. 민숙이 몸위에 올라타서 여자가 그럴 수 있느냐며, 심하게 몸을 흔들었던 것도 같다.
물을 마시려고 부엌으로 갔다. 탁자위에 못 보던 종이가 한 장 놓여있다. 민숙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윤수는 지금까지 자신이 생각해온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성욕에 바탕을 둔 미적 경탄인지, 감상적 숭배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치기어린 감상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곧 지나갈  한 때의 동경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이 뻐근해져오며, 가슴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그리움의 현이 울컥 울려져 나와 코 끝을 싸하게 했다. 그녀에게 자신의 뜨거운 감정을 전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같았다. 금지의 팻말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성곽에서 그녀를 구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파도가 닥쳐올지라도 폭풍우를 헤치고서 그녀에게 헤엄쳐가리라고 다짐했다.


돌발적인 사태에 어리둥절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참으로 매력적인 여자이다. 귀여운 여자이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에게 예의 차리기같은 것이 없이 흉금을 털어놓고 대하고 싶었기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뜻 본 그녀의 아름다운 유방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렇다고 그녀로 향하는 그의 마음이 욕정으로만 차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빼어난 미모에 감탄한 것은 사실이다. 걷는 모습,말하는 모습, 먼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 귀에서 쟁쟁한 그녀의 나즈막한 목소리,부드러운 살결이 꿈결인 듯 그리웠다.

연일 비가 내렸다. 하루 종일 줄기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니 울적한 마음이 더욱 가라앉는다. 울적한 마음을 달래보려고 바닷가로 차를 몰았다. 산타모니카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천천히 차를 몰았다. 허연 파도가 달려와 부서지며 굉음을 내며 스러진다. 파도의 선들이 울퉁불퉁 누가 마음대로 그려놓은 오선지같이 헝클어진 채 달려온다. 굵직한 빗줄기가 차창을 통하여 차 안으로 세차게 몰아친다. 해변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갔다. 포효하는 파도소리, 하얀 포말이 스러지는 모래밭, 점점이 흩어져 나르는 물새들....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님은 뭍같이 까닥도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날 어쩌란 말이냐. 혼잣말로 어느 시인의 시 구절을 외워보았다. 오랫동안 파도를 바라보다가 무엇을 결심한 듯이 단호하게 발길을 돌렸다.

아그네스 발차의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고’의 가락이 차안을 가득메우고 어두운 하늘로 사라지고 있었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은 마음을 북돋아주는 곡조이다. 여자가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만나고 싶었다. 차를 행콕파크로 돌렸다.

그녀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어요. 밤에 잠도 못 자고...”

  그녀는 윤수에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꽉 잡고  자연스럽게 대문을 넘어섰다. 지루한 일상의 걸음걸이가 어떤 경계를 넘으면 황홀한 무용으로 변하듯이  두 사람의 발걸음은 나를듯이 경쾌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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