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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해(告 解 ) 최 영숙 (崔 英淑)

2007.08.28 12:11

이 상옥 조회 수:502 추천:68



고 해(告 解 )

최 영숙 (崔 英淑)



진외가가 서해안 어느 곳에 있다는 소리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그곳에 다녀온 날이면 우리는 가리맛살을 넣고 끓인 미역국과 골마지낀 고추장을 풀어 끓인 모시조개 찌개 냄비에 아글다글 달라 붙어서 지금거리는 모래까지도 달게 삼켜대곤 했다. 진외가란 그래서 살붙이라기 보다는 개흙이 잔뜩 묻은 채로 자루에 담겨 오던 먹거리에 대한 치근함에 가까왔다. 할머니는 오십리 밖에 있다는 진외가를 일년에 딱 한번 다녀왔다. 그날이면 보퉁이를 머리에 얹고 나서는 할머니의 신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생각도 할머니가 돌아 가시고 난뒤에서야 얼핏 떠올렸을 정도로 식구들은 무심했다. 그저 할머니가 보퉁이 대신 이고 올 생물 반찬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이미 오래전 일이었지만 그때 생물 반찬의 달큼한 맛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남부 터미널 입구에 서서 넓지 않은 광장을 휘이 둘러 보았다. 어쩌면 무슨 그럴듯한 구실이라도 생겨 사강으로 가는 발길을 되돌리고 싶은 심정인지도 몰랐다.맞은 편에 서있는 진로 도매 센터를 휘돌아 나온 건조한 바람이 터미널 쪽으로 한차례 몰려왔다. 바람이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한 광장 위에는 온갖 냄새가 켜켜이 내려 앉아 갔다. 어떻든 지난 일요일 밤에 걸려온 전화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나는 꺼룩하게 늦잠을 즐기고 있을 시간이었다. 밤 10시경이었다. 수화기 속에서 웬 노인이 나를 찾고 있었다.
황토말에 살던 권씨네 말여어... 그럼 니가 순태란 말이여?
잘 알아 듣기 어려운 어눌한 말투로 노인은 재우쳐 물었다.
예에, 맞습니다. 실례지만 누구신가요?
저기 말여, 나 몰러? 왜 느이 진오갓집, 사강에 홍씨 할아부지....
어렴풋이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할머니 몇촌이 된다던가 하는 친척이었다.말술도 불사할 만큼 대단한 위장을 가졌던 그는 술잔을 밀치고 나면 사나흘씩 잠만 자는 위인이었다. 자기말대로 게을러서 기른 코밑 수염에 막걸리가 허옇게 엉겨 붙어 있는 것쯤은 아랑곳 하지 않던 노인은 그래도 손님이라고 어머니가 생태라도 넣어서 끓여준 술국을 입에 퍼넣으면서도 연신 타박이었다. 쓸개를 터뜨렸나 왜 이렇게 쓰냐는 둥 마늘이 적게 들어가서 그런가 어째 비리다는 둥,염치 없고 번죽 좋은 노인은 술에 절어 잠자는 것과 입만 열면 그저 남의 속을 뒤집어 놓고 엎어 놓고 하는 일이 전부였다. 어쩌다 마당에서 나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고의 춤을 추키면서 실실 웃다가 별안간에 삼끈 같은 손가락으로 채 자라지도 않은 내 고추를 움켜 잡아대기도 했다.
아부진 돌아 가셨댐서? 아니 그렇두룩 무심들 헐수 있남. 으째 기별들두 안했대여,
그려 엄니는 잘 기시구?
예에, 그럼요. 요 며칠 전에 누님 댁에 가셨어요. 계셨으면 반가와 하셨을텐데요.
반가워하기는 뭘, 그 웬수가 물귀신 처럼 또 어디서 뜬금 없이 나타났나 허구서 기겁허겄지. 허허허! 느이가 서울루 솔가헌 뒤루 당최 소식을 못듣다가 요 을마전에 남양장에서 느이 당고모를 만났어. 어지럼병이 도져서 소 지라를 사러 나오셨드구먼, 그래 그편에 소식을 들었다.
나는 사뭇 시큰둥했다. 노인은 아버지를 향해서도 걸핏하면 시러배 자식이니 시굴 고라리니 하면서 대놓고 면박 주기가 일쑤였다. 한번은 아버지가 쇠죽을 끓이면서 궁시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젠장할, 그깐 오갓집, 얼굴은 커녕 꽁댕이두 내 못봤구먼....끽해야 사초 한번 해주구 지사 한번 뫼셔 준다구 평생 멕여 살릴 심산이신가베
절손한 진외가 댁의 뒷일을 유일한 친척이던 노인이 감당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노인의 말투가 갑자기 달라졌다.
근데 말여, 너 나 좀 만나야겄다.
예에?.... 무슨 일이신데요?
글쎄 , 그건 와보믄 알어. 알었냐? 은제 댕겨 갈테여?
글쎄요, 별안간에 무슨 일이신지...
하여튼 나 죽기 전에 댕겨 가야혀!
노인은 거두절미 하고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간신히 다음 일요일로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은 나는 착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사강 할아버지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그 해 무렵 그러니까 할머니가 돌아 가신 다음 해에 갑자기 발길을 끊었다. 하지만 그다지 애닯던 친척도 아닌지라 우리들은 머잖아 사강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진외가가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함께 잊어 버렸다. 불현듯 저 밑바닥 어딘가에서 부터 끊어졌던 인연의 가닥들이 닿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돌아 가신 뒤 다락 속에 쳐박아 두었던 경대 서랍에서 할머니의 희끗거리는 머리 카락 뭉치를 발견했을 때처럼 묵은 내 나는 쓰라림이 한켠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그러면서도 한편에서는 짜증이 솟구쳤다. 노인들이란 가끔 그렇고 그런 일로 시간을 거꾸로 잡아 매두려고 애쓰기도 하니까. 모처럼 당직 근무에서 벗어난 홀가분한 일요일을 그런 구접스런 일에 흘려 보내기는 어떻든 아까운 일이었다.


버스는 벌써 사강을 지나 마산포를 향해 가는 중이었다. 막 피어 오른 햇살이 김서린 차창을 뚫고 들어 왔다. 햇살을 따라 약간은 졸린 듯, 나른한 공기가 버스 안으로 밀려 들어 왔다.나는 제화리가 가까와지기 시작하자 체수가 유난히 작았던 할머니를 생각했다. 진외가에 다녀온 할머니 모습이 유난히 기억나는 날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것이 할머니의 마지막 친정길이었다. 그날따라 풀솜 같이 지쳐 보이던 할머니는 갯내가 물씬 풍기는 보따리를 봉당에다 내던지고는 아무 말도 없이 곧장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우물둑에 앉아 어머니가 풀고 있는 자루를 들여다 보면서도 잠잠한 안방에 마음이 쓰였다. 할머니는 웬지 불도 켜지 않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엉덩이를 출썩거릴 때마다 눈을 흘기며 붙들어 앉혔다. 마침 어머니가 부엌에 들어간 틈새에 나는 얼른 마루로 올라섰다. 방문 고리를 슬그머니 잡아 당기자 어둑한 방안에서는 방구들새를 비집고 들어온 연기 냄새가 풍겨 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할머니는 버선목을 비틀어 잡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오동 나무 머릿장이 웅크리고 있는 윗목에 서서 나는 망연히 할머니의 곱송그린 어깨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아버지는 할머니를 독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오십도 안돼 죽은 할아버지 상여가 나가던 날 상여꾼들의 만가와 요령 소리 앞에서도 할머니는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문상객들이 다 돌아간 깊은 밤에 할머니는 혼자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그것도 소리죽여 울고 있더라는 말이었다. 어차피 그렇게 울껄 남들 앞에서 무에 그리 참을 일인지 모르겠다고 아버지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그날 밤 낯선 소리에 설풋 잠이 깨었다. 봉창을 통해 스며든 달빛이 희끄무레 하게 광목 이불깃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어슴프레 뜬 눈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 보았다. 그것은 두 손가락으로 머리맡 봉창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그때마다 팽팽한 창
호지에서는 문살을 떨며 우는 소리가 났다. 티웅티웅 탄력 있는 소리에 맞춰 할머니는 한숨 같기도 하고 사설 같기도한 가락을 흥얼 거리고 있었다.
강시일 강실 강실 되령, 강실 책을 옆에에 끼고 아주먼네 노름방에.....강시일 고개애 넘어 가서 널랑 죽어 꽃이 되고 날랑 죽어어 나비 되자아...
할머니의 노래 가락은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에서 마냥 이어지고 있었다.



버스가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나는 앞좌석에 이마를 부딪쳤다. 군부대 앞이었다. 두명의 군인이 올라탔다. 버스가 커브를 돌자 미처 좌석에 앉지 못한 그들 중 하나가 보퉁이를 끌어 안은 여인네 앞으로 고꾸라졌다. 여인은 거쿨진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들에게서 눈을 돌리자 차창을 통해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나는 소주병 조각 같이 푸르스름한 바다를 무심히 바라 보았다.
버스가 한적한 길에서 스르렁 소리를 내며 멎었다. 서둘러 내린 나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함석으로 지붕을 얹은 가겟집은 조용했다. 녹이 슨 야트막한 지붕 위에는 느티 나무에서 떨어져 앉은 지난 가을의 낙엽이 침침한 빛을 던지고 있었다. 발자국을 디딜 때마다 얼었다 녹은 푸실한 흙은 손마디 하나만큼씩 빠져 들어 갔다. 불어온 바람에 노린내가 실려 왔다. 가까운 곳에 목장이 있는 모양이었다. 좀전에 경운기가 지나간 듯 지룩한 길바닥은 깊게 패여 있었다. 상수리 나무들이 웅성거리고 서있는 얕은 산을 끼고 제법 걷고 나서야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을은 자욱한 안개에 갇혀 있었다. 바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간간히 길에 박혀 있는 굴껍질만 아니었던들 그곳이 바닷가라는 사실을 잊을 지경이었다. 집들은 산밑에 둥그렇게 모여 있었다.
그 중 한모퉁이에서 할머니가 나고 자랐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불현듯 내가 과거 영겁의 어느 날에 발을 디밀고 서있는 느낌이었다. 제비꽃이 듬성듬성 피어 있는 논둑에는 까칠한 잎새에서 올라온 민들레도 있었다. 그 길에는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들과 만
질 수 없는 시간들이 영겁의 시간대에 머물러 있었다.
사강 할아버지가 일러준대로 외따로 떨어져 있는 하늘 색 지붕 집을 찾아 갔다. 마당 한쪽에는 느타리 버섯을 재배했음직한 하우스가 겨우내 불어친 바람에 시달린 몰골로 서 있었다. 넝마와 다름 없이 너덜거리는 보온 덮개가 형체만 남은 비닐 하우스를 간신히 가리고 있었다. 문짝이 부서져 나간 입구 쪽에는 녹슨 연탄 난로가 엎어져 있는데다 얼었다 녹은 연탄재들이 주변에 널브러져 있어 노인의 최근 살림 형편을 대충 말해 주고 있는 듯 했다.나는 벌겋게 삭은 함석 대문 앞에 서서 안쪽을 기웃거렸다. 집안은 조용했다. 분명 약속을 하고 왔음에도 안에서는 도시 인기척이 없었다.마악 대문을 밀고 들어 서려는 참이었다. 갑자기 뒷편에서 후다닥 내닫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하마터면 함석 대문과 함께 나가 떨어질 뻔 했다. 검정개였다. 잿간에서 뒹굴다 튀어 나온 녀석은 심심했던터에 잘 걸려들었다는 듯이 잿티를 날려대며 짖어댔다. 그 서슬에 대문이 열렸다.
주개이! 입닥쳐! 썩을 놈 겉으니라구.
노인은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검정개를 향해 지팡이를 냅다 휘저어댔다. 그제서야 꼬리를 사린 녀석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 그래도 미진한지 내 뒷전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노인은 무심한 얼굴로 나를 건너다 보았다.
꼭 느이 아부지를 보구 있는 거 겉구나. 쯧쯧! 그러구 보니 너두 인저 많이 늙은거여어.
생각보다 노인은 건장한 편이었다. 거무스름하게 그을은 얼굴에 길다란 다리를 구부려 접고 앉는 모습은 여전했다.겹바지 저고리가 땟국에 절어 쉰내가 날듯한 것만 뺀다면 그래도 예전의 천연스럽던 얼굴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할아버진 여전 하시군요
여전허긴....
노인은 히물쩍 웃었다. 담배진에 찌든 노리끼한 앞니중 한 개가 네말이 틀리다는듯이 빠져 나가 있었다. 선물로 들고 간 담배와 고기 꾸러미를 마루 한켠에 밀어 놓고 앉아서 나는 대문 옆에 놓여 있는 돌절구만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혹시 이 노인의 남은 생애를 떠맡기라도 해야 되는 불상사가 일어 난다면? 불안한 마음은 끝간데 없이 치솟았다. 찌그러진 냄비에 붙어 있는 라면 찌꺼기가 눈에 뜨이자 나는 거의 확신에 가까운 불안을 느꼈다.노인은 연거푸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흐릿한 눈가에는 안질이라도 앓고 있는지 지물지물 곱쟁이가 늘어 붙어 있고 무르춤한 코밑 언저리에는 여전한 수염이 더부룩히 자라고 있었다.
약주는 지금도 여전 하신가요?
흐음,아녀어! 다 옛날 고릿쩍 얘기지....허어 참, 좋은 시절 다 보내구 요 모양 요꼴이 되어서 죽기만 기다리는 신세여. 뭐 간 밑에 물이 찬대던가 해서 멫번이나 빼내긴 했는데 종당 그 병 때문에 멫달 못살꺼라구 하드구먼
나는 섬뜩해서 노인을 다시 쳐다 보았다. 그건 확실히 그을은 얼굴색이 아니었다. 거무스름하게 얼룩이 진 얼굴은 오랜 병에 시달린 자국이었다.
그건 그렇구,너말여, 나 허구 좀 가볼 데가 있어
노인은 마루벽에 걸려 있던 중절모를 집어 들어서 힘있게 눌러 쓰고는 마루 밑에서 뒷축이 다 뭉개져 버린 구두를 꺼냈다. 먼지가 부옇게 내려 앉았으리라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구두는 말끔했다. 미리 준비를 하고 기다렸음에 틀림 없었다. 노인이 큼큼 헛기침을 할 때서야 나는 마지못해 일어섰다. 어디를 가시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나는 노인의 등뒤에서 내비치는 단호한 기세에 눌려 그냥 묵묵히 따라 나섰다 . 마루 아래에서 잔뜩 웅크리고 앉아 못마땅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던 검정개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는 자세로 슬그머니 쫓아 나왔다. 녀석은 노인이 큰길가로 나서자 잠시 쭈볏거리더니 그제서야 할수없이 꼬리를 축 늘어 뜨리고 냄새를 맡으며 왔던 길을 되짚어 갔다. 검정개가 사라지는 길을 따라 뒤를 바라보던 나는 그때서야 진외가 댁이 어느 집이었는가는 물론 어디쯤이었나 조차 물어 보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을은 이미 산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머잖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나는 노인을 부지런히 따라 잡았다.
저어, 할아버님, 진외가 댁은 어디쯤에 있었나요?
으응? 어, 느이 진오갓집 말이여?.... 여기가 아녔어. 이따가 다 알게 될테니깐 암말 말구 쫓아와.
햇살이 한껏 퍼진 적적한 길에는 누군가가 갓 흘리고 간 두엄 덩어리에서 피어 난 김이 꼼지락거리며 하늘로 기어 오르고 있었다. 제법 영근 햇살이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등판을 근지럽혔다. 잠을 설친 탓인지 걷기가 힘들 정도로 노곤했다. 마침 뒷편에서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경운기가 굴러 왔다.
아니,몸두 펜찮으신데 어딜 가신대유?
어허! 자네 잘 만났네 그려, 우리 좀 태워 주게.
어여 타세유, 그러다가 쓰러지시믄 으쩔려구 길에 나스셨에유?
이 사람아 아직은 괜찮여, 그래두 객사헐 팔자꺼정은 아닐쎄. 어디 좀 가볼 데가 있어서 ... 읍내 나가지?
야아, 떡배추 종자 좀 사러 가유.근데 어딜 가세유?
거 왜 소핵교 있잖어? 그 앞에서만 내려 주게.
그러세유
노인이 힘들여 올라탄 뒤를 따라 내가 올라서자 사내는 그다지 곱지 않은 눈길을 내게 던졌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얼른 얼굴을 돌렸다.
근데 한수한테는 여적 연락 안 하셨대매유? 지가 한번 간다간다 하구선 입때 못 가봤으니, 낭중에라두 알믄 섭섭해 하겄시유
냅둬. 저라구 알믄 그 속에서 무슨 수가 있나. 그저 내 명 다 살구 가는 길인데 유난 떨것두 읎구. 나 죽으믄 동네서 길밖에 내던지기야 허겄어. 그렇잖어두 을마전에 종태 자네 아부지 한테 다 맡기긴 했네. 으이휴, 한수 그 녀석두 즈이 아부지서컨 할애비서컨 다 잘못 만나 그 지경인게지....
노인의 푸르스름한 입술이 잠깐 떨렸다.
걔가 나올 때꺼정 살아 있지두 못헐텐데....그것두 딱헌 놈이여. 남들처럼 공부나 했으믄 그래 그런 구석까지 굴러 가서 사람 해허는 몹쓸 짓 했겄어? 그래두 그 놈이 소갈찌 읎는 놈은 아니었구먼, 왜 고때 못참구 칼부림을 해댔는지....
인저 한 삼년 남았지유?
아이구, 난 몰러. 날짜 가는 거 잊구 사는 지가 발써 은젠데.
그렇게 됐을 꺼예유... 으떠케 생각하믄 한수 걔가 억울하지유. 논 밭 다 팔어 갖구 가서 그렇게 몽창 날려 버렸는데, 안 그렇겠시유? 저 같어두 그런 사깃군 놈 헌테는 칼부림 보담 더 헌 것두 허겄시유.
노인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이마에는 핏줄이 팽팽하게 일어섰다.
그렇다구 사람을 쥑여? 아녀, 그건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사는 사람이 되갖군 못헐 짓
인게여.... 펭생을 가막소에 가 산다구 해서 그 죄가 씻기는 줄 알어? 가막소는 지맘속에 있는게여. 그려서 그걸 땅속까지 지고 가는 거여.
노인은 언덕 곁에서 불쑥 나타난 바다를 쳐다보며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슬그머니 손등으로 눈가를 훔쳐 냈다. 경운기 주인은 공연한 말을 꺼냈다 싶은 얼굴로 나를 돌아 보았다.
첨 뵙는 분 같으신대유?
예에, 여기는 초행입니다. 진작에 다녀 갔어야 하는 건데요. 사실 할아버님 하구 다시 만난지도 한 삼십년 쯤 되지요.
눈이 둥그래져서 쳐다보는 그의 길다란 얼굴은 호기심으로 출렁거리고 있었다.
저기 , 내 육춘 누님에 장손자여. 내 죽기전에 한번 보구 싶어서 불렀네.
아 그러세유. 전 또 땅보러 오신 줄 알구선...그래 와 보시니깐 으떠세유? 여긴 요새 난리가 났에유. 서해안 개발인지 뭔지 때문이지유. 외지 사람들이 드나드는 바람에 토백이들 콧구멍에 바람이 들어 갖군 말에유 뻑하믄 멀쩡하게 농사 지어 먹던 땅땡이를 팔어치우니... 요기 앞섬하구 육로 공사를 시작한뒤룬 더 정신이 읎에유. 예펜네들은 죄다 함지박들구 산낙지다 생선이다 팔러 돌아 다닐 궁리만 하지 누가 땡볕에 엎드려 흙댕일 만질려구 해야 말이지유.
그걸 뭐 탓을 허나. 다 시절 쫓아 가는 게지. 나는 말여 농사덜 안짓구 죄다 서울루
어디루 뜰때 이 놈의 나라가 당장 굶어 죽을 줄 알었어. 아니 그랬드니 때 되믄 딴나라에서 소용 되는 걸 척척 사다가 그냥 술술 풀어 주드구먼,뭘 걱정을 허나? 그것 뿐인줄 알어? 접때 농협에 나갔다가 들은 얘긴데 위에서는 도마도가 주렁 주렁 열리구 땅 속에서는 주먹댕이보다 더 큰 감자가 드는 나문지 뭔지가 나왔대는거여 . 그런 시상이니 자네두 씰데 읎는 걱정 말어. 흙댕이 안판다구 해서 굶어 죽지는 않는단 말여.
그렇다믄 여북이나 좋겠시유. 나라 살림 고렇게 엄벙뗑하다가 갈데 읎으믄 바닷속으루들 뛰어들래나 원.
종태란 사내는 볼멘 소리로 대꾸를 했다.
노인이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바다는 회색이었다. 바다쪽에서 후지근한 바람이 불어오자 소금기 돋은 낯선 냄새가 스멀스멀 다가왔다. 내가 바다를 처음 본 것은 열일곱 살 나던 해 여름이었다. 학교와 자매 결연을 맺은 남양만에 있는 섬에서 간부 수련회가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상상 하던 바다는 동해를 통해 태평양으로 남해는 인도양으로, 더 가서는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서 대서양에 까지 닿아 있었다.그것은 언제나 높푸른 파도로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처음 만난 바다는 회색이었다. 게다가 장마를 치르고 난 하늘에서는 사정 없이 열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곳 교사에서 숙식을 하던 우리는 수영할 수 있는 바닷물을 찾아 십오분 가량을 걸어가야 했다. 바닷가에는 모래 사장 대신 지붕을 이을만한 넓적한 돌들이 발바닥을 데울 정도로 달구어져 있었다. 우리는 쉬지 않고 욕지거리를 해대면서도 어김없이 짠물을 찾아 나섰고 물속에 몸을 담그면서부터 또다시 거친 욕설을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물속에서 움직이기만 하면 개흙 물이 올라와서 입속으로 사타구니로 발톱 속으로 파고 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썰물이 되면 허벅지를 허옇게 드러낸 아낙네들이 갈쿠리를 들고 나와 갯벌 바닥을 죄다 파엎고 다녔다. 그나마 아쉬워서 빠져 나가는 물을 쫓아 가던 우리는 그제서야 할수 없이 소금기 돋은 종아리를 쓸어 내리며 우물물을 찾아 숙소로 다시 걸어 나왔고 아낙네들은 우리들 뒷전에서 킬킬 거렸다. 수련회가 끝나던 날, 우리는 지도 주임 선생님과 함께 망둥이를 안주로 소주 한잔씩을 돌려 가면서 볼썽사나운 바다를 마음껏 비웃었다. 다음 날 나는 구죽더미가 즐비한 해안에서 생선 내장이 썩는 냄새를 맡으며 시들한 얼굴로 미련 없이 바다를 떠나 왔다.


국민 학교는 면사무소 담에 연이어 붙어 있었다. 한낮을 막 넘어선 햇볕은 잎사귀를 떨군 플라타너스 가지 위에 머물러 있었다. 덕분에 나는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었다. 햇살은 가지 사이를 헤치고 나오면서 가리가리 흩어져 꽃깍지만 남은 무궁화 울타리위로 야단스럽게 떨어졌다. 널찍한 운동장에는 조무래기들 서너명이 소리를 질러대며 공을 몰고 다니고 있었다. 노인은 교무실로 향하는 길을 젖혀 두고 대뜸 이 순신 장군의 청동상이 서있는 화단 쪽 길로 접어 들었다. 화단 안에는 제각기 생겨 먹은 돌맹이들 앞에 하얀 팻말이 서 있었다. 화강암,수성암,현무암...분명 돌이름을 적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은 묘비명을 보고 있는 착각이 일었다. 반질거리는 청동상 아래에서 그것들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왜소한 자세로 땅바닥에 붙어 있었다. 노인은 하늘색 칠을 해놓은 수돗가를 지나 일학년 교실 팻말이 붙은 교사를 왼쪽으로 두고 학교 뒷편으로 돌아서고 있는 중이었다. 모퉁이를 돌아서는 노인의 걸음새가 허정거리고 있었다. 교사 뒷편은 의외로 넓고 밝았다. 노인은 그제서야 숨을 몰아 쉬며 후문 옆에 있는 긴 의자에 가 앉았다. 노인은 내가 뒤쫓아 왔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잊어 버린 것처럼 어쩌면 마치 해바라기를 하러 나온 한가한 여늬 노인네들 같은 천연스런 얼굴로 앉아 있었다. 노인은 한참동안을 그렇게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나서야 나는 노인이 어느 한 곳에 예사스럽지 않은 눈길을 주고 있음을 눈치 챘다. 노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비석 하나가 서 있었다. 세운지 얼마 안된 모양이었다. 반지르한 오석에서 음각한 부분이 하얗게 도드라져 보였다. 헛기침을 하고 난 노인은 어정쩡하게 서있는 나를 향해 심상치 않은 얼굴로 말했다.
너 가서 저 비문 좀 읽어 봐라.
그것은 기념비였다.
1919년 3월 28일 사강 장날. 발안장에서 불붙었던 만세 운동은 사강 바닷가에서도 일어났다. 그 날은 칠백여명이 장터에 모여서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인근에서 계속 되던 만세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당시 수원 경찰서에서 파견 나온 순사부장이 있었다. 그런데 선언문을 읽고 있던 이곳 솔밭에 교묘히 잠입해 온 그는 양민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고 닥치는 대로 체포하기를 명령했다. 이에 성이 난 군중들은 돌을 던져 가며 맞서 싸웠고 이 참에 순사 부장이 돌에 맞아 죽었다. 4월 12일. 왜경과 헌병들은 이 일에 대대적인 보복을 감행했다. 그들은 인근 6개 마을에 불을 질렀고 그중에서 반수가 넘는 이백여호가 불타 버렸다. 불을 피해 뛰쳐 나온 양민들을 그들은 빨래 방망이나 장작등으로 무수히 때리고 총검으로 찔러 죽이기도 했다.
그리고 뒷면에는 당시 만세 운동을 주관하다 희생당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아무런 감흥 없이 비문을 읽고 돌아섰다.
저기가 바로 그 솔밭이여.
화장실 옆 한 쪽에 허리가 잔뜩 비틀어진 소나무 한 그루가 마당보다 훨씬 돋우어진 곳에 보존 되어 있었다. 기념비가 말하고 있는 칠십여년의 세월은 고작해야 무성했을 솔밭에서 단 한 그루만을 남긴 채 뭉개버린 일과 그 주변의 땅을 두어자 정도 깊이로
깎아 내린 일외에는 없는 성 싶었다. 적어도 내눈에 그런 사건들의 발단이 되었다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또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옛얘기를 전해 듣는 다는 것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나는 차츰 노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저 쪽 논배미들 있는 데 뵈지? 지금두 연기가 있구먼서두 그땐 거기께가 전부 연기루 지척을 분간하기 힘들었던 데여. 골짜구 속에 있어 갖구 연기란 연기, 냄새란 냄새는 죄다 글루 몰켜 들었으니깐 말여.
북쪽 하늘 아래에는 말발굽형의 들판이 가로 누워 있었다. 마침 논둑을 태우던 불길이 사그라진 곳에서 푸른 기를 띈 흰 연기가 꼬리를 사리며 천천히 옆산 쪽으로 사라져 갔다. 쥐똥 나무 울타리를 넘어온 바람이 잠깐 모래를 날려 댔다. 모래 바람이
일자 순식간에 작은 알갱이가 왼쪽 눈안으로 튀어 들었다. 제법 눈이 아팠다. 비벼대며 얼마큼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노인이 천천히 일어섰다.
술 한잔 사줄려?
그러고 보니 점심 때가 이미 지나 있었다. 둘이 함께 교문을 나섰을 때는 해가 정수리께에서 한길쯤 비껴 있었다. 붉은 벽돌로 새로 지은 면사무소를 지나 큰 길가로 나갔다. 가까이 있는 식당에서 곰탕 한그릇과 소주 한병으로 점심을 때우고 나자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 잠이나 푹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래알은 빠져 나갔지만 충혈된 눈은 여전히 쓰라렸다. 노인은 2홉들이 소주 한병으로는 양이 차지 않았는지 가게에서 4홉들이 술 한병과 종이컵 그리고 새우깡 한봉지를 사들고 나왔다.
약주는 그만하시지요.
하지만 노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차부에 가서 뻐쓰를 타야 되니까 부지런히 걸어라. 해떨어지기 전에 다녀 와야지.
예에? 또 어디 가실 데가 있으세요?
왜애? 벌써 지쳤냐? 인저 거기만 가보믄 되니깐 힘들어도 좀 참어.

버스를 타고 찾아간 곳은 바닷가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었다. 지난 가을 고추를 부쳤던 산 밑 둔덕에는 비닐 조각이 군데군데 널려 있었다. 나는 이유야 어떻든 간에 둔덕을 따라 산길로 접어든 노인을 부지런히 뒤쫓아 갈 수 밖에 없었다. 노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운차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머잖아 노인이 발길을 멈추었다. 그앞에는 억새들이 수북히 자라 있었다. 낙엽이 쌓여 있는 골짜기를 따라 흘러 내린 봄기운이 목이 꺾어진 억새 위로 흠뻑 쏟아지고 있었다. 그 바람에 조는 듯 마는 듯 구부리고 있던 오리 나무에서 묵은 잎 하나가 부스스 떨어져 나갔다.
쯧쯧! 그새 이렇게 됐군.
아카시아 나무 가지가 이끼 돋은 길목을 잔뜩 틀어 막고 있자 노인은 썩은 나무 가지를 집어서 그것들을 걷어 냈다. 밑에서 녹슨 모터 오일 깡통이 튕겨 나왔다. 나는 갓
돋아난 별이끼를 밟고 서서 노인이 다가선 곳을 바라 보았다. 북쪽 능선 너머에서 산비둘기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억새로 뒤덮인 그곳은 산소가 분명했다. 노인은 발길로 억새를 다잡아 쓰러 뜨렸다. 그러고 나서 들고온 소주를 조심스럽게 종이컵에 따랐다. 간신히 형체만 남은 봉분 앞에 술잔을 내려 놓은 다음에 옆에다가는 담배를 붙여서 꽂아 놓았다. 담배에서 불꽃이 발갛게 살아나며 조금씩 타들어 가기 시작하자 노인은 흡족한 웃음을 띄고 나를 건너다 보았다.
그 동안에 어지간히도 입이 궁금허셨던 모얭이여. 담배 타들어 가는 것 좀 봐라.
노인은 중절모를 벗어서 싸리 나무 위에 올려 놓고는 정성스럽게 절을 했다.
너두 위선 으르신네 헌테 절부텀 해라.
산비둘기가 가까운 언저리에서 울고 있었다. 봉분 앞에 머리를 숙이고 일어서자 갑자기 훈기를 품은 바람이 새순이 돋는 싸리 나무를 흔들고 지나갔다. 노인은 어느 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바닷물은 마주 보이는 섬쪽으로 빠져 나가 있었다. 아스라하게 멀어진 바닷물은 연 하늘색을 띄고 같은 색의 하늘과 마주 닿아 있었다.
내가 한 열살 쯤 되었을 때였어...
노인이 코맹녕이 소리를 내었다. 술기운 탓인지 노인의 얼굴은 검붉게 달아 오르고 있었다.
김 익호라는 양반이 있었지. 아까 비석에두 그 양반 이름이 들어 갔다만...아주 똑똑헌 분이었다. 이 양반이 수원 고농에서 공부를 마치고 여기 고향엘 와 보니깐 헐일이 너무 많드려. 동네 사람들이라구 삼시 한때 죽 끓여 먹기두 바뻐서 죽어라구 갯벌 만 파던 까막눈 투성이었으니...나라를 뺏겼다구 해서 서러울 것두 읎구, 그저누가 나랏님이 되든 배만 안 곯으믄 천하 태평 인줄 알었으니깐....너남 읎이 다 그럴 수 밖에 읎었다만. 그래 위선 저 위쪽 바닷가에서 야학당을 시작허셨지. 근데 이 야학당이 몰래몰래 소문이 났겄다. 그러구나니까 여기 저기서 똑똑허단 젊은이들이 죄다 모여들구... 아무튼 낭중에 만세 운동이 터지구 나선 그 젊은이들이 수원꺼정 나가서 격문을 뿌리구 아주 대단했지. 을마나 대단했든지 대한 구국단에서 밀사가 내려 오기꺼정 했다. 사실 화성에서 만세 사건이 크게 일어난 건 그 양반들 힘이 컸어.
나는 산소에 묻힌 사람이 김 익호란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하지만 나는 노인의 견해에 구태여 동의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영웅은 시대가 만들었을 뿐이었다.
만세다 뭐다하구 난리쳐서 얻은게 뭐 있습니까? 나라는 이미 넘어간 뒨데. 그러기 전에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은 다 뭐했습니까? 만세만 부르면 나라가 저절로 되돌아 오는 겁니까? 배불러지구요?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불타죽고 매맞아 죽고 칼에 찔려 죽구요.그런 희생을 치르고도 우리가 바로 독립 했습니까? 겨우 남의 힘으로 독립 얻어서는 그것도 제대로 건사 못해 반조각은 쏘련한테 넘겨준 조상들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당했던 건 사실 우리가 힘이 모자라서가 아닙니까? 만일, 우리가 힘이 넘쳐 났더라면 일본을 삼키고 난 다음에 또 태평양인들 못 쳐들어 갔겠어요? 지지리도 못났던거죠 뭐.
노인은 입을 벌리고 나를 쳐다 보았다.
....그려, 그런 말 들어두 싸다. 그치만 그건 모자라구 못나서만두 아녔어. 우린 애시당초 나라끼리 치구 받구 삼키구,그런 시상이 있는 줄두 몰렀구 거기에 껴보지두 못헌 인생들이여. 우리 맘대루 헐수 있는 일들이 뭐가 있었어야지.뵈는 거라군 흙탕물
일어나는 앞바다하구 송챙이두 굶어 죽는 벌건 산등성이 뿐이었어.높은 양반들이 살기좋은 시상이라구, 황국 시민이 됐다구 지화자 좋을씨구 돌쳐 가는 판국에. 그려, 단 한가지는 우리가 헐 수 있었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참어내는 거 말여.
나는 숨을 삼켰다. 노인은 팔짱을 낀 채로 앉아서 수평선을 지긋이 바라 보았다.
난 말여, 무식해서 암것두 몰러. 그치만서두 그 양반들이 밤을 도와 걸어 다녔던 저 쪽길이나 여기서 뵈는 갯물을 보구 있으믄 말이여, 오죽이나 막막했구 답답했을까 허는 생각이 드는 거여.. 게다가 돌짝 틈에 찡겨서 피어 있는 해국을 보기라두 하믄 ....난, 코허리가 시큰거려. 그 놈은 말여, 바깥 시상 꽃들이 다 지구 매운 갯바람이 일어나는 겨울이 되어서야 꽃이 피지. 생각해 봐라, 그 양반들두 다아 우리와 똑겉은 사람들이었어. 매맞으믄 살이 아프구 굶으믄 배고픈 사람이었단 말여...
노인의 백발이 바람에 날렸다.
그런 양반을 내 손으루 그렇게 죽이다시피 하구 난뒤룬 말여...달을 봐두 별을 봐두....
나는 그제서야 노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 보았다. 노인의 얼굴이 창백해져 갔다. 하지만 노인은 내 짐작과는 달리 덤덤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누님이, 느이 할무니가 말이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데루 시집을 와 살림을 허구 있었다. 사둔 집이라구 해두 어린 내가 뭐 어려운 줄 알었겄냐. 더구다나 야학당 선상집이었으니. 그래 헐일 읎는 나는 시집간 누님 댁에 가서 사뭇 살다시피 했었지. 시집 온지 두어 달 밖에 안된 누님은 화초 같이 고왔지. 내가 가믄 슬그머니 엿덩이두 손에 쥐어 주구, 눈치 읎이 때거리에 들러두 아뭇소리 않구 누님 밥을 덜어서 주구 허니 내가 오죽이나 좋았겄냐. 근데 그날은 웬일인지 누님두 안뵈구 김 선상님두 안뵈는 거여. 신바람이 난 나는 왼 집안을 뒤져가며 맘껏 놀았지. 첨에는 먹을 걸 찾아 다닌거였는데 아무도 읎으니까 내 시상인줄 알구선 말여. 그러다가 헛간에서 뭘 찾아냈어.
짚더미 속에서 종이 뭉치를 본거여. 다발루 묶여 있는 종이가 으찌나 탐이 나든지.그때만 해두 우리네는 종이 귀경두 못헐 때였으니깐 . 어린 맘에 욕심껏 움켜 갖구 그냥 도망쳤지. 거기에 뻘건 색으루 자주 독립이니 뭐니 씌여 있는 걸 대충 읽을 줄은 알었지만 그게 무신 뜻인지 꺼정은 내 몰를 때였어. 그걸루 바닷가에서 딱지를 접구 있는데 순사들이 오는 거라. 이상헐 정도로 그 놈의 순사들이 나헌테 으찌나 슬겁게 굴든지 말여, 나는 아예 앞장 까지 서서 누님 집을 가리켜 주었지 뭐여. 낭중에 알었지만 그때가 사강에서 그 난리 났던 직후였으니까 왜경들이 을마나 눈이 벌개 있을 때였겄어. 이튿 날 새벽에 누님 집에 불이 났어. 난 얼결에 뛰어 나갔다가 먼 발치에 서 집 주변에 숨어 있는 왜경들을 봤지. 그때서야 내가 저지른 일이 뭔지를 알었지만 그냥 무섭기만 했어. 김 선상님은 그때 돌아가신거여. 누님은 천우신조로 친정길에 기셨기 땜에 화를 피허셨지. 그 놈들은 김선상님이 자고 있는 걸 확인하군 기다렸다가 새벽에 불을 질른거여. 그게 불질에 시발이었어. 산너머에 있던 느이 진오가 동네두 그참에 화를 당했지. 낭중에 들러보니 집터만 댕그라니 남아 버리지 않었겄냐 .....
나는 이마에서 진득거리는 땀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환청이었을까? 문득 알수 없는 아우성을 들은 것만 같았다.
누님이 실성허지 않은 것만 해두 내가 감사헐 뿐이었다. 느이 할무니는 그때 태중이었어.
노인은 남은 술을 병 채 들고 마셨다.
그 뒤루 바깥 사둔네가 실성을 해버렸지 뭐냐. 누가 붙들어 놓지 않으면 주재소 앞에 뛰어 가서 만세를 부르시는거라. 왜경들이 그저 죽지않을 만큼만 패서 내던져 놓으면 사람들이 떠메서 모셔 오길 한 두번이 아니었구먼.... 내가 열다섯 살에 고향을 떠나서 뱃놈이 되 버린 것두 바루 그 일 때문이었어.그런데 십년만에 돌아와 보니깐 실성했던 노인 양반이 안즉두 살어 기시지 않겄냐. 그때 읃은 장독으루 시난고난 허시면서두 목숨을 부지허구 기시드란 말이여. 그래 내가 맘을 고쳐 먹기루 했다. 느이 할무니는 암것두 모르구선 내가 그 양반을 돌봐디리는 것만 고마워서 들르기만 허면 빈손으루 안보내구 허신거여. 노인 양반이 그래두 수를 다허구 가시는 바람에 내가 쬐끔은 숨을 쉬구 살긴 했다만서두...
그러면 그 어르신네는 언제쯤 돌아 가셨나요?
꽤 됐지. 아마 느이 할무니 돌아 가시기 한해 전인가 될꺼다. 여기 댕기러 오셨다가 소식을 들으셨으니깐...
나는 할머니가 머리맡 봉창을 두드리며 탄식 처럼 부르던 노래 가락 소리를 기억해 냈다.
노인은 비탈길로 내려 섰다. 자갈이 흘러 내린 길을 따라 얼마큼 내려 가자 곧 해안에 가 닿았다. 방금 내려 온 산의 한자락이 바닷물에 깎여서 벌건 아랫 도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노인은 수평선을 향해 가늘게 눈을 떴다.
순태, 너 헌테 못헐 말을 했나보다. 죽을때 꺼정 아무한테도 말 안할려구 했는데.. 아니 땅 속 까지 지구 가서 느이 할아버님 한테나 이실직고 할렸는데... 그 양반 산소를 돌볼 사람이 읎어서 혀를 물고서 너 헌테 연락했다.
노인은 긴 여행에서 막 돌아 온 사람처럼 지쳤지만 푸근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조가비 모양으로 바다를 감싸 안고 있는 해안선에는 폐선 한 척이 엎어져 있었다. 닻을 매단 밧줄이 갯바닥에 길게 늘어진 주변에는 진 초록빛 이끼가 탐스럽게 돋아 있었다. 섬 바깥 쪽에서 부터 바닷물이 밀려 들어 오고 있는 중이었다. 물결을 따라 작은 배 한 척이 해안으로 다가 왔다. 그 뒷편에서 짙은 쪽빛 바다가 넝실 거렸다.

199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