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우리 집 10대 뉴스

2021.01.06 12:46

한성덕 조회 수:3

    2020년, 우리 집의 10대 뉴스

                                                                                                      한성덕




  연말에서 ‘다사다난’은 늘 단골메뉴다. 식상감에 고개를 돌리지만 으레 사용하는 걸 어쩌랴? 올해는 신종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뒤덮었다. 초기의 우리나라는 한껏 뽐냈으나 연말이 다가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바이러스가 재잘거렸다. ‘연말은 인간들만 있냐? 우리도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몹시 취했나보다. 결국은 1,000명대로 올려놓더니 바턴을 넘겼다. 온 세상이 바이러스로 들끓던 한해였다.


1, 원로목사로 대우받다. (11. 16.)


  원로목사는 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시무하고 교인들의 투표로 결정된다. 궁상맞은 일이 끼어들면 투표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 설령 원로가 된다고 해도 매월 한 번씩 주일아침에 설교하고 오후엔 격주로 한다는 건 사실상 없다고 봐야한다. 우리를 무척 좋아하는 후배목사가 그 파격적인 부탁을 했다. 사례까지 챙겨주니 더없이 고맙다. 주일아침마다 ‘오늘은 어느 교회로 가지?’하는 고민이 사라져서 제일 기쁘다. 거기에 원로목사 대우를 받으니 얼마나 좋은가? 담임목사님의 사랑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2, 아내가 목덜미 수술을 하다. (6. 1.)


  아내의 목 뒷덜미가 볼록 솟아있었다. 아프지는 않지만 기분이 좋지 않다고 했다. 암인가 싶어서 내심 걱정했는데, 예수병원에서 지방종이라고 일러주었다. ‘불편하면 수술하라’는 정도여서 한숨을 거두었다. 그래도 두 암에 이어 세 번째 하는 전신마취여서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무리 없이 잘 제거하고 은혜 중에 퇴원했다.


3, 요양원의 사회복지사로 출근하다. (8. 1.)


  2017년 조기 은퇴하고, 아내의 찬양사역으로 근근이 살아왔다. 그마저도 ‘코로나19’로 사역이 막히면서 사는 게 무척 힘들었다. 어느 날, 방바닥을 내리치면서 ‘하나님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살길을 주십시오.’라고 대성통곡하며 간청했다. 채 보름도 안 돼 요양원의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한 달 만에 원장은 원목(담임목사)의 일을 맡겼다.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 내 눈물의 기도를 보셨다.


4, 의형제를 맺다. (8. 29.)


  만난 지 2개월 된 목사에게서 의형제를 맺자는 문자가 날아왔다. ‘내 어디가 그리 좋으냐?’고 했더니, ‘좌우지간 좋다’며 진실을 토해냈다. 부부가 나란히 만나기는 두 번째 만이었다. 의형제 커플링은 없어도 마음의 교감이 강하게 작용했다. 남자도 남자지만 실은 아내들이 좋아야하는데 천생연분이다. 친한 사이라도 의형제는 처음이어서 둥실 두둥실 구름을 탄 듯했다. 인생 늘그막에 의형제라니 감개무량하다.


5, 둘째 딸이 임신하다. (7. 27.)


  그토록 기다리던 둘째딸의 아이가 결혼 5년 만에 생겼다. 시댁이야 말 할 것도 없겠지만, 우리 역시 얼마나 기다렸던가? 능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12월 끝날에는 아이용 이불을 선물했다. 아직도 우리는 그 비싼 이불을 덮어본 적이 없다. 허나 아기이불을 세트로 구입하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아기가 내 품으로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내년 4월이 출산인데 할아버지가 된다니 마음이 설렌다.


6, 결혼 40주년의 의형제 사랑. (10. 9.)


  지난 8월 의형제가 된 친구 목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10월 9일은 아내가 직장에서 쉬니까, 보령 성주 골에 콘도를 빌려 놓겠다.’고 말이다. 친구라도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실은, 우리의 ‘결혼40주년’이어서 의미 있게 보내려고 했으나 어려운 살림이 발목을 잡았다. 그걸 알기라도 했나? 기가 막힌 타임이었다. ‘9일은, 결혼40주년인데 어디로 갈까 고민 중이라’고 했더니 우리보다 더 좋아했다. 만찬을 정성으로 준비해 왔다. 윷놀이를 하고, 이런저런 인생담으로 밤늦게까지 의형제의 사랑을 다졌다. 

 

7, 유튜브에 떴다. (9. 12.)


  4년 동안, 매주 토요일마다 찬양하려고 군산의 ‘다주심 홀’을 다녔다. ‘코로나19’ 때문이기도 하지만,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6개월을 쉬었다. 마음을 정리하고 한 달에 한 번만 가기로 정하고 다시 갔다. 그랬더니 유튜브 방송시스템을 설치하고, 생방송으로 내 설교와 아내의 찬양이 전파를 타는 게 아닌가? 첫날은 몹시 긴장해서 어떻게 설교했는지 어리벙벙했다. 거듭할수록 나도 아내도 안정적으로 잘 하고 있다. 

 

8, 돈이 없어 헉헉대던 날 (8. 15.)


  1월부터 ‘코로나19’ 때문에 찬양사역지가 막혀서 팡팡 놀았다. 카드돌려막기로 살았으니 빚만 수북한 세월이었다. 8월부터 직장은 다니지만 돈이 금방 돌아가는가? 150만원 때문에 막힌 카드빚이 태산처럼 느껴졌다. 인간이 돈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쫓는 사람이 없는데도 쫓기는 기분에 초조했다. ‘사람이 이래서 독한 마음을 가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되레 가난한 자의 처지를 알게 된 것을 감사했다. 

 

9, 큰 딸이 인도선교지로 떠나다. (12. 25.)


  2월 18일, 큰딸 송이가 건강 때문에 선교지 인도에서 나왔다. 그 뒤로 국경이 폐쇄돼 사위는 나오지 못했다. 그러다가 6월 9일 귀국했다. 작은 딸네 집에서 2주간의 자가 격리를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수원의 한 교회에서 마련한 원주 선교관에서 생활하지만, 우리 집에도 종종 오곤 했다. 결국은 지난 12월 25일 특별 전세기편으로 출국했다. 24일은 서울의 선교관까지 짐을 실어다 줬는데, 그날은 막상 섭섭한 마음이 스쳤을 정도였다. 허나 23일은,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서운함과 시건방진 생각까지 겹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평상시도 아니고 ‘코로나19’가 창궐하지 않는가? 더욱이 인도는 세계에서 확진자 순위를 다투는 험상궂은 땅이다. 자기들 결정으로 들어가지만, 사지로 들여보낸다 싶어서 그리도 울었다. 

  

10, 노동현장에서 일하다. (10. 15.) 

 

  의형제를 맺은 친구가, 홍성에서 혼자 빌라 옥상 리모델링을 했다. 세 번 정도 가서 도와주었다. 오후 4시30분이면 하루 일과를 마치는데, 하루는 6시까지 하자는 게 아닌가? 군말 없이 흔쾌히 대답했다. 일이 다 끝나고 식사를 하려다가 ‘갈 길이 멀지 않느냐?’며 식사비로 만원을 준다. 하루 15만원을 주더니, 그 날은 시간 반을 더했다고 5만원이 추가되었다. 식사비까지 일당 21만원을 받았으니 생애 처음 일이었다.

해 저해가 있지만, 새해는 좀 다른가? 다르다고 생각해야 새해의 아름다운 추억이 깃들지 않겠는가?

                       (2020년 12 31일, 한성덕 가정의 10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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