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아래쪽에 묵직하게 자리를 잡고 있던 앨범들을 오랜만에 펼쳤다. 순간순간의 장면들이 너무도 새삼스러워 나도 모르게 지난 시간 속으로 쏙쏙 빨려 들어갔다. 이렇게 시작했었구나 모든 순간이 감격이지만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담긴 모습들이 나의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가장 예쁜 옷에 가장 귀여운 포즈를 담으려고 애썼으리라 상상하며 앨범 첫 장에 꽂혀있는 아들의 백일사진을 꺼내 보다가 무심코 뒷면을 보았다. '백년칼라사진관 코닥 신평 특약점'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백년칼라사진관' 이름 좋네 비싯 웃음이 난다. 그런데 '코닥'이라는 이름 앞에 내 가슴에서 퉁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작년 이맘 때 뉴욕주 로체스터시에 있는 코닥의 창시자 이스트만의 저택인 '조지 이스트만 하우스(George Eastman House)'에 갔을 때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딸이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던 3년 전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이었던 그날도 아름답게 가꿔놓은 저택 정원의 각양 꽃들을 배경으로 요리조리 폼을 잡던 즐거운 추억을 안고 그곳을 다시 찾았다. 그런데 주차장에 다다랐을 때 이전과는 뭔가 느낌이 달랐다. 그렇게 붐비던 관광객들은 어디 가고 안으로 못 들어가게 경계를 쳐 놓았다. 정원을 빙 둘러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더니 근엄한 분위기의 사람들이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160여 년의 사진 역사가 살아있는 이스트만 하우스가 모임장소로 사용되는 등 그 용도가 달라지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서야 코닥의 몰락소식이 떠올랐다. 돌아 나오면서 이전에 왔을 때는 별생각 없이 보았던 이스트만 하우스 안내 표지판 앞에 한참 머물렀다.
기록에 의하면 1854년 뉴욕 북부에서 태어난 이스트만은 평범한 청년기를 보내다가 24살 때 동료로부터 여행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은 것을 계기로 사진에 흠뻑 빠지게 된다. 그의 끝없는 실험정신과 개척정신으로 1880년 건판필름회사를 설립 1888년 코닥(Kodak) 카메라 출시로 전세계인에게 친숙한 인지도 높은 브랜드가 된다. 기업가로서의 독창적인 천재성뿐만 아니라 복지라는 개념도 없었던 그 시절에 직원들과 회사 이익을 공유하고 쌓인 부를 MIT 공대 로체스트 치대 등 비영리기관에 기부를 시작으로 이스트만 음악학교와 심포니 오케스트라 로체스터 대학 의대와 병원을 설립 후원하는 등등 로체스터에는 탁월한 인간미와 민주적인 자질 그리고 박애주의자로서의 그의 기념비적 흔적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 그가 척추협착증으로 활기찬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데 좌절하여 1932년 77살의 나이에 "나의 일은 모두 끝났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라는 유언을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사후 코닥은 전문 경영인들에 의해 1990년 중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디지털 시대로의 변신에 성공하지 못하고 작년 초 결국 파산을 선언한다.
빛을 이용해서 빛을 본 사람들의 빛바랜 소식을 들으면 무궁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청청한 빛을 발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아무튼 백년 동안은 건재할 것 같은 '백년칼라사진관'. 다음에 한국에 가면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 흔적이라도 찾아보고 싶다.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3. 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