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견(安堅)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 화가로 생몰년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본관은 지곡(池谷), 자는 가도(可度), 또는 득수(得守), 호는 현동자(玄洞子) 또는 주경(朱耕)이다. 세종 연간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였고, 문종과 단종을 거쳐 세조 때까지도 화원으로 활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격이 총민하고 정박하며, 고화를 많이 보아 그 요체를 모두 얻고 여러 대가들의 좋은 점을 모아 종합하고 절충하였다. 북송의 곽희(郭熙)의 화풍을 토대로 하고 그밖에 여러가지 다른 화풍의 요소를 수용하여 자기나름의 독특한 양식을 이룩하였다.
이 그림은 중국의 소수(瀟水)와 상수(湘水)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소재로 한 그림이다.
그렇지만 서양의 풍경화와 다른 화의(畵意)를 가지고 있는데 그 진면목을 살펴본다........................................................................................
작품의 주제
〈소상팔경도〉는 조선 전기의 화가 안견(安堅)이 그렸다고 알려져 있는 여덟 폭의 산수화이다. 가로 31.1cm, 세로 35.4cm 크기로 비단 바탕에 수묵을 사용하여 그린 이 그림은 화첩의 형태로 꾸며져 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래 ‘소상팔경’이라 함은 중국 호남성 동정호의 남쪽 영릉(零陵)부근, 즉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합쳐지는 곳의 여덟 가지 경치를 말한다. 〈소상팔경도〉는 그 여덟 가지 경치를 주제로 삼아 각 화폭에 그렸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 1 폭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이 감도는 산간 마을-1첩
제 2 폭
연무에 싸인 산사의 종소리가 들리는 늦저녁 풍경
(煙寺(遠寺)晩種 연사모종)-2첩
연무에 싸인 산사의 종소리가 들리는 늦저녁 풍경
제 3 폭
(瀟湘夜雨 소상야우)-3첩
소상강에 내리는 비
먼 포구로 돌아오는 배
제 5 폭
모래밭에 내려앉는 기러기
제 6 폭
(洞庭秋月 동정추월)-6첩
동정호에 비치는 가을 달
제 7 폭
저녁 노을 물든 어촌
제 8 폭
저녁 때 산야에 내린 눈
8경의 의미
〈소상팔경도〉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지만 몇 가지 경승(景勝)을 일러 말할 때 전통적으로 8의 수를 택하고 있는 예를 우리는 흔히 본다. 관동팔경, 송도팔경, 양산팔경, 단양팔경이니 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이렇게 부르는 배후에는 동양적 수리관(數理觀)과 우주관이 작용하고 있다.
동양의 수치(數値)는 단순히 자연수를 셈하는 단위가 아니라 삼라만상의 대응과 조화의 원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즉, 홀수와 짝수는 음양관(陰陽觀)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양(陽)인 하늘[天]과 음(陰)인 땅[地]에 대응하는 수이다.
《역경 易經》 계사 상(繫辭上)에서, “하늘은 칠이요 땅은 팔이다(天七地八).”라고 하였는데, 이는 홀수인 7을 하늘에, 짝수인 8을 땅에 대응시킨 것이다. 《관자 管子》 오행(五行)에서 말하는 ‘지리이팔제(地理以八制)’라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팔경’의 8이라는 수는 땅과, 땅의 속성을 함께 드러내는 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소상팔경도〉의 풍경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8폭 모두 음의 성질을 가진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산시청람’, ‘연사만종’, ‘어촌낙조’, ‘원포귀범’ 에서 산간 마을의 저녁 안개, 종소리 들리는 산사의 저녁, 어촌에 깔린 저녁 노을, 그리고 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 등은 양의 성질을 가진 아침, 일출, 출발 등에 대응하는 음의 풍경들이다.
또한, ‘밤비(소상야우)’, ‘가을달(동정추월)’, ‘내려 앉는 기러기(평사락안)’, ‘눈오는 겨울(강천모설)’ 등도 각각 낮과 맑음, 봄과 태양, 비상(飛翔), 그리고 여름과 대응하는 음의 성질을 가진 계절이나 풍경들이다. 이렇듯 그림의 대상들이 예외 없이 음의 성질을 띤 것이라는 사실은 땅이 지닌 음의 속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소상팔경도〉에는 움직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적어도 처음 보면 그렇게 보인다. 하늘 높이 치솟은 산들, 태고 때부터 조금도 변함이 없이 흐르고 있었던 것 같은 강물, 그리고 산간 마을을 잠재우는 듯 내려깔린 저녁 안개는 마치 용해된 시간 속에서 완전히 멈추어 있는 것 같기만 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적막감 속에서도 움직임과 시간의 흐름을 알려 주는 것들이 있다. ‘원포귀범’의 저녁 안개 속에 포구를 향해 미끄러져 돌아오는 배, ‘평사낙안’의 모래사장에 소리없이 내려앉는 기러기들, ‘소상야우’의 비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이들은 시간의 흐름을 타고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런 움직임도 배가 포구에 정박함으로써, 기러기가 모래사장에 내려앉음으로써, 비바람이 그침으로써 모두 적막으로 귀결될 것이다. 이처럼 〈소상팔경도〉에는 우주적인 넓이와 깊이 속에서 고요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고, 움직임 가운데 고요와 적막감이 배여 있다.
만물이 생성·분화하기 이전의 궁극적 상태를 도가(道家)에서는 도(道)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도 자체는 어떤 실체도 아니며, 이를 청각적으로 표현한다면 고요하다[靜]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고요의 도에서 움직임[動] 현상계가 생긴다. 그러나 그런 사물들이 움직인 끝에 돌아가는 곳은 다시 고요의 세계, 즉 도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고요는 움직임의 근원이요, 그 귀결이라 말할 수 있다.
〈
소상팔경도〉의 각 화폭을 지배하고 있는 고요함과 적막감은 8폭의 다양한 경치를 하나로 묶는 경향성(傾向性)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개개 화폭은 완결성을 유지하면서 다른 화폭과 연관을 맺으며 더욱 ‘완전한 전체’로 형성되어 가고 있다. ‘완전한 전체’라는 것을 자연의 궁극적 존재 형태나 이치라고 말할 수 있다면, 〈소상팔경도〉는 바로 그러한 존재의 이치를 드러내기 위한 그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상팔경도〉는 누적된 시간 속에서 완성된 예술 형식이며, 또한 이념화, 이상화된 산수화의 한 형식이다. 화가들은 역사적으로 완성된 ‘소상팔경’의 형식과 내용을 추종하면서 철저하게 전통을 따르는 자세로 임했다. 화가들은 그림에 개성을 발휘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든 이미 완성된 형식과 내용을 완벽하게 따라 그릴 수 있을 만큼 수련을 쌓는 일이었다. 따라서 〈소상팔경도〉에서 화가의 개성을 말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것은 안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굳이 〈소상팔경도〉를 그린 안견의 개성에 대해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가 의도하지 않는 가운데 경물(景物)의 배치에, 붓이 슬쩍 지나간 자욱에, 희미한 색의 흐름에 저절로 드러나 있는 것이고, 그것은 그 자신의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몸에 흐르는 땀처럼 저절로 배여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런 요소들을 감지하는 사람은 안견 자신이 아니라, 그림을 보는 감상자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