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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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시편은 하나님과 인간을 잇는
좋은 신학양식

 

 

 

  성경의 다른 어떤 책에서도 시편처럼 선명하고 아름다운 종교적 경험이 다양하게 표현되지는 않았다. 이 다양한 믿음의 표현 속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인들의 심경을 적나라하게 읽을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깊은 지혜(insight)는 이 시편들에서 제사의식과 연결됨으로써 그 영원성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는 각 개인의 삶이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과 상징적으로 연결된다. 수세기에 걸쳐 다양한 삶의 상황에서 얻어진 인간의 영적 체험이 한데 모아진 이 시편은 언제 어디서나 만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이 시편들은 순수하고 벅찬 감동의 자발적인 표현들이다. 일상의 어려움을 통하여 표현된 영적 체험의 실상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따뜻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첫째, 시편은 이스라엘 역사의 전 시대에 걸친 민족신앙의 고백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역경과 투쟁이 담겨 있다. 또한 이 험난한 시대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회의에서 확신까지 그 순례의 여정이 그려져 있다. 각 노래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어떠한 절망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둘째, 시편은 예수님 사역의 중요한 배경을 제공한다. 예수님은 유년시절 그의 가정에서 이 시편을 배우셨고, 또 세례를 받으셨을 때, 주의 사명이 시편의 말을 빌어 선포되었다. 십자가상에서 최후를 맞으셨을 때에도 그의 마음에는 시편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신약성경에서 이 시편보다 더 많이 인용된 구약의 책은 없다.
 

  셋째, 시편은 예배를 통한 필수 요소였다. 전 세계의 성도들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갖기 위하여 이 시편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또한 시편은 예배의 기본 요소일 뿐 아니라 긴급한 개인의 심령을 더욱 풍부한 체험으로 채워 준다.
시편처럼 오랜 세월을 두고 많은 사람에 의하여 사용된 책은 유례가 없다.

 

  이런 면에서만 보더라도 시편문학에 나타난 신학사상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악에서 구원해 주시며, 원수의 억압에서 보호 인도하여 주심을 우리가 확실히 믿고, 민족과 국가는 물론 우리 모두가 개인의 구원과 번영을 위하여 여호와께 애원하고 있음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밀접한 관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만유의 주이심을 확실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여기서 시편문학의 신학사상은 더욱 분명한 선을 그어주고 있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을 나타내는 표현은 매우 다양하다. "하늘에 계신 자"(2편), "나의 방패", "나의 영광",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3편),  "나의 힘",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18편), "나의 목자"(23편), "나의 인자", "나의 피난처", "내 백성을 복종케 하시는 자"(144편) 등,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는 잠시도 살 수 없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항상 현재적으로 우리의 삶에 성경을  적용하여야 한다.

 

  성경의 시간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창조이전의 시간과 창조 당시로부터 종말까지와 종말로부터 영원으로 계속되는 시간이다. 창조 이전의 시간은 시작이 없고 종말 이후는 끝이 없으나 창조 이후부터 종말까지는 시작도 있고 끝도 있는 시간이다.
성경적 시간관은 시간을 목표로 향해 나아가는 의미 있는 운동이다. 시간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현장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역사 안에서 일어났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구원을 위해 영원이 따로 필요한 것이 아니다. 구원은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시간은 항상 카이로스의 의미를 갖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나는 시간을 현재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시편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절절한 고백인 동시에 그것은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노래이다. 시편의 신학(영적) 사상이야말로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항상 살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자신을 알리기 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칼 바르트의 "하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는 명제이다.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 주시는 하나님 말고는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생의 심령에 임하셔서 인생을 하나님의 뜻으로 감화 감동시키심으로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게되고 구원의식을 강하게 느껴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시편만이 갖는 독특한 신학적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신 목적은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는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함은 당연한 일 중의 하나이다. 시편에서처럼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리는 인간의 노력은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하나님과 인간이 연관을 갖고 밀접한 관계가 형성될 때 비로소 정상적인 신학이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시편이 이처럼 방대한 종교적 사상과 생각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시편의 독특한 신학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실로 구약의 거의 모든 신학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그렇지만 시종일관 반복해서 나타나는 하나의 두드러진 강조점이 있다. 시편기자들은 우주를 탁월하게 통치하시는 여호와께서 땅 위에, 그 백성 가운데, 그리고 그 백성을 통해 공정한 통치를 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악인으로 인한 고난과 육체적 곤경으로 난국에 직면할지라도 그들은 온 땅의 재판장께서 해명해 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그 공정한 통치가 그들의 생애 중에 실현되기를 기도한다. 또 의가 승리하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의가 백성들에게 가져다 준 승리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한다.

 

  시편기자들이 예배에 참여하고 율법을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그들이 확신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때로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뛰어넘어 멀리 메시야가 오실 때에 실제로 여호와께서 의로 땅을 다스리실 것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을 얼마나 분명히 이해하고 있는지는 말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실 것이라고 확신 있게 기대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시편기자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에 대한 충성을 고백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의를 수호하려는 열정으로 인해 그들의 말 속엔 자주 저주와 악담이 담겨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악인의 팔을 꺾으시며(시10:15) 그들의 이를 박살내고(58:6) 그들에게 진노를 발하시기를(69:22∼28) 기도한다. 이러한 것들은 시편기자들이 간절히 염원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이런 표현들은 개인적인 복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시편기자들은 그들을 배반하는 자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다(109:4∼5).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땅 위에 이루어지며 악이 심판 받기를(69:22∼28)-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 바라는 그들의 갈망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신약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에 이들과는 다른 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리스도가 속히 임하기를 바라는 신약의 기도도 역시 의가 수호되고 악인이 심판 받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시편기자들은 또한 이교도의 사상과 풍습이 이스라엘의 믿음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여겨 그것들을 혐오했다. 이방 다신교의 여러 측면들이 교묘한 방법(예언적 계시보다 덜 교묘하게)으로 공격해 왔다. 이에 대한 논박은 때로 언급되어 있기도 하다(시68:4에 오히려 여호와께서 "구름을 타고" 행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실은 가나안 족속의 바알 신이 그렇게 묘사되었었다). 또 다른 경우에는 그 시편 전체의 주제가 그에 대한 논박이기도 하다(시편 29편은 가나안의 폭풍신 바알이 가나안 땅에 폭풍을 일으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언급은 셈족의 신화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이웃 나라들과 공통된 어휘와 비유를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 같은 논박 부분은 그들 사이의 영적 분기점을 보여준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다른 신들을 좇는다는 사실이 이 같은 논박을 더 시급하게 만들었다. 만약 그 진리가 대대로 굳게 지켜지고 영속되었다면, 거짓되고 부패한 믿음은 멸망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방인과 의인의 역사적 전투뿐만 아니라 다신 신앙이 이스라엘의 믿음을 위협했음도 알아야 한다.

 

  이교도의 신앙이든 아니면 이스라엘인 배반자이든 악한 세력과의 싸움은 순전한 신자들로 하여금 그 믿음을 더 주장하게 하며 그들의 정직과 충성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소개하게 만들었다. 시편기자들은 이생에서의 구원을 기대했다. 혹자는 박해와 고난, 재난을 당하는 시편기자들이 이생을 포기하고 앞으로 올 생애에서의 만족을 기대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죽게 되면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예배와 찬양도 끝난다고 생각했다(비록 후에 쓰여진 다른 성경 본문에는 그렇지 않다고 되어 있지만).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 의로우심은 이생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었다(시6:5;30:9;88: 4∼5,10∼12;115:17).

 

  시편은 그 어디에서도 예언서에 나오는 기록처럼(사26:19;겔37:1∼14;단12:2) 부활의 소망을 명명백백하게 표현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시편의 몇몇 본문들은 이생 이후에도 하나님과 계속적인 교제를 가지는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시16∼17편;49편;73편). 그러나 그런 본문들에 사용된 표현들은 현세인 이 땅에서의 경험을 나타내는 다른 부분들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시편기자들은 죽은 영혼들이 거하는 세계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스올'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무덤이나 극심한 위험(비유적 표현으로)을 나타내기도 한다. 시편 49:15은 스올에서 구원받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 시편기자에게는 이것이 "영광의 소망"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현세의 구원과 예배의 지속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시편30:3도 다윗이 경험했던 스올에서의 구원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커크패트릭(A. K. Kirkpatrick)은 이러한 본문들이 훗날 기록된 성경의 계시가 나타내듯 내세의 삶에 대한 소망을 나타내는 것으로 쉽사리 작용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시편들(시16∼17편;49편;73편)은 영생교리의 근원과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 거기에는 저자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성령의 마음이 나타나 있다. 인간의 본질과 운명,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비추어 볼 때 인간 최선의 참된 행복이라고 말하는 하나님과의 밀접한 교제는 이생에 국한하거나 갑작스런 최후의 단절을 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적어도 그 교제가 영원하리라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야 한다.

 

  여기에 강조한 이런 점만이 아니라도 수직적 수평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입체적으로까지 시편은 신학사상을 다양하게 내포하고 있음에 무한한 감사와 감동을 가지는 동시에, 계속적으로 연구 묵상할 분야이며, 하나님과 인간을 잇는 좋은 신학사상을 함유하고 있는 고백양식임을 거듭 강조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