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1.15 02:16

첫사랑

조회 수 638 추천 수 29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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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정말 지독한 향기였어. 나는 그 향기에 질식해 죽으리라 생각했지. 한 아름의 백합다발처럼 고결하고 창백한 사랑, 그것으로 인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어.
한 움큼의 약을 입에 털어 넣었지. 망설임 때문에 찬기가 식어버린 물 한 잔이 미지근하게 내 목을 타고 넘어갔어. 그 순간 누군가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고 어머니가 내 방문을 열었어. 며칠 시골에 다녀오마고……. 엄마! 조금만 더 일찍 문을 열지. 나는 이미 약을 삼켜버렸는데…….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니 안타깝기만 했어.
너 무얼 먹고 있니? 물, 물 마셨어?
어머니는 뭔가 석연치 않은 듯 내 얼굴과 빈 유리컵을 번갈아 보았지.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믿고 있었어. 우리 딸이 그런 허튼 짓을 할 리는 없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책상 앞에 앉은 나를 바라보다가 어머니는 급히 손목시계를 보았어. 미리 표를 끊어놓은 기차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이야.
나 다녀오마.
어머니는 서둘러 방문을 닫았어. 그리고 아래층으로 총총히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지. 그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건 어머니가 멀리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것은 세상 전체가 내게서 멀어져가던 느낌이었던 거야.
눈앞이 흐려졌어. 책상 위의 빈 유리컵이 찌그러져 보이고, 내 방의 벽면을 빙 둘러놓은 선반 위 온갖 인형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어. 그래! 나는 열일곱 살, 예쁜 인형을 사 모으던 그런 나이였어. 그러나 아놀드 토인비도 읽었고 루이제 린저, 프랑소와 사강도 읽었어. 그러니까 감성과 이론이 뒤죽박죽되었던 나이였어.

처음엔 그것이 사랑인지도 몰랐지. 매일 아니 순간마다 머릿속에 한 사람 생각만이 가득 차는 것,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그는 처음에 내게 물었지.
무슨 음악을 좋아해요?
아무 대답도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던 내게 그는 맬라니 사프카와 카펜터즈의 레코드판을 가져다주었어. 나는 사실 그때 아무 음악도 좋아하지 않았었거든. 음악보다는 어머니 품에서 풍기는 향긋한 분 냄새와 식탁에 오른 맛있는 음식을 좋아했을 뿐이야. 한 마디로 나는 아직 어린아이였던 거지.
나보다 두 살 어린, 집에서 심부름하는 아이가 어느 날 내게 물었어.
언니는 왜 가슴과 엉덩이가 자꾸만 커져요?
글쎄 그런가.
거울을 보았지만 별 생각이 없었어. 그러니까 나는 내가 한 여자로 성숙해가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거야. 이마에 돋은 여드름을 짜면서 예뻐지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내가 예쁜 소녀인지 아닌지 그런 것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어.
가을이 깊은 날이었지. 그가 내게 말했어.
아리따운 소녀야! 나는 너의 포로야.
참 이상한 일이지. 나는 그를 사로잡지도 않았고 그 앞에서 한 번도 교태를 부려본 적이 없었는데 말야. 내가 누군가를, 그것도 근사한 청년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끼기보다는 점점 가슴에 가득 차오는 그의 존재에 나는 숨 쉬는 일조차 힘들어지기 시작했어. 그때서야 내가 여자가 되었음을 알았어.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는 것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참 힘든 일이더군. 내 온몸의 에너지가 그에게로 다 빠져나가고 있었어. 아무리, 아무리 그를 바라보아도 성에 차지가 않았어. 하나가 되고 싶더군.
하나가 된다는 것, 거기엔 무리가 있었어. 나는 그의 존재를 흡입해 버리고 싶은 욕구에 시달렸지만, 그는 포동포동 살이 오른 내 어깨를 감쌀 때마다 몸을 떨었어. 욕심과 욕심이 스파크를 일으켰지. 그의 욕심과 나의 욕심이 달랐던 때문일까? 우리는 둘 다 지쳐버렸어.
나는 그의 존재를 빨아들이지 못했고 그도 나를 갖지 못했어. 그저 그와 나 사이에 숨이 막히는 향기만이 진동을 했을 뿐.
사랑은 괴롭더군. 그 괴로움을 해결하는 길은 내 육신을 해체하여 뽑아낸 영혼을 그의 존재 안에 합일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열일곱 살의 고운 몸이 아까운 줄도 몰랐지.
죽어야지. 내 사랑의 고결함을 위해, 영원히 그의 가슴 안에 살기 위해…….

눈앞이 캄캄했어. 어둠이 왔지. 내 생명의 통로에 두꺼운 블랙커튼이 걸리고 사랑을 위해 피어오르던 고고한 향기만이 치솟고 있었어. 편안했어. 이렇게 해서 완전히 그의 사람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어. 그 완전한 합일을 말이야.
뭔가 희미한 왁자지껄함 속에 온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어. 누군가 내 몸 속에 고무튜브를 우겨넣고 있었던 거야.  
지독한 괴로움이 한바탕 지나가고 나서야 눈이 떠졌어.
언니야! 왜 그랬어?
심부름하는 아이가 나를 바라보며 울고 있더군. 아뿔싸! 그 애가 집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던 거야. 어머니를 따라 시골에 간 줄 알았거든. 내 엉덩이와 가슴이 왜 자꾸만 커지는 지도 모르던 애가 내가 왜 그래야 했는지를 알았을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새 도톰해진 그 애의 앞가슴이 눈에 들어왔어. 내가 입다가 준 분홍색 스웨터가 그 애의 몸에 딱 달라붙어 있더군.    
어쩌면 너도 소녀에서 여자가 되는 통과의례를 이렇게 겪게 될지도 몰라.
나는 그 말을 혼자 삼키고 말았어. 산소호흡기가 내 입을 막고 있었기에.

이건 정말 오래 전의 일이야. 나는 그때부터 누군가와 합일된다는 생각을 포기했어. 스스로 향기가 되기를 체념했던 거지. 또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그런데 나는 지금 나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사랑 앞에서 첫사랑을 생각하고 있어.      

가을바람이 소슬하다. 내 인생의 가을에 바람이 분다. 나는 왜 지금도 첫사랑을 하듯이 가슴이 뛰는 걸까. 죽고 싶다. 그와의 영원한 합일을 위해 다시 내 육신을 해체시켜 영혼을 뽑아내고 싶다. 그리고 그의 뇌수에 녹아들고 싶다.
사랑은 첫사랑이나 마지막 사랑이나 같은 것이었어. 그때 내 목숨을 구해주었던 작은 계집아이가 지금 내 곁에 있다면 다시 말하겠지.
언니는 왜 자꾸만 어깨가 움츠러들어요? 주름도 늘었어요. 이제 흰머리도 돋는군요.
그러나 그 애는 알까. 그때나 지금이나 사랑은 같은 것이란 것을…….
아이야! 나를 구해다오. 나는 또 이 향기에 질식해 죽을 것 같구나. 이 지독한 향기를…….


                   **                             **

로스앤젤레스 인근의 한적한 공원, 피크닉 테이블에 앉아 무엇인가를 쓰고 있던 여인은 고개를 든다. 엇비슷이 비쳐든 오후의 햇살이 살짝 찌푸린 여인의 양미간으로 하얗게 쏟아진다. 고요히 미소 짓는 그 표정은 쓸쓸하기만 하다. 여인은 이제껏 써내려 간 노트 두 장을 북- 찢어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집어넣어 버린다. 그리곤 노트를 접어 숄더백에 넣고 일어선다.
아까부터 그녀를 흘끔거리며 주위를 서성이던 더러운 노파 하나가 슬그머니 다가와 피크닉 테이블 옆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한다. 노파에게서 풍겨 나오는 고약한 냄새가 막 그 자리를 떠나려던 여인의 코끝을 스쳐간다. 여인은 잠시 고개를 돌리고 물끄러미 노파를 바라본다.  
머리를 동여맨 붉은 면직 스카프는 빛이 바랜 채 땟물이 흐르고, 그 밑으로 삐져나온 흰 머리칼이 주름진 얼굴 위에 부스스 흩어져있다. 앞니가 다 빠졌는지 검고 합죽한 입술은 커다란 코밑에서 무엇을 씹는 듯 연신 오물거리고, 흘깃 여인은 바라보는 퀭한 회색 눈동자에는 핏발이 서 있다.
노파가 그녀를 보고 웃는다. 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드러난 자주 빛 잇몸에는 누런 송곳니만이 양옆에 붙어있다. 순간 침 한 방울이 노파의 입술에서 먼지투성이 검은 외투 깃으로 뚝 떨어져 내린다.  
여인은 돌아선다. 그리곤 공원의 출구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가슴에 싸한 바람이 불고 있다.
인생의 여정……. 소녀에서 노인이 되기까지……. 저 노파에게도 첫사랑이 있었을까. 가슴을 저미게 만들던 그런 사랑이……. 너무 벅차고 괴로워 차라리 죽고 싶던 그런 사랑이 말이다.                        
여인은 자신의 마지막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그 안에서 그녀의 자아가 소멸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그리고 노년에도 그 사랑에 안주한 채 행복할 수 있을지를…….
터벅터벅 공원을 걸어 나가는 여인의 발걸음은 힘이 없다. 사랑을 맞은 환희가 아니라 사랑을 보낸 슬픔같이.
공원입구 주차장에 도착한 여인은 자신의 첫사랑과 같은 해에 태어난 78년형 볼보 승용차에 시동을 걸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노파의 손길에 이리저리 휩쓸리던 찢어낸 노트의 첫 번째 장이 공원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찌그러진 깡통 몇 개를 찾아낸 노파는 어기적어기적 공원 깊은 곳으로 사라져간다.
노트의 두 번째 장은 쓰레기통 속에서 말보로 담배 갑과 포테이토 칩 비닐에 파묻히고, 바닥에 떨어져 누운 노트의 첫 장이 가을바람에 파르르 몸을 떤다.  
바람이 일 때마다 팔락이는 노트 장 끝에서 여인의 첫사랑이 자꾸만 뒤척인다.
그건 정말 지독한 향기였어. 그건 정말 지독한 향기였어. 그건 정말 지독한…… 그건 정말…….      
한글로 써 내려간 아득한 첫사랑이 이국의 공원 바닥에서 파닥일 때, 길 건너 교차로를 막 빠져나가는 낡은 자동차 안에서 마지막 사랑을 꿈꾸는 여인의 두 눈엔 고독한 가을이 어린다.(*)  
    -미주문학세계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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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나 2004.12.16 06:48
    그래, 그건 지독한 향기였어...첫사랑!
    루치나님의 '첫사랑' 읽는 동안 푸욱~ 사랑에 빠진 듯한 느낌이네요.
    새해엔 또 다른 사랑을 꿈꾸어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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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숙 2004.12.16 16:48
    그러세요!
    꼭 사랑을 꿈꾸시기를....
    사랑은 나이와 관계없이 끝없이 생성되는 것이라 하더이다.
    지금도 사랑에 빠지신 어느 선배님 말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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