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정론지 – 민족논단 2002년 11월호
1902년 12월 22일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시작된 한국인의 이민이 올해로 꼭 100년이다. 1850년대부터 사탕수수 재배가 본격화된 하와이에 처음 투입된 노동력은 중국인이었다고 한다. 1897년까지 그 숫자가 무려 4만 6천명에 이르렀는데 그들의 세력이 강해질 것을 두려워하는 하와이 주민들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두 번째로 받아들인 노동력이 일본인들이었다. 1885년부터 하와이 이주를 시작한 일본인의 숫자는 1902년까지 대략 2만여명이 되었다는데 하와이 주민들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다시 한국인의 이민을 결정했다.
이일을 주선한 사람은 1890년 주한미국공사가 된 선교사 알렌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고종에게 백성들이 개국진취를 원하고 때마침 흉년이 들어 고생하고 있으니 하와이로 보내어 척식산업과 신문화를 도입하도록 하는 것이 현책이라고 건의하였다. 고종의 허락이 떨어지자 민영환을 총재로 한 '수민원'이란 곳을 설치하고 이민사업을 관장하게 되었는데 처음엔 희망자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당시 외국의 사정을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 선뜻 이민을 떠나겠다고 나설 리 만무했다. 이에 당시 인천 감리교회의 목사이던 존스(G. H. Jones)가 나서서 교인들을 설득하였는데 사실 처음에 떠나게된 사람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그후 100년, 생계를 위해 이억만리 타국으로 향했던 한민족의 발걸음은 이제 그 목적이 많이도 변했다. 일제시대엔 정치망명, 6.25 전쟁 후엔 입양된 고아들과 미군과 결혼한 여성들이 태평양을 건넜다. 60대엔 아주 드물게 유학을 떠나는 젊은이들이 있었으며, 70년대에 이르러선 한국에서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전쟁 발발이 무서워 떠나온 예도 많았다.
또 미국이민은 한국 수사기관이 인터폴의 협조를 받기 전까지는 각종 경제사범과 정치사범들의 도피통로였으며,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엔 단지 새로운 환경과 넓은 땅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자본을 들고 들어왔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조기유학 붐 현상이 일고 요즘 주변을 돌아보면 서울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여럿 아이들을 앞세우고 들어와 정착해 가는 모습을 쉽게 보게된다. 현재 미주 전역 한인의 숫자는 약 2백만 여명에 이른다는데 그 살아가는 모습도 참 각양각색이다.
이민 10년차인 내가 처음 이민을 왔을 때 가졌던 남다른 느낌은 한국식당을 찾았을 경우 손님들이 종업원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이었다. 땡큐를 연발하는 미국인들의 일상에 흡수된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나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았다.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상인이라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식당을 찾게된 그들이 같은 상인끼리의 심정을 헤아려주는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이민 초기자이던 내 입장에서 혹 훗날의 내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에서였는지 가슴 깊은 곳을 관통하는 듯한 짧은 아픔이 느껴져 왔다.
두 번째로 남다르게 느낀 점은 길을 걷다가 마주 걸어오는 미국인을 만났을 때 상대를 위해 길을 비켜주는 모습이었다. 워낙 인구밀도가 조밀한 서울에서 살던 나는 마주 오는 사람을 밀치고라도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바삐 걷은 습관에 익숙해있던 사람이었다. 만약 서울에서 남에게 길을 양보하는 아름다운 행위를 보인다면 어쩌면 상대는 고마워하기는커녕 별 바보 같은 사람 다 보겠다고 중얼거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과연 선진 국민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는 미국인들의 얼굴에 항상 떠올라있는 미소였다. 서울에선 거리에서나 엘리베이터 같은 곳에서 사람들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 굳은 표정에 이유 없이 기분이 나빠지던 기억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남모르는 사람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주어 상대의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나도 모르게 그들을 따라 미소를 짓게되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으니 말이다. 그후 한인들이 모인 곳에 가게되면 그 표정만으로도 미국직장에서 일하는 사람과 한국직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쉽게 구별할 수가 있었다. 또 얼마나 긴 시간을 미국에서 살아왔는지도 슬쩍 짐작해보았다.
네 번째는 공중도덕에선 모범이 되는 미국인의 냉정함에 간혹 가슴이 섬찟해던 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혹 관공서에 일을 보러가게 되면 미국인들의 서류절차는 몹시도 늦게 진행되었다. 그 친절과 미소에도 불구하고 한번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는 번복의 여지가 없이 냉정한 그들을 보면서 결코 정에 치우치지 않는 사람들이란 것을 알게되었다. 또 개인적으로 금전문제가 개입되어있을 경우에 그들은 얼굴을 바꾸는 한이 있어도 결코 손해보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그런 경우를 통해 그들과 우리의 다른 점이 쉽게 산출되었다. 우리는 평소에 친절하지도 않고 잘 웃어주지도 않으면서 때론 공적인 일도 정에 이끌려 결정을 하게되는 경우가 많다. 또 이미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도 상대가 통사정을 하게되면 슬슬 마음이 움직여 번복하게 되는 사례가 있기도 한데 이로 인해 부정부패라는 악습이 한국사회에 생겨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섯 번째는 교육의 모습이었다. 내 아이가 서울에서 초등학교 3년을 다니는 동안 담임 선생님에게 촌지를 건네는 학부모들의 모습을 무시하지도, 그렇다고 찬성하지도 못하던 나는 참으로 골치 아픈 세월을 보냈다. 교사들은 담임을 맡게되면 학생들의 환경 조사서를 통해 부모의 학력과 직업 현재, 살고있는 아파트까지 꿰뚫게 되고 만약 살만큼 사는 부모가 담임을 찾아보지 않을 경우 아이들을 이유 없이 못살게 구는 예도 있었다. 어쩌다 내 아이가 그런 경우에 해당하게 되었고 나는 분한 마음을 삭히며 학교를 찾아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따져보리라는 칼날 같은 말들을 가슴속에 숨기고 갔지만 막상 늙수그레한 남자교사를 마주하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라의 새싹들을 가르친다는 사명감을 지닌 교육자이기보다는 생활에 지친 한 가장의 모습이 처량하게 비쳐오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이유 없이 괴롭히는 것은 교사로서 할 행위가 아니라는 말을 몇 마디 하기는 했지만 내 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만일을 위해 준비해간 봉투를 교사에게 건네주고 말았다. 결국 나도 교육현장에서 되풀이되는 악습에 꼭두각시가 된 사람일뿐이었다. 운동장을 걸어나올 때는 너무도 마음이 쓸쓸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이가 괴롭힘을 당하기 전에 미리 찾아가 볼 것을 그랬다는 후회감도 앞섰다. 그러니까 나는 좀 버텨보긴 했어도 교육의 속물성에 동참하는 속물 학부형을 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민을 오니 그러한 것들부터 해방된 것이 홀가분했다. 하긴 요즘은 한국도 많이 달라져서 내가 아는 초등학교 교사는 스승의 날, 반 아이가 선물로 준 꽃까지 되돌려주었다며 울상을 지었다. 마음의 선물은 간직하고 싶지만 그것도 뇌물로 추정될까 두렵다는 것이었다. 포용성 있는 미국의 교육에 잘 적응해 가는 아이를 바라보며 문득 나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자율성과 창의성을 존중하기보다는 일률적인 학습방법에 혹사당했던 것을 생각하니 좀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일찍이 나에게도 미국에서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좀 다른 삶을 살게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초기에 살던 미국인 보수지역에서 바라보던 모습이었고, 나중에 들으니 한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의 학교는 한인 어머니들의 치마 바람이 서울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하긴 이 미국이란 넓은 땅은 어느 지역에 사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생활문화를 갖게된다. 몇 십 년을 살아도 한인타운을 맴돌다가 영어 한마디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주로 미국인들 사이에서 살다보면 아예 한국말을 더듬거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민사회의 특수성은 대인관계에서도 볼 수 있다. 넓은 땅에 흩어져 사는 한인들이지만 그들의 대인관계는 한인타운의 교회나 단체 안에서 묘하게 얽히게 된다.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하다보면 새삼 그 관계의 협소함에 놀라게되는 경우가 있다. 인간에게 생계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것을 생각할 때 사실 우리 이민자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느냐보다 어떤 사람들과 어떻게 알고 지내냐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언젠가 소설 한편을 읽으며 그것을 공감해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원로작가 이호철 선생의 [남녘사람, 북녘사람]이란 실화 소설집에서 였다. 6.25 전쟁 중 1.4후퇴를 앞둔 시점에서 퇴진하는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한 의용군 부대가 남하하는 중이었다. 사실 말이 지원병력이지 그들은 북한군 주부대의 퇴각을 용이하게 하게 위한 총알받이로 남하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 중엔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상인과 농부 등이 섞여 있었는데 길을 가다보니 학식깨나 들은 사람들은 그들끼리, 또 식당이나 목욕업을 하던 상인들은 자기들끼리,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농부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더라는 것이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그 무거운 행렬 속에서도 인간의 끼리의식이 그렇게 표출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든 한인 이민사회에도 끼리 의식이 작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본국과는 상황이 다른 이민사회에서 한인들은 인위적인 인간관계에 집착을 하게되는데 이 관계의 첫단계는 대부분 신앙을 내세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크게 보면 그들의 공통점은 같은 신앙을 가진 한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세부적인 모습을 들여다보면 사실 그들은 살아온 배경과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다 보면 결국 그들의 끼리 의식은 무너지고 온갖 불협화음이 들려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단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인간이 모인 곳에는 항상 문제가 발생하는 된다는 얘기가 되는데 어쩌면 고국을 떠난 이민의 외로움이 부추긴 관계의 집착이 이런 결과를 낳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민 2세나 3세쯤 되면 한인사회를 별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 1세가 주를 이루는 이민사회에서 한인사회의 필요성은 절실하다. 지난날 한국식품점 하나 없었던 한인사회에 이제는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온갖 상가와 편리한 의료시절, 언론기관등을 이용하며 뒤늦게 이민을 와 편리함을 누리는 내 입장이 때론 황송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사람들 중에는 한인사회의 시끄러움에 식상을 하여 간혹 미국사회에 묻혀 사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고 미국문화에 젖어도 변하지 않는 황인종의 얼굴처럼 그들의 뿌리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한국인의 의식이 지배하고 있으리라 본다.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이 미국이란 넓은 땅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는 소수민족의 한인사회는 사실 협소하다. 나태한 태도로 그 속의 편리함만을 추구하다보면 정보산업이 발달한 본국인들 보다 한 박자 느린 삶을 살게 되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때론 이민자들의 문화의식이 한국을 떠나오던 그 시점에서 멈추어버린 예를 쉽게 보게된다. 전혀 미국화 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빠르게 발전하는 본국의 문화에도 젖지 못한 사람들은 사실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이 되기가 쉽다. 그러니까 그들은 법적으로는 미국인이되 실제로는 자신이 떠나오던 시절의 한국문화를 발전 개선하려 하지도 않은 상태에 머물러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시야는 본국에 살 때보다 더 좁아지기 쉽고 잘못하면 우물안 개구리식의 안일한 의식 속에 미국의 일부 선진문화와 좀 뒤떨어진 한국적 사고방식 속에 특이한 군상의 모습을 하기가 쉬운 것이다.
우리는 흔히 제 3공화국 군사정권이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룬 반면 정치와 정신문화면에서는 오히려 후퇴를 낳았다고 평가한다. 그 말을 우리 이민사회에 한번 비추어보자.
이제 이민 100년인 우리들의 모습이 그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구한말, 노동을 팔기 위해 시작된 한인의 이민은 어느 시점까지는 생계와 직결되어있었다. 보다 질이 나은 생활을 위해 진종일 리커마켓을 지키던 한인업주들이 강도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은 예는 허다하며 그 시간 속에서 한국말을 한마디로 구사하지 못하는 자녀들이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모습으로 성장했다. 물론 한인 2세들 중에는 훌륭히 성장하여 미 주류사회에서 활약하는 경우도 있고, 오히려 한인사회로 전환하여 실력봉사를 하는 흐뭇한 예도 많다. 그러나 때로는 미국과 한국이 뒤섞이고, 옛것과 새것이 조화와 질서를 이루지 못한 이민사회의 정신문화를 이제는 좀 정립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한다. 그러니까 지난 100년의 세월을 치달아 온 경제 중심의 사고를 이제는 좀 문화 중심을 바꾸어 볼 시기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어느 날 L.A.의 인터내셔널 공항에서 미국에 처음 입국하는 한국인 이민자를 붙들고 당신은 왜 미국 이민을 희망했습니까? 하고 물어본다면 아마도 먹고 살길을 찾아왔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사람보다는 아이들의 교육과 좀 더 질 좋은 삶을 위해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새로운 이민자를 맞아들이는 이민사회가 아직도 경제사범의 온상이되거나 모호한 문화와 질 낮은 의식을 지닌 모습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민 100년, 어찌 보면 우리의 이민사회는 물질에서 정신으로 옮겨가는 전환점에 있다. 일부의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난립하는 단체를 통해 본국의 정치적 영향력을 꿈꾸고있는데 이는 오랜 병폐를 이민사회까지 옮겨오려는 잘못된 발상이다. 우리는 이제 개개인이 이민자로서의 사명감을 지녀야한다. 미국인이나 다른 민족에게는 한국인이라는 긍지를, 본국인에게는 타국에서 투지있게 한국인의 뿌리를 내려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미국의 선진문화와 한국의 전통문화를 같이 바라보며 우리에게 좋은 것은 발췌하여 흡수 발전시키고, 적당치 않은 것은 과감히 버릴 줄도 아는 지혜를 지녀야하지 않을까.
앞으로의 100년은 미국이란 거대한 땅 위에 한민족만의 독특한 정신문화가 빛나기를 기대해 본다.(*)
1902년 12월 22일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시작된 한국인의 이민이 올해로 꼭 100년이다. 1850년대부터 사탕수수 재배가 본격화된 하와이에 처음 투입된 노동력은 중국인이었다고 한다. 1897년까지 그 숫자가 무려 4만 6천명에 이르렀는데 그들의 세력이 강해질 것을 두려워하는 하와이 주민들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두 번째로 받아들인 노동력이 일본인들이었다. 1885년부터 하와이 이주를 시작한 일본인의 숫자는 1902년까지 대략 2만여명이 되었다는데 하와이 주민들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다시 한국인의 이민을 결정했다.
이일을 주선한 사람은 1890년 주한미국공사가 된 선교사 알렌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고종에게 백성들이 개국진취를 원하고 때마침 흉년이 들어 고생하고 있으니 하와이로 보내어 척식산업과 신문화를 도입하도록 하는 것이 현책이라고 건의하였다. 고종의 허락이 떨어지자 민영환을 총재로 한 '수민원'이란 곳을 설치하고 이민사업을 관장하게 되었는데 처음엔 희망자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당시 외국의 사정을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 선뜻 이민을 떠나겠다고 나설 리 만무했다. 이에 당시 인천 감리교회의 목사이던 존스(G. H. Jones)가 나서서 교인들을 설득하였는데 사실 처음에 떠나게된 사람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그후 100년, 생계를 위해 이억만리 타국으로 향했던 한민족의 발걸음은 이제 그 목적이 많이도 변했다. 일제시대엔 정치망명, 6.25 전쟁 후엔 입양된 고아들과 미군과 결혼한 여성들이 태평양을 건넜다. 60대엔 아주 드물게 유학을 떠나는 젊은이들이 있었으며, 70년대에 이르러선 한국에서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전쟁 발발이 무서워 떠나온 예도 많았다.
또 미국이민은 한국 수사기관이 인터폴의 협조를 받기 전까지는 각종 경제사범과 정치사범들의 도피통로였으며,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엔 단지 새로운 환경과 넓은 땅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자본을 들고 들어왔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조기유학 붐 현상이 일고 요즘 주변을 돌아보면 서울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여럿 아이들을 앞세우고 들어와 정착해 가는 모습을 쉽게 보게된다. 현재 미주 전역 한인의 숫자는 약 2백만 여명에 이른다는데 그 살아가는 모습도 참 각양각색이다.
이민 10년차인 내가 처음 이민을 왔을 때 가졌던 남다른 느낌은 한국식당을 찾았을 경우 손님들이 종업원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이었다. 땡큐를 연발하는 미국인들의 일상에 흡수된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나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았다.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상인이라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식당을 찾게된 그들이 같은 상인끼리의 심정을 헤아려주는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이민 초기자이던 내 입장에서 혹 훗날의 내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에서였는지 가슴 깊은 곳을 관통하는 듯한 짧은 아픔이 느껴져 왔다.
두 번째로 남다르게 느낀 점은 길을 걷다가 마주 걸어오는 미국인을 만났을 때 상대를 위해 길을 비켜주는 모습이었다. 워낙 인구밀도가 조밀한 서울에서 살던 나는 마주 오는 사람을 밀치고라도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바삐 걷은 습관에 익숙해있던 사람이었다. 만약 서울에서 남에게 길을 양보하는 아름다운 행위를 보인다면 어쩌면 상대는 고마워하기는커녕 별 바보 같은 사람 다 보겠다고 중얼거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과연 선진 국민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는 미국인들의 얼굴에 항상 떠올라있는 미소였다. 서울에선 거리에서나 엘리베이터 같은 곳에서 사람들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 굳은 표정에 이유 없이 기분이 나빠지던 기억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남모르는 사람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주어 상대의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나도 모르게 그들을 따라 미소를 짓게되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으니 말이다. 그후 한인들이 모인 곳에 가게되면 그 표정만으로도 미국직장에서 일하는 사람과 한국직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쉽게 구별할 수가 있었다. 또 얼마나 긴 시간을 미국에서 살아왔는지도 슬쩍 짐작해보았다.
네 번째는 공중도덕에선 모범이 되는 미국인의 냉정함에 간혹 가슴이 섬찟해던 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혹 관공서에 일을 보러가게 되면 미국인들의 서류절차는 몹시도 늦게 진행되었다. 그 친절과 미소에도 불구하고 한번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는 번복의 여지가 없이 냉정한 그들을 보면서 결코 정에 치우치지 않는 사람들이란 것을 알게되었다. 또 개인적으로 금전문제가 개입되어있을 경우에 그들은 얼굴을 바꾸는 한이 있어도 결코 손해보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그런 경우를 통해 그들과 우리의 다른 점이 쉽게 산출되었다. 우리는 평소에 친절하지도 않고 잘 웃어주지도 않으면서 때론 공적인 일도 정에 이끌려 결정을 하게되는 경우가 많다. 또 이미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도 상대가 통사정을 하게되면 슬슬 마음이 움직여 번복하게 되는 사례가 있기도 한데 이로 인해 부정부패라는 악습이 한국사회에 생겨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섯 번째는 교육의 모습이었다. 내 아이가 서울에서 초등학교 3년을 다니는 동안 담임 선생님에게 촌지를 건네는 학부모들의 모습을 무시하지도, 그렇다고 찬성하지도 못하던 나는 참으로 골치 아픈 세월을 보냈다. 교사들은 담임을 맡게되면 학생들의 환경 조사서를 통해 부모의 학력과 직업 현재, 살고있는 아파트까지 꿰뚫게 되고 만약 살만큼 사는 부모가 담임을 찾아보지 않을 경우 아이들을 이유 없이 못살게 구는 예도 있었다. 어쩌다 내 아이가 그런 경우에 해당하게 되었고 나는 분한 마음을 삭히며 학교를 찾아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따져보리라는 칼날 같은 말들을 가슴속에 숨기고 갔지만 막상 늙수그레한 남자교사를 마주하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라의 새싹들을 가르친다는 사명감을 지닌 교육자이기보다는 생활에 지친 한 가장의 모습이 처량하게 비쳐오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이유 없이 괴롭히는 것은 교사로서 할 행위가 아니라는 말을 몇 마디 하기는 했지만 내 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만일을 위해 준비해간 봉투를 교사에게 건네주고 말았다. 결국 나도 교육현장에서 되풀이되는 악습에 꼭두각시가 된 사람일뿐이었다. 운동장을 걸어나올 때는 너무도 마음이 쓸쓸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이가 괴롭힘을 당하기 전에 미리 찾아가 볼 것을 그랬다는 후회감도 앞섰다. 그러니까 나는 좀 버텨보긴 했어도 교육의 속물성에 동참하는 속물 학부형을 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민을 오니 그러한 것들부터 해방된 것이 홀가분했다. 하긴 요즘은 한국도 많이 달라져서 내가 아는 초등학교 교사는 스승의 날, 반 아이가 선물로 준 꽃까지 되돌려주었다며 울상을 지었다. 마음의 선물은 간직하고 싶지만 그것도 뇌물로 추정될까 두렵다는 것이었다. 포용성 있는 미국의 교육에 잘 적응해 가는 아이를 바라보며 문득 나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자율성과 창의성을 존중하기보다는 일률적인 학습방법에 혹사당했던 것을 생각하니 좀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일찍이 나에게도 미국에서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좀 다른 삶을 살게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초기에 살던 미국인 보수지역에서 바라보던 모습이었고, 나중에 들으니 한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의 학교는 한인 어머니들의 치마 바람이 서울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하긴 이 미국이란 넓은 땅은 어느 지역에 사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생활문화를 갖게된다. 몇 십 년을 살아도 한인타운을 맴돌다가 영어 한마디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주로 미국인들 사이에서 살다보면 아예 한국말을 더듬거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민사회의 특수성은 대인관계에서도 볼 수 있다. 넓은 땅에 흩어져 사는 한인들이지만 그들의 대인관계는 한인타운의 교회나 단체 안에서 묘하게 얽히게 된다.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하다보면 새삼 그 관계의 협소함에 놀라게되는 경우가 있다. 인간에게 생계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것을 생각할 때 사실 우리 이민자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느냐보다 어떤 사람들과 어떻게 알고 지내냐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언젠가 소설 한편을 읽으며 그것을 공감해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원로작가 이호철 선생의 [남녘사람, 북녘사람]이란 실화 소설집에서 였다. 6.25 전쟁 중 1.4후퇴를 앞둔 시점에서 퇴진하는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한 의용군 부대가 남하하는 중이었다. 사실 말이 지원병력이지 그들은 북한군 주부대의 퇴각을 용이하게 하게 위한 총알받이로 남하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 중엔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상인과 농부 등이 섞여 있었는데 길을 가다보니 학식깨나 들은 사람들은 그들끼리, 또 식당이나 목욕업을 하던 상인들은 자기들끼리,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농부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더라는 것이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그 무거운 행렬 속에서도 인간의 끼리의식이 그렇게 표출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든 한인 이민사회에도 끼리 의식이 작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본국과는 상황이 다른 이민사회에서 한인들은 인위적인 인간관계에 집착을 하게되는데 이 관계의 첫단계는 대부분 신앙을 내세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크게 보면 그들의 공통점은 같은 신앙을 가진 한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세부적인 모습을 들여다보면 사실 그들은 살아온 배경과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다 보면 결국 그들의 끼리 의식은 무너지고 온갖 불협화음이 들려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단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인간이 모인 곳에는 항상 문제가 발생하는 된다는 얘기가 되는데 어쩌면 고국을 떠난 이민의 외로움이 부추긴 관계의 집착이 이런 결과를 낳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민 2세나 3세쯤 되면 한인사회를 별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 1세가 주를 이루는 이민사회에서 한인사회의 필요성은 절실하다. 지난날 한국식품점 하나 없었던 한인사회에 이제는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온갖 상가와 편리한 의료시절, 언론기관등을 이용하며 뒤늦게 이민을 와 편리함을 누리는 내 입장이 때론 황송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사람들 중에는 한인사회의 시끄러움에 식상을 하여 간혹 미국사회에 묻혀 사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고 미국문화에 젖어도 변하지 않는 황인종의 얼굴처럼 그들의 뿌리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한국인의 의식이 지배하고 있으리라 본다.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이 미국이란 넓은 땅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는 소수민족의 한인사회는 사실 협소하다. 나태한 태도로 그 속의 편리함만을 추구하다보면 정보산업이 발달한 본국인들 보다 한 박자 느린 삶을 살게 되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때론 이민자들의 문화의식이 한국을 떠나오던 그 시점에서 멈추어버린 예를 쉽게 보게된다. 전혀 미국화 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빠르게 발전하는 본국의 문화에도 젖지 못한 사람들은 사실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이 되기가 쉽다. 그러니까 그들은 법적으로는 미국인이되 실제로는 자신이 떠나오던 시절의 한국문화를 발전 개선하려 하지도 않은 상태에 머물러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시야는 본국에 살 때보다 더 좁아지기 쉽고 잘못하면 우물안 개구리식의 안일한 의식 속에 미국의 일부 선진문화와 좀 뒤떨어진 한국적 사고방식 속에 특이한 군상의 모습을 하기가 쉬운 것이다.
우리는 흔히 제 3공화국 군사정권이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룬 반면 정치와 정신문화면에서는 오히려 후퇴를 낳았다고 평가한다. 그 말을 우리 이민사회에 한번 비추어보자.
이제 이민 100년인 우리들의 모습이 그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구한말, 노동을 팔기 위해 시작된 한인의 이민은 어느 시점까지는 생계와 직결되어있었다. 보다 질이 나은 생활을 위해 진종일 리커마켓을 지키던 한인업주들이 강도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은 예는 허다하며 그 시간 속에서 한국말을 한마디로 구사하지 못하는 자녀들이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모습으로 성장했다. 물론 한인 2세들 중에는 훌륭히 성장하여 미 주류사회에서 활약하는 경우도 있고, 오히려 한인사회로 전환하여 실력봉사를 하는 흐뭇한 예도 많다. 그러나 때로는 미국과 한국이 뒤섞이고, 옛것과 새것이 조화와 질서를 이루지 못한 이민사회의 정신문화를 이제는 좀 정립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한다. 그러니까 지난 100년의 세월을 치달아 온 경제 중심의 사고를 이제는 좀 문화 중심을 바꾸어 볼 시기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어느 날 L.A.의 인터내셔널 공항에서 미국에 처음 입국하는 한국인 이민자를 붙들고 당신은 왜 미국 이민을 희망했습니까? 하고 물어본다면 아마도 먹고 살길을 찾아왔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사람보다는 아이들의 교육과 좀 더 질 좋은 삶을 위해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새로운 이민자를 맞아들이는 이민사회가 아직도 경제사범의 온상이되거나 모호한 문화와 질 낮은 의식을 지닌 모습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민 100년, 어찌 보면 우리의 이민사회는 물질에서 정신으로 옮겨가는 전환점에 있다. 일부의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난립하는 단체를 통해 본국의 정치적 영향력을 꿈꾸고있는데 이는 오랜 병폐를 이민사회까지 옮겨오려는 잘못된 발상이다. 우리는 이제 개개인이 이민자로서의 사명감을 지녀야한다. 미국인이나 다른 민족에게는 한국인이라는 긍지를, 본국인에게는 타국에서 투지있게 한국인의 뿌리를 내려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미국의 선진문화와 한국의 전통문화를 같이 바라보며 우리에게 좋은 것은 발췌하여 흡수 발전시키고, 적당치 않은 것은 과감히 버릴 줄도 아는 지혜를 지녀야하지 않을까.
앞으로의 100년은 미국이란 거대한 땅 위에 한민족만의 독특한 정신문화가 빛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