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미당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시/강초운, 평론/이구한)
2017.12.22 09:10
제2회 미당문학 신인 작품상 당선작(시/강초운, 평론/이구한)
혼자를 버릴 때외 4 편
강초운
육지의 끝으로 밀려나서
기역자로 꺾인 마음이 낚싯대를 편다
다섯 칸의 마디가 하나씩 뽑힐 때마다
기역 소리를 내며 솟아 오르는 반달
바다가 둥글어진다 둥근 힘의 밖으로 밀려
무인도에 서면
기억하는가 아무도 없는 자리에 혼자 설 때
어둠도 한 마리 낯선 짐승되던 일
기역자로 꺾인 몸에 사뭇
파고들던 달빛의 차가움 그냥
차가워진 게 아니야 혼자라 느낄 때만
바다도 추워지는 게야
스스로 몸을 꺾기도 하고
견딜 수 없는 거품이 솟아오르는 거야
살이 깎이는 거지 수많은 풍경들이
그저 그림처럼 배경이 되고
나와 풍경 사이가 한없이 멀어질 때
소식이 오는 거지
한정 없이 멀어질 때라야
혼자를 버리는 거지 거품으로 숨을 쉬는 거야
그래서 팽팽해진 바다를 끌어올리면
반달이 둥글어지는 거야 물거품을 흘리며
나 역시 누군가의 곁이 되는 거지
바다와 달빛이 낚싯대를 타고
몸을 섞을 때 물거품은 나 혼자를
마구 짓이기며 사람의 소식을
철썩이며 보내던 것이었어
혼자 보는 그 여자
어떤 여자 걸어온다
외길로 도시의 한 복판에
수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는 오후 한 시에
나를 이 몸과 마음을 모두 안다는
처음 보나 익숙한 그 표정으로
수박화채를 들고 덥지야
그럴 때 초가을 바람이 불어 온다
가만히 보니 그 여자
다리가 없다 다시 보니
그 여자 몸이 안 보인다
얼굴만 남아서 나에게
표정을 주고 있다
너무 놀라 사방에 사람들이 있는가
보는데 사람들의 식사
연애 또한 실패와 이별이
빵가게의 냄새처럼
내 하나밖에 없는 몸을
휩싸 안고 온다
다시 보는 그 여자 춥지야
목도리 들고 온다
지금은 도시의 한 가운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걸어가는 곳인데
나만 보는구나 그 여자
내 어머니구나
옛날 사람
연뿌리를 팔고 있는 사람 장화에는 연못의 진흙이 옛날을 매달고 있다 연뿌리에도 트럭에도 옛날은 묻어 있어 지금 이 도시의 시장거리에서 오늘을 살고자 하는 자의 발바닥에 흙이 끼인다
연근 하나를 진흙으로 발라 숯불에 구워주던 할머니
질척이며 흙의 발가락을 빠져 나오는 사람들 이마에 각자 제 몫의 연근이 얹히면 서둘러 연못으로 가고 집을 새로 짓듯 연꽃을 심고 호미질을 하고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흙 속에 심겨 살림집을 차리면 잘 씻은 연뿌리만 진흙 밭을 빠져나온 맨발 같다
사람은 어디에 있나 도시는 시장은 어디로 떠났나 연뿌리를 팔던 그 사람 어디로 갔나 오색 무지개 햇빛은 사방에서 비를 말리며 솟아 오르는데 갈대 무성하여 발가벗은 내 몸뚱어리 잘 감추어 주던 낙동강이라던 그 강가의 숯불은 어디로 갔나 소나기를 어디에 감추어 두고 지금 이 해가 그림자도 없이 잘 익은 연근의 구멍같이 부풀어 오르나
흙을 떼어내고 연뿌리를 잘라 먹으면 실이 몇 겹이나 나오고 실에 친친 감기는 몸뚱어리를 몇 번이나 풀고 나서야 사람처럼 두리번거린다 할머니는 허리를 펴지 못하고 나는 옛날 사람으로 트럭 옆에 앉아 졸고 있는 사내의 몸에 실을 감는다 맨발이 오늘 밖으로 빠져 나온다
식욕의 그림자
고구마의 입이 터지면 싹이 나온다 병의 뚜껑을 열고 몸을 비틀면 자세가 바뀐다 아궁이의 연기 속을 깊이 들여다 보면어제의 몸들이 구워지고 있다 오늘의 몸에서도 빠져 나가는 내일의 입
산도 지우고 하늘도 지우고 지우개의 때도 지우고 나면 지워진 하늘이 구름을 지운다 지우던 시간도 지워지고 나면 어디선가 고구마 하나 잠을 깨고 일어선다 사는 것이 모두 지우는 일이라고 병 속에 들어간 당신이 말한다 도처에 병들이 일어서거나 앉거나 누워 있다 분홍 황토 푸른 노오란 색들의 경계는 보이지 않는 병 뚜껑이다
사람이란 살아가는 그 무엇 적어도 지울 만한 정도의 자세를 갖는 몸 틈만 나면 지우고 다시 새로운 자세를 갖는 일
고구마는 냄새로 말한다 껍질 채로 숯불에 구워질 때 이런 적 있었나 누군가에게 욕망이 되어 본 적 있었나 당신은 병 속에 있다 푸르고 푸른 고향의 언덕처럼 두텁고 다스하여 누구도 모르는 병 속에 우리가 있다 색의 경계를 이를 악 물고지킨다 군고구마의 냄새가 뚜껑을 연다
우리 모두는 병 하나씩의 입막음을 시도했던 한 때 고구마였던 사람들이다 어제의 터뜨림을 기억하는 싹이다 오늘의 몸들이 구워지는 내일의 입이다
물의 집에서 물로 살다
때로는 중이 되어 염불을 외거나
참선에 잠겨 나를 잊기도 하고
더러는 새가 되어 송충이를 잡아먹기도 하였다
빚쟁이를 피해 포장마차 골목에서
잊어진 안주가 되기도 하였다
속세의 어떤 직업인이 되어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었고
누군가의 곁이기나 한가 고민도 하였다
우리 모두 그것으로 대해져가는 세상의 모습이
돌고 도는 물의 한 때이며
나 또는 너 그리고 우리 모두
물의 집에 와서 집인 체하는 물이었음을 느낄 때
중이 되거나 직업인이 되기도 하고
새가 또는 꽃이 되기도 하는 물의
나무를 보게 된다
흐르는 바람에 연꽃들의 머리가 빗겨지고 있을 때
첩첩 산봉우리의 나무들이 파도치고 있을 때
가슴 속에 파도치고 있을 나무의 물을 보게 된다
어느 집으로 살든지
우리가 물의 집으로 사는 지금
어제는 비였던 시냇물을
집으로 세우고 있지 아니한가
우리 모두는 흘러가서 모이고
모였다가 말라서 비로 내릴 것 아닌가
비의 어떠한 집이 되든지
물의 집에 흩어져 사는
어떠한 사람으로 남을 것 아닌가
― 김추인의 시 세계에 관한 일고
이구한(李丘翰)
1
한 시인의 시 세계를 그의 시 작품들을 통해 다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시편들이 시인의 일상적인 상황을 서술하여 보여줄 때는 어느 정도 그 내용과 의미를 향한 추적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일상을 넘어서 세계에 대한 인식과 같은 세계관이나 존재적 본질에 관한 인생관 등을 시적 추상과 관념의 언어를 도구로 하여 전개시킨 경우는 독자들을 곤혹스럽게 하기 일쑤이다.
김추인 시인은 속세의 일상적 세계보다는 형이상학적 사유로 그 시적 특질을 형성한다. 특히 그의 사막이나 모래에 대한 사유는 심오한 면이 있다. 또한 그의 시적 사유의 개진은 호흡이 긴 편이며 따라서 독자에게는 벅찬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의 시적 개성은 꽤나 독특하여, 그의 사유 방법이나 표현 방식도 당대의 시류에 쉬이 편승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김추인의 시가 매혹적인 것은 그 시인 특유의 독특한 사유 세계에 있다. 그의 시편들은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 시적 대상을 깊이 있게 형상화하므로, 그의 작품 일반을 1) ‘모래의 원형질’에 대한 사유와 2) ‘선험적 자아’의 관점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보면서, 사유의 동력이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고찰해보기로 한다.
2
먼저, 김추인에게 있어서 모래란 무엇일까? 모래의 의미와 모래의 원형질에 관해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그의 시 「모래의 서식지」이다.
어디신가 그대의 거처는
사철 속도와 욕망이 몰아치는 불의 지대를 떠나온
여기가 거기인 것이냐
또 거기를 헤매던 내 역마의 바람이 분다
빛과 그늘이 갈라서는 경계에서
소리가 고요 쪽으로 기우는 경계에서
이동의 기류가 일어서고 있다
경사 이편에서 경사 저편으로
텅 비움으로 향한다는 그대의 거처가 궁금하다
한 생을 발 뒤꿈치 쯤에서 푸석푸석 밟히었을 날리었을
그대의 고단한 생을 짐작해본다만
어디서 와서 훑고 긁고 씹히다가
어디로 떠나는 것인지 들판이 모래밭으로 넘어지고 있다
그대의 뿌리를 놓치고
어둑살 빠르게 내리는 공터에 서서 나,
그대의 향방을 가늠해보는 것은 원형질의 그리움 하나
못내 떨치지 못하는 것 아니겠더냐
함부로 지나간 시대의 발자국들
필사적으로 남아
이제나 저제나 깨침없는 어제의 삶에 묶어들 살아간다만
모래의 근원이 어찌 이런 것뿐일 리야
사하라는 거기 사하라로 남아 있으면 좋겠다
제 안에 두고도 사무치는
내 유목의 모래밭 백만 평
― 「모래의 서식지」 전문
‘그대의 거처’는 ‘욕망이 몰아치는 불의 지대를 떠나’왔다. 여기서 ‘불’은 관념적인 욕망의 심상으로 역할을 한다. ‘그대’는 불로 연단을 받아 욕망을 초월한 상태에 있다. 2연 끝에서, ‘그대의 거처‘는 ’텅 비움으로‘ 향하는데, 이는 탈속한 텅 빈 마음의 상태로서 내적 성향을 의미한다. 이러한 내적 성향을 사물화한 것은 바로 모래의 이미지이다. 우선, ‘그대의 거처’는 제목인 ‘모래의 서식지’를 의미함을 알려준다. 모래를 의인화하여 재2인칭 대명사 ‘그대’로 표상한 것이다.
모래의 근원을 찾아 떠나고자 하는 내 역마의 바람이 불고, 급기야 이동의 기류가 일어선다. ‘그대의 거처’를 찾아 떠나지만 ‘그대의 뿌리’를 놓치고 그리움을 떨치지 못한다.
모래는 ‘함부로 지나간 시대의 발자국들’에 여념을 두지 않는다. 한 시대는 가고 새로운 시대는 또 갈 것이기 때문이다. 필사적으로 모래의 본질을 지키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떠한 시대에도 합류하지 않고 견뎌야 한다. 현세에 물들지 않는 순수성이 모래의 근원 중 하나라고 믿는 화자는 모래의 원형(原型)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다른 작품 「멀어지는 풍경들의 시간」에서, 화자는 ‘모래 한 톨에 우주의 원형질이 다 들어 있다’는 확신을 표명한다. 별이나 지구나 행성들은 우주에서 태어났으며 불의 지대를 지나왔다. 따라서 지구의 한 입자인 모래에도 우주의 원형질이 있다고 믿으며, 태양이 목숨들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에 더하여, ‘내 저무는 몸에 우주가 들어와 계시다’고 놀라운 진술을 피력한다. 내적 자아가 현상적 자아를 바라보며 확인한 말이다.
사하라는 화자가 헤매며 가고 싶은 곳인데, 이 사막과 모래는 동질성이 있다. 화자는 세계와의 동질성을 발견한 것이다. 이때 ‘제 안에 두고도 사무치는 내 유목의 길’은 나의 본질을 찾아 떠나는 유목이며, 세속을 벗어난 탈속의 경지임을 알 수 있다.
이제 화자는‘나의 적소는 사하라’라고 외친다.
나의 적소는 사하라, 그곳에 가고 싶다 바람과 모래가 사는 곳
바람과 모래 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붉은 땅이지
나 그곳에 가면 다 알아 고향 들녘처럼 옛집처럼
다 읽어낼 수가 있어
무슨 일로 모래뿐인지 바람뿐인지 어찌하여 낙타는 느린지 노을
이 타는지 붉은 흙집의 아이들이 열사의 땡볕에서 왜 콧물을 달고 있
는지 억년 쌓은 것이 모래뿐인지 모래 위 바람이나 놀고 있는지 붉은
사구를 넘어오는 긴 그림자 낙타 행렬인지 푸른 시대의 기억인지
나는 호모 노마드, 사유하는 유랑자,
강철의 굉음 강철의 어둠으로 동여진 밤을 떠나
가자 동키야 모래의 길을
날마다 여기에서 여기로 내 달리는 하루살이의 사막, 바람과 햇발
과 사람들이 모래처럼 담백하게 살고 있는 나라 나의 적소
우리는 유랑하는 노마드, 꿈꾸는 족속이지 바람과 모래와 노래를
기다리는
― 「호모 노마드」 전문. 시집 『오브제를 사랑한』.
사하라는 바람과 모래가 살고 있는 곳, 바람과 모래 같은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다. 화자는 사하라 그곳의 상황을 고향 들녘처럼 또는 옛집처럼 다 읽어 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볼 수 없고 알 수 없지만, 화자는 모든 욕망을 버리고 바람 같이 사는 그곳에 모래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안다.
화자는 강철의 굉음과 어둠으로 동여진 도시의 밤을 떠나 모래의 길을 가자고 낙타에게 권유한다. 모래의 길은 굉음의 경계를 넘어, 그리고 저 어 어둠의 경계 너머에 있다. 이러한 경계를 넘어 화자는 사막을 유목지로 선택한다. 그곳은 야생의 순수한 눈빛이 빛나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기적인 욕망에 묶여 있는 세상에서 해방하고자 하는 심정이 깃들어 있다. 사하라는 바람과 모래 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사하라에 꽃이 피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 꿈을 꾸리라. 화자는 이곳에서 꿈을 꾸며 바람과 모래와 노래를 기다린다.
시 「전갈의 땅」에서, 김추인은 전갈이나 키우는 불모의 땅에 ‘양수의 집을 포기하고 들끓는 사막을 행군하겠다면/ 지독히 외로워야겠지/ 외로운 만큼 탱탱하게 독해져야곘지’라고 다짐한다. 시인은 사막에서 외로움을 예감하며, 그 외로움을 사명감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어둠이 무거울수록 바람찬 별은 치열하게 빛날 것을 아는 것이다.
또한 시인은 시 「틈새의 생, - 모래가 키우는 불」에서 ‘누가 알 것인가/ 내 열두 늑골 뗏장 밑에 엎드려/ 향방 없는 일상의 사막 가운데로/ 때 없이 날 내달리게 하는 독푸른/ 전갈 한 마리’를 상상한다. 하루하루가 너무 낯설고 긴장하는 순간의 연속이다. 그것은 때로는 자신이 전갈로 비유되기도 하고 때로는 전갈에게 쫓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래는 불을 키우는 또 하나의 생존의 동력이 된다.
시인의 모래와 관련된 사유는 폭이 다양하다. 모래알, 모래밭, 모래시계, 모래의 길, 모래 서식지, 사막, 타클라마칸, 모래의 꽃, 사구, 소금모래, 소금사막, 모래의 땅, 모래의 시간, 모래의 근원, 실크로드 등의 다양하게 관련된 어휘들을 총동원한다. 이러한 모래의 사유는 외로움의 유목이며, 또한 에너지를 얻기도 하는 유목으로서, 거의 인간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방식들이다.
드디어 시인은 시 「길 위에서 부할하다」에서 신기루 같은 기적을 본다.
붉은 모래의 땅에서 서두리지 않는 목숨길이 있습니다
세상의 척박과 목마름, 제 가진 모든 모서리를 지운 채 죽은 풀 가지들이 체적(體積)을 줄인 공의 형상으로 구르고 구르는 사막의 표지 기호가 있습니다
풀 가지 늑골 틈새로 바람 피리를 불며 떠도는 음유의 시
제 몸에 예언을 새기고 떠도는 부활초, 십 년도 백 년도 어쩌면 천 년도 견디다 물을 만나 마른 몸을 푸르게 일으켜 세우는 풀, 눈 이 부신데요 사람의 아들, 그분만 같은데요
저 홀로 구름이 되어 사막을 흐르는 풀이 있습니다
죽어도 죽을 수가 없는 바람 속의 미라가 있습니다
침묵하는 식물들의 진화는 늘 시끄러운 족속들의 탄식보다 너그 럽고 깊고 멀어 걸림이 없음을 알겠습니다
스스로 바큇살로 굴러 구름의 길을 가는 풀이 있습니다
― 「길 위에서 부활하다」 전문. 시집 『오브제를 사랑한』
모래의 땅에 목숨의 길이 있다. 화자는 세상의 척박과 목마름 따윈 불편한 모서리로 여긴다. 이러한 모서리를 다 지워야 사막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증언한다. 사막의 기호는 세상의 메마름이나 목마름 등 제 가진 모든 모서리를 지운 채 공의 형상으로 구르는 것이다. 이곳에서 생명체들은 체적을 줄여야 살아갈 수 있다. 풀은 가지 늑골 틈새로 바람 피리를 불며 떠돈다고 기술하고 있다.
저 홀로 구름이 되어 사막을 흐르는 풀이 있다. 사막에서 백년 이상 바람에 구르다 말라죽은 줄기가 부활하여 꽃이 피고 씨앗을 퍼트린다는 부활초, 죽어도 죽을 수가 없는 바람 속의 미라는 스스로 바큇살이 되어 구름의 길을 간다. 화자는 부활초에서 스스로 굴러가는 바큇살의 이미지를 도출해낸다. 모래의 땅에서 오랜 세월 스스로 바큇살이 되어 구르며 피워 올린 꽃은 얼마나 소중하며 값진 결실이겠는가, 화자는 체적을 줄이고 죽었던 꽃이 모래에서 부활한 부활초를 본다. 그 뿐이랴. 마른 몸을 푸르게 일으켜 세운 부활초를 통해 눈부신 사람의 아들인 예수가 부활하는 것을 본다. 화자는 현실태와 잠재태가 만나는 지점에서 시간의 크리스탈을 본다. 부활한 예수의 모습에 대해 현재에서 과거를 본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를 보는 시각이다. 그것은 눈을 감고 의식의 상태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부활초 그 자체가 결정체 이미지인 것이다.
이제야 모래의 길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겠다. 모래의 길은 불을 지나는 고난의 길이기도 하지만 부활의 근거지인 것이다.
우리는 모래에서 별과 지구를 낳은 우주의 원형질이 있음을 알았다. 모래 한 톨에도 생성의 원리가 담겨 있다. 존재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한 모래 사유의 동력은 우주에 닿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3
이제 우리는 김추인의 시세계에서 모래에 대한 사유방식이 어떻게 선험적 자아와 관련되는지 그 세계를 열어보기로 한다.
생이란 허공에서 홀로 사는 것이 아니며, 자아와 타자의 관계 속에 이루어진다. 존재에 대한 인식이 대상을 어떻게 형상화하는지를 김추인의 시 「모래시계」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한 생이 다른 생을 밀고 가는 세상이 있습니다
추락하면서 날아오르고 거기 착지할 바닥이 있다는 것을 믿으며 밀리어 끝까지 가보다 어느 지점에선가는 뛰어내려야 하는 모래의 시간이 있습니다
거꾸로 뒤집히면서 비로소
다시 뛰어내릴 수 있는 힘이 축적된다는 거
앞서거니 뒷서거니 뒤의 생이 앞의 생을
밀어주기도 받쳐주기도 한다는 거
한 알 한 알 그 지점에 닿기까지 닿아서 낙마하기까지 바닥에 손 짚고서야 가슴 저리게 오는 시간들이 있습니다
지금보다 눈부신 나중이 있다고 믿는 일
착각의 힘이여 신기루여
그대들 없이 무슨 힘으로 날이면 날마다 물구나무 설 수 있으리
하루 스물네 번씩이나 몇십 몇백 번씩이나 뒤집히면서 깨지면서 찰나 또 찰나를 제 생의 푸른 무늬 짜 나가는 것은 죽어서도 그리 울 개똥밭에서 쳇바퀴 돌며 뒤집히고 넘어지는 우리 모래의 시간에 도 기다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 손 잡은 일 없어도
함께 세상 끝까지 가 보다 뛰어내리는 모래의 시간이 있습니다
― 「모래시계」 전문. 시집 『프랜치키스의 암호』.
여기서 모래시계라는 사물의 실체는 묘사되지 않는다. 또한 현실의 구체적인 상황도 드러나지 않는다. 사람으로 비유된 모래의 동작만 서술되면서, 모래의 이동을 의식화한다. ‘거꾸로 뒤집히면서 비로소 다시 뛰어 내릴 수 있는 힘이 축적된다는 거’는 위태로운 경우에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유이다. ‘저 바닥에 손 짚고서야 가슴 저리게 오는 시간들이 있습니다’에서 미래의 시간은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평정을 유지한다.
‘한 번 손잡은 일 없어도/ 함께 세상 끝까지 가 보다 뛰어내리는 모래의 시간이 있습니다’에서 모래시계 안의 공간은 세계를 비유한다. 이 공간은 한정적인 공간이다. 제한된 공간 안에서 사회적 집단의 동료의식도 엿볼 수 있다. 위기에 처한 환경에서도 더불어 사는 삶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에서 선험적 자아를 보게 되는데, 칸트가 말하는 선험적 자아는 가능적 무한자이다. 시적 화자가 현상적 사물을 의식으로 지향하고 있으므로 ‘모래시계’를 향한 지향적인 자아를 확인할 수 있다. ‘모래시계’라는 사물은 화자의 의식 안에 있다. 따라서 선험적인 관점에서 ‘모래시계’는 내재적인 것이다. 생의 투쟁에 관해, 시인은 사람들의 현실적인 상황을 사실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선험적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인식의 차원이다. 칸트는 하나의 책상이 경험적으로는 우리 바깥에 실재하는 사물이지만 선험적으로는 우리 안에 표상으로 존재하기에, 이러한 의식의 확장을 세계의 확장으로 보았다. 김추인 시인이 의식의 확장에 매우 관심이 큰 것을 알 수 있다.
이번에는 「모래시계」와 「모래시계 * 2」를 대조해보기로 하자.
아직 가보지 못한 밀어내지 못한 시간이 있다
모래의 시간 줄줄 흘러나가는 여기는
나의 지옥이며
여러분의 지옥이며
뒷길에서 뒷길로 이어지던 세상의 골목
돌아보고 싶지 않을 문밖이겠는데
뵈지 않은 거기가 저기쯤이라고
몹쓸 희망의 끈 놓지 못한다
아직 닿아보지 못한 떨어져 내리지 못한
푸른 착지점
저길까 저길까 레일은 달리고 있다
이제 모래의 저울 축은 지나간 풍경 속으로
한참 더 기울고
여기는 모래알들의 쓸쓸한 난간이다
열차의 환승역은 어디쯤일까
생의 터닝포인트 모래시계는 짚어낼 수 있을까
― 「모래시계 * 2」 전문, 시집 『행성의 아이들』
앞의 「모래시계」가 ‘거꾸로 뒤집히며 다시 뛰어내리는 동작과 행위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뒤의 「모래시계 *2」는 진일보하여 생의 터닝 포인트에 관심을 기울인다. 또한 앞의 「모래시계」가 ‘믿으며 - - - 뛰어내려야 하는’, ‘밀어주기도 받쳐 주기도’ 하는 적극성으로 확신에 차 있는데 반하여, 뒤의 「모래시계 *2」는 ‘가보지 못한’, ‘밀어내지 못한’, ‘아직 닿아보지 못한’, ‘떨어져 내리지 못한’ 두려운 난간에 있다. 바로 이곳에서 삶의 전환을 꿈꾸는 방식을 취한다.
우리는 대조가 되는 상반된 감정을 보지만, 두 편 다 사실적인 상황이 아니라 화자의 의식 안에 ‘모래시계’라는 표상을 내재하고 있어 선험적 자아임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선험적인 사유가 추상적으로 머무를 위험성이 있지만, 이미지를 거느리기 때문에 인식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 한 편의 작품 「이중적인 말의 유목에 대하여」를 통하여 새로운 장면을 살펴보기로 하자
말들이 하이에나처럼 험악해지는 시절이라 했다
허물고 덜어내고 되세우는 도시의 굉음 속
낮은 목책은 치장일 뿐
요즘 와 말이 슬쩍 나갔다 돌아오곤 한다
어떤 말은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어린 말이 처음 눈 뜨던 광야가 있었다
그곳에 가면 내 말이 있을 것이다
야생의 눈빛으로 더 먼 곳을 내다보며
믿진 않았지만 휘파람을 불었다
거짓말처럼 멀리서 흙먼지를 풀며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
모래의 길 하나를 끌고 내 말이 들어오고 있다
세상을 짚어본 눈빛은 깊고 넉넉하리라
정강이가 튼튼해진 문장, 말의 관절이 유연해 보인다
― ⌜이중적 말의 유목에 대하여⌟전문, 시집 『오브제를 사랑한』.
도시의 굉음 속에서 목책을 넘어간 말은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어린 말이 처음 눈 뜨던 광야가 있었다. 말[言語]은 굉음의 도시에서 훼손된 말이다. 여기에서 말이란 사회적인 언어 체계인 랑그(langue)와 개인의 구체적인 발화 행위로서 파롤(Parole)을 포함하고 있다. 시인은 언어로서 말을 한다. 넓은 의미에서 말의 본래 순수성이 사람들의 불순성으로 인해 험악해지고 있다. 말의 순수성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말[馬]은 구속된 말이다. 철책을 벗어나 제도권을 벗어나고자 한다.
시인에게 순수한 말[言語]이란 언어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시 쓰기 일진데, 이는 곧 생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열망과도 통한다. 제도권을 벗어난 말[馬]은 구속을 벗어난 자유로운 활동을 의미할진대, 이 또한 생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열망과도 통한다. 이렇게 보면 결국, 언어든 말[馬]이 든 말의 유목은 정강이가 튼튼한 야생마로 돌아오는 자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 시는 ‘하이에나처럼 험악해지는 시절’을 언급하므로 ‘야생의 눈빛으로’ 빛나는 미래의 시간성과 연계되어 있다. 말이 돌아올 때 ‘모래의 길 하나 끌고 오는’것은 야생의 순수한 눈빛을 키운 그런 길일 것이다.
또한 ‘굉음의 도시’는‘어린 말이 처음 눈 뜨던 광야’와 공간적인 면에서 대조된다. 이 ‘광야’라는 공간성은 시원으로 돌아가는 근원적인 장소이다. 이때, 말은 나의 존재의 근거를 담고 있다. 말은 나의 존재의 비밀을 알고 있다. 따라서 휘파람을 불자마자 말은 내게로 와서 나와 동일화가 된다. 말에 대한 화자의 태도를 통해서 말은 화자의 내재성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자는 말을 통해서 처음 눈 뜨던 광야를 볼 수 있는 선험적 자아가 된다. 휘파람을 불자 달려오는 말을 통해 정강이가 튼튼한 말 발굽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선험적 자아가 된다.
그러나 선험적 자아의 경우라 할지라도 현실은 항상 자기 자신과 일치하진 않는다. 따라서 생명이 다 하는 그날까지 말의 유목은 계속될 것이다. 굉음의 도시에서 살고 있는 한 화자의 시원을 찾는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 되리라 지금과 같이 앞으로도 말의 유목으로 ‘모래의 길 하나 끌고 오는’ 일은 계속 되리라.
김추인의 이중적인 말에 관한 시편으로 또 하나의 작품 「말이 달린다」는 이와는 다른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
말이 달린다 갈기에 붙들린 바람이 말 잔등을 치며 별의 가장자 리를 달리는 중이다
- - - (중략) - - -
우주의 바깥으로부터 백조자리 지나 바람 치는 별의 중심을 향해 타각타각 허공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 말이 달린다
성단에서 성단으로 건너뛰며 오래 바라본 겉과 안처럼 홀소리와 닿소리 한 몸으로 단단해지리라, 말이 달린다
- - - (중략) - - -
겉과 안 경계에서 내 말은 오오래 광야를 달리며 세상의 바람을 읽을 것이다 말이 달린다
― 「말이 달린다」 일부, 시집 『오브제를 사랑한』.
이 시도 말의 이중적인 의미를 다룬다. ‘성단에서 성단으로 건너뛰며’‘겉과 안처럼 홀소리와 닿소리 한 몸으로 단단해지리라’는 표현에서, 말은 성단과 성단의 경계를 건너뛰며 단단해진다. 경계를 넘어설 때 소리의 참된‘의미’는 탄생하게 된다. 하나의 의미를 탄생하기 위해 말은 넓은 우주를 횡단하고 있는 셈이다. 겉과 안의 경계는 성단과 성단의 경계이며 홀소리와 닿소리의 경계로서 경계를 한 몸으로 합칠 때 말은 더욱 단단해 지리라.
「이중적인 말의 유목에 대하여」는 말이 눈 뜬 광야에서 화자에게 돌아오는 반면, 「말이 달린다」는 우주적 상상력으로 확산되어 별의 중심을 향해 달렸던 말이 수메르 점토관이나 세상의 바람을 읽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온다. ⌜이중적인 말의 유목에 대하여⌟는 말의 순수한 본질을 찾기 위한 것이며 ⌜말이 달린다⌟는 인간 조상들의 삶의 방식을 확인하는데, 이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방식일 게다. 즉, 모든 상황은 지구 밖 원심력에서 탄력을 받은 뒤 ‘나’라는 구심력으로 집중 변화되어 나타난다.
시 ⌜말이 달린다⌟에서 말은 별의 가장자리를 지나 별의 중심을 향해 달린다고 했다. 그 목표물인 별은 무엇을 의미할까?
4
우리는 별이 인간 세상과 직접 관련이 있음을 본다. 그 실체를 알기 위하여, 별과 관련된 좀 더 구체적인 사유를 또 다른 시 「멀어지는 풍경의 시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무수한 알들이 모태의 허공을 부유하고 있다
모래 한 톨의 시간
모래 한 톨의 우주
모래 한 톨에 우주적 원형질이 다 들어 있다
내 저무는 몸에 우주가 들어와 계시다
먼지와 개스의 별 하나를 위해 태양은 저를 태워 펄럭이는 목숨 들을 키우고 있다 별의 식솔들이 장안문에서 남문까지 낮은 지붕 아래서 알을 슬고 있다
그대로 해서 별들이 살을 섞고
그대로 해서 강철의 겨울을 건너 꽃이 피는 것을
‘나뭇잎 하나에조차 누구냐 묻지 마라’
우리, 먼지의 걸음으로 팽창하는 우주를 걷는 중이다
걸어도 걸어도 멀어지는 별, 당신이여
― 「멀어지는 풍경의 시간」 전문, 시집 『오브제를 사랑한』.
화자는 모래 한 톨에서 생성의 오랜 시간을 읽고 우주를 읽는다. 태양은 저를 태워 별들을 키우고 있다. 별의 식솔들이 인간들의 낮은 지붕 아래에 알을 슬고 있다. 별의 알은 생명력이다. 별빛을 동물화 하여 번식의 힘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상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지상엔 꽃이 핀다.
모래 한 톨은 우주의 원형질이 들어 있는 면에서, 모래 한 톨의 별이며, 모래 한 톨의 지구이며, 모래 한 톨의 우주이다. 또한 모래 한 톨의 사람 몸이다. 화자의 몸에도 우주가 들어 있다고 인식한 순간 화자는 선험적 화자가 된다.
인간은 지붕 아래서 별을 꿈꾼다. 생성의 근원인 별은 화자의 타자이며 초월적인 존재이다. 이때 타자인 별은 화자를 객체화 시키고 즉자화 시킨다. 화자는 별이 되고자 하지만 끝내 별이 될 수 없다. 하지만 화자는 별로 인해서 주체성을 인식하게 된다. 들뢰즈에 의하면 주체성이란 타자의 출현으로 발생한다. 공간적인 측면에서 타자인 별은 우주라는 공간적 지각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에서 선험적 타자이다. 화자와 별과의 거리는 물리적인 거리가 아니라 주체와 선험적 타자와의 거리이다. 타자인 별을 통해 화자는 별이 미치는 가능한 세계를 볼 수 있다. 성단과 성단이 이어진 아름다운 별들의 세계를 본다. 태양과 별들의 빛으로 지상에 나뭇잎이 자라고 꽃이 피는 동력을 보게 된다. 이러한 순환의 질서 속에서 우주는 팽창하게 된다.
이 거대한 우주의 질서 속에서 화자는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무엇인가? 이 물음은 다른 시 「타클라마칸」에 나타난다.
멀리 있는 꽃송이처럼 눈빛 쏠리는
별
저 개밥바라기에게
나는 한 생(生) 서걱이다 지나가는
모래꽃일까
― 「타클라마칸」 일부. 시집 『오브제를 사랑한』.
별에게서 눈빛 쏠리는 꽃송이를 본 화자는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이 물음에 대해 그는 모래꽃을 떠 올린다. 서걱이다 지나가는 모래에도 꽃이 필까? 모래의 현시(顯示)적인 외형은 메마름, 서걱거림 등이지만 모래의 원형질에 꽃송이 같은 별의 원형이 있다는 사유에서 출발하여 모래와 별의 이질성과 동질성을 사유한다.
화자가 바라본 별은 아름다운 꽃송이에서 출발하여 「우리는 무엇으로 내일을 꿈꾸는가」에서 빛의 말씀으로 전이된다.
쪼맨한 여자가 행성의 극지까지 온
구름의 방정식을 생각한다
- - - (중략) - - -
그 빛의 말씀처럼 쏟아지는 별들의 신화
점멸하는 점자책을 내가 읽고 있다
― 「우리는 무엇으로 내일을 꿈꾸는가」 일부.
시집 『오브제를 사랑한』.
타자인 별을 통해 행성의 극지까지 온 여자는 구름의 방정식을 생각한다. 시 「길 위에서 부활하다」에서 ‘스스로 바큇살로 굴러가는 구름의 길’은 지상에서 행성의 극지까지 올라가려면 구름의 방정식이 필요하리라.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은 빛의 말씀을 읽으며 확인해간다. 빛의 말씀은 점멸하는 점자책이다. 화자는 점자책을 더듬거리면 말씀의 진의를 해독할 수 있다고 본다. 부활초를 통해 사람의 아들을 인지한 화자로선 빛의 말씀이란 별을 창조하신 신의 말씀일 게다. 신의 창조물인 별이 꽃송이로 비유되고, 빛의 말씀은 점자책으로 은유되고, 신의 창조물로서 별은 존재의 물음을 던지는 오브제이다.
우리는 김추인의 작품 「모래에 쓰는 자전」에서 또 하나의 타자를 만나게 된다.
모래알에서 물내를 맡는다
모래알에서 물소리를 듣는다
모래알에서 밤꽃 비린 사내의 채취를 맡는다
사내가 모래의 여자를 안고 광음을 달려온다
바람이 일러 주었던가
어느 한때는 바다였노라고
어느 한때 뽕밭이었다가 개똥밭이었다가
모래의 여자가 섬기던 구름밭이라
모래가 모래를 낳는 행성의 비의(秘意)는
신기루가 써 내리는 비문(碑文)에 있다고
또 한 만 년 후에 뜨겁게 올
사내와 사내의 아이를 기두리는 모래의 여자
모래알에서 젖내를 맡는다
모래알에서 행성의 풀밭을 읽는다
― 「모래에 쓰는 자전(自傳)」 전문, 시집 『행성의 아이들』.
모래가 모래를 낳는 행성의 비의 속에서 화자는 모래알에서 물내를 맡는다. 모래에서 물내를 맡는 것이 아니고 모래알에서 물내를 맡는다. 별이 지상에 알을 슬듯 별의 알이기도 한 모래알을 품어본다. 모래알에서 물소리를 듣고, 사내의 채취를 맡으며, 한때 바다였으며 개똥밭이었으며 구름밭이었던 지구라는 행성에서 만 년 후에 뜨겁게 올 사내와 사내의 아이를 기두리는 모래의 여자가 된다. 모래의 여자는 ‘모래알에서 젖내를 맡는다/ 모래알에서 행성의 풀밭을 읽는다.’ 모래밭에서 화자는 모래의 근원을 인식한 선험적 자아이다. 미래의 현존, 시간을 공간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 미래는 인간관계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때 타자인 사내의 출현으로 화자는 객체화 되고 즉자화 된다. 사내는 모래의 여자가 기다리는 초월적인 존재이다. 이 사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모래가 모래를 낳는 행성의 비의(秘意)는 신기루의 비문(碑文)으로 남아 있고, 이 땅은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 것이다. 사내는 만 년의 시간을 통과해서 모래밭이 풀밭이 되는 본래의 상태로 환원하는 시점에 나타나게 된다. 이 시간의 인식에는 실낙원에서 복낙원으로 회복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모래에 쓰는 모래여자의 자전(自傳)이다.
이 시에는 과거와 미래의 시간의식이 담겨 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시간적인 측면에서, 타자인 사내의 출현은 화자의 과거를 현재에서 분화시켜준다. 타자로 인해 과거의 시간이 발생한다. 이는 과거의 시간성을 지각하게 된 것으로. 화자의 시간의식의 탄생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때 타자인 사내는 또 다른 나의 주체도 아니고 내가 지각한 대상도 아니다. 사내는 내가 나 됨을 가능하게 해주는 선험적 타자이다. 현존하는 미래의 사내는 화자와 상호주관성을 가진다. 타자인 사내의 등장으로 화자의 꿈은 미래의 시간으로 더욱 구체화 됨을 보게 된다.
선험적 자아의 동력은 모래, 별, 사내, 등을 통해 존재의 근원을 발견하기 위한 인식의 확장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추인의 시에서 화자의 선험적 자아는 대부분 근원적인 것과 관계가 있으며, 우주적 상상력을 통해 나타나게 됨을 알 수 있다.
5
우리는 지금까지 김추인의 ‘모래의 원형질’에 대한 사유와 ‘선험적 자아’에 대해 살펴보았다. 불의 지대를 지나온 모래, 텅 빈 상태로 욕망을 비운 모래는 시대적인 시류에 합류하지 않는 표상이다. 화자는 모래가 되어 선험적 자아로 세계를 읽는다. 별과 지구가 우주에서 태어났으며 불의 지대를 지나왔다. 모래에는 우주의 원형질이 있다고 믿고 있다. 모래는 불을 지나왔을 뿐 아니라 별의 원형질도 가지고 있다. 모래와 별과의 거리, 그것은 화자와 선험적 타자와의 거리이다. 별을 통해 보이지 않는 우주를 보며, 꿈을 꾼다.
별이 지상에 슬어놓은 알들을 보던 화자는 별의 원형질인 모래에서 꽃 피는 부활초를 통해서 모래 역시 생명이 부활하는 근원지임을 확인하게 된다. 모래알에서 물내를 맡고 젖내를 맡고 행성의 풀밭을 읽는 모래의 여자는 만 년 후에 뜨겁게 올 사내를 기다린다.
모래알, 모래시계, 사하라, 거울, 그리고 신의 창조물인 별을 오브제로 사용한 시인은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한 「오브제를 사랑한」에서 오브제를 사랑한 이유를 설명한다. 유화 <타올을 든 소녀>에서 전라(全裸)의 소녀를 보면서 ‘유리를 달리는 물의 발자국들이/ 세상의 덧칠된 시간을 지우며/ 존재의 물음을 던지고 있다/ 절대 미감의 영속성에 대하여’라고 서술한다. 시인이 오브제를 사랑한 이유는 덧칠된 시간을 지우며 존재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묻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시인은 추상과 관념을 거침없이 구사하지만 비유와 이미지를 사용하여 폭넓은 우주적 상상력을 보여준다. 존재의 본질이나 세계에 대한 인식을 구사하기 위해 지상과 지구 밖에서까지 오브제를 사랑하던 선험적인 자아는 ‘행성의 극지까지’날아간다.
오늘도 점멸하는 별들의 점자책을 읽고 있을 시인의 앞날에 새로운 시안(視眼)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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