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원의 힘
동아줄 김태수
절박함이 용기를 불러왔다.
“여러분께 양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꼭 이 차로 가야만 하는 급한 사정이 있습니다. 어느 분이 저에게 자리를 양보해주시면 안 될까요? 다음 차는 30분 후인 2시 30분에 있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양보해주시는 분의 차비는 제가 내드리겠습니다.”
2시에 출발하는 고속버스를 타야만 했다.
내가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출발 8분 전이었는데, 이미 차표는 매진되었다. 앞이 컴컴해졌다. “ ##고속버스로 2시 전주 출발, 서울 남부 터미널에 5시 10분경 도착 예정.”이라고 내가 동창 카페에 올린 글을 보고, 기다리다 힘없이 발길을 돌릴 친구 모습이 그려졌다.
K형과 오랜만에 만났다. 점심을 먹고 이런저런 얘기꽃을 피우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8월 초 불볕더위가 40년 만에 찾아와 밖은 한창 열을 뿜어내고 있었다. 터미널까지 2분 거리 밖에 안되니까 미리 나가서 고생하지 말고 시간 맞춰나가라며 K형은 친절하게 고속버스 시간까지 알려준다. 약속시각이 6시 30분, 영등포 구청 옆이면 전주에서 2시에 출발하면 된다고 했다.
미국에서 가지고 온 스마트 폰은 무용지물이었다. 작동되지 않아 가방 속에 처박아 놓았다. 친구들의 정보는 인터넷 동창 카페뿐이었다. 스마트 폰에 의지한 내가 바보가 되었다. 인터넷 동창 카페를 찾아, 겨우 서울 도착 예정 시간을 올려놓고 터미널로 향했던 것이다,
오랜만에 한국에 나오는데, 동창들이 얼굴 한번 보면 좋겠다고 해서 급조된 모임이었다. 피서철이었음에도 나를 위해 만든 모임이었다. 40년 만에 만나는 친구들도 있었다.
고속버스가 출발할 시간인데 양보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더위에 짜증 난 얼굴을 하고 빨리 버스가 출발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힘없이 버스에서 내려왔다. 버스 기사가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양보해주는 사람 없지요? 요즘 그렇다니까요. 이렇게 더운 날씨에 누가 기다렸다 가려 하겠어요?”
막 버스가 출발하려는데 한 사람이 내려와, 차표를 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14번 B가 제 좌석이니까 거기 앉아서 가세요.” 60세쯤의 나이에 그은 얼굴이었다. 보따리를 양손에 들고 와 바닥에 내려놓은 걸로 봐서, 농사짓다가 자식이나 친척을 만나러 가는 모양이었다. 준비해둔 차비 12,000원을 건네주니까 11,600원이라며 동전 400원을 거슬러 주려고 주머니를 뒤진다. 버스 출발 시각이 지나자 기사님은 서서히 차를 움직인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400원은 안 주셔도 돼요.” 하며 급히 차에 올라탄다. 버스가 출발하고 땀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자리에 앉아서, 그래도 세상 인심은 각박하지만은 않다고, 안도의 숨을 쉬고 나서야 생각이 났다. 그래 야박하게 자리 양보한 대가가 고작 400원이었단 말인가. 경황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12,000원을 더 건네줬어야만 했다. 각박한 건 나 자신이었다. 그 고마운 마음은 미안한 마음으로 자리 잡아, 다른 사람 사정이 급할 땐 양보해 줘야 한다는 무언의 명령이 되고 있다.
동아줄 김태수
절박함이 용기를 불러왔다.
“여러분께 양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꼭 이 차로 가야만 하는 급한 사정이 있습니다. 어느 분이 저에게 자리를 양보해주시면 안 될까요? 다음 차는 30분 후인 2시 30분에 있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양보해주시는 분의 차비는 제가 내드리겠습니다.”
2시에 출발하는 고속버스를 타야만 했다.
내가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출발 8분 전이었는데, 이미 차표는 매진되었다. 앞이 컴컴해졌다. “ ##고속버스로 2시 전주 출발, 서울 남부 터미널에 5시 10분경 도착 예정.”이라고 내가 동창 카페에 올린 글을 보고, 기다리다 힘없이 발길을 돌릴 친구 모습이 그려졌다.
K형과 오랜만에 만났다. 점심을 먹고 이런저런 얘기꽃을 피우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8월 초 불볕더위가 40년 만에 찾아와 밖은 한창 열을 뿜어내고 있었다. 터미널까지 2분 거리 밖에 안되니까 미리 나가서 고생하지 말고 시간 맞춰나가라며 K형은 친절하게 고속버스 시간까지 알려준다. 약속시각이 6시 30분, 영등포 구청 옆이면 전주에서 2시에 출발하면 된다고 했다.
미국에서 가지고 온 스마트 폰은 무용지물이었다. 작동되지 않아 가방 속에 처박아 놓았다. 친구들의 정보는 인터넷 동창 카페뿐이었다. 스마트 폰에 의지한 내가 바보가 되었다. 인터넷 동창 카페를 찾아, 겨우 서울 도착 예정 시간을 올려놓고 터미널로 향했던 것이다,
오랜만에 한국에 나오는데, 동창들이 얼굴 한번 보면 좋겠다고 해서 급조된 모임이었다. 피서철이었음에도 나를 위해 만든 모임이었다. 40년 만에 만나는 친구들도 있었다.
고속버스가 출발할 시간인데 양보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더위에 짜증 난 얼굴을 하고 빨리 버스가 출발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힘없이 버스에서 내려왔다. 버스 기사가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양보해주는 사람 없지요? 요즘 그렇다니까요. 이렇게 더운 날씨에 누가 기다렸다 가려 하겠어요?”
막 버스가 출발하려는데 한 사람이 내려와, 차표를 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14번 B가 제 좌석이니까 거기 앉아서 가세요.” 60세쯤의 나이에 그은 얼굴이었다. 보따리를 양손에 들고 와 바닥에 내려놓은 걸로 봐서, 농사짓다가 자식이나 친척을 만나러 가는 모양이었다. 준비해둔 차비 12,000원을 건네주니까 11,600원이라며 동전 400원을 거슬러 주려고 주머니를 뒤진다. 버스 출발 시각이 지나자 기사님은 서서히 차를 움직인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400원은 안 주셔도 돼요.” 하며 급히 차에 올라탄다. 버스가 출발하고 땀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자리에 앉아서, 그래도 세상 인심은 각박하지만은 않다고, 안도의 숨을 쉬고 나서야 생각이 났다. 그래 야박하게 자리 양보한 대가가 고작 400원이었단 말인가. 경황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12,000원을 더 건네줬어야만 했다. 각박한 건 나 자신이었다. 그 고마운 마음은 미안한 마음으로 자리 잡아, 다른 사람 사정이 급할 땐 양보해 줘야 한다는 무언의 명령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