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444 추천 수 1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어머니와 매운 고추

김태수

   3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나한테 먼저 오지 말고 형이 입원한 병원부터 댕겨와 이잉. 수화기 저 너머에서 일러주시던 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섭씨 37도를 웃도는 중복 더위를 내리밟으며 온고을 병원을 먼저 찾았다. 지난 5월에 건강하시던 형님이 뇌경색으로 쓰러져 입원했다. 몇 년 만에 만난 형님은 반갑다는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저 미국에서 온 동생을 눈물 고인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다. 착잡한 심정 가누지 못해 병구완하는 형수님에게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한다.

  어머니는 혼자 실버타운에 사신다. 형님네가 모시려고 해도 혼자 사시는 게 서로 편한 거라며 거절하셨다. 그나마 시골에서 소도시로 나와 형님네 가까이에 있는 노인 종합복지단지로 오신 게 큰 발전이었다. 형님 내외분이 가까이서 밑반찬이며 빨랫감이며 청소며 보살펴드렸다. 그러다가 형님이 쓰러지셨다. 어머니는 당장 형님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가보고 싶으셨겠지만 안 가셨다. 가서 보면 서로 눈물만 흘릴 것 같아서라고 하신다. 아버지가 딴집살림을 차리는 바람에 혼자서 갖은 고생을 다하며 우리 형제를 키우셨던 어머니이다

곡괭이처럼 굽은 어머니. 시들시들 갈증 난 황토밭에서 솎아내어왔을 싱싱한 여름을 아들 밥상에 올려놓는다. 고추처럼 풋풋하고 오이처럼 시원한 어머니의 사랑을 들깻잎과 상추로 덧싸서 한입 베어 물면 어머니의 냄새 그윽하게 온몸에 스민다. 고추에 대한 추억의 물결이 아릿하게 밀려온다.

  형님이 군대에 가자 나는 농사일을 거들면서 고등학교에 다녔다. 내가 제일 싫어했던 게 고추밭 농약 살포였다. 농약을 치지 않으면 고추농사는 망치게 되고, 수업료 낼 돈도 막막해진다. 농약 살포는 아침 일찍 서둘러야 한다. 해가 나면 더워지고 땀에 농약 냄새가 섞이면 어지럼증이 빨리 인다. 심할 때면 배속까지 울렁거린다. 농약 친 날이면 학교에서도 머리가 무겁다.

  내가 시골을 떠난 후에도 어머니는 혼자서 한동안 고추농사를 지으셨다. 어머니는 빨갛게 잘 익은 고추를 고르고 다듬고 말려서 내다 팔았다. 고추농사는 자식농사였다. 튼실한 고추를 잘 말려서 제값 받는 상품을 만들려고 정성을 쏟았다. 뙤약볕에 고추가 고닥고닥 해지면 어머니의 무겁던 마음도 덩달아 가벼워졌을 것이다.

  그때는 교정에 들어서기 전부터 숨이 막혔다. 최루탄 가스 냄새 때문이었다. 또 휴강이다. 뒷문으로 도망치다시피 빠져나온다. 눈물에 콧물에 땀에 따갑기만 하다. 최루탄 냄새를 맡을 때마다 고추밭 농약 칠 때와 매운 고추 냄새를 떠올렸다. 매운 고추를 따다 다듬고 고르고 말리셨던 어머니는 천식 기가 있어서, 매운 고추 냄새에 밭은기침을 자주 하셨었다. 특히, 장마철에 고추가 짓무르고 눅눅해지면 불 지펴 따뜻해진 아랫목엔 고추를 반듯하게 눕히고 어머니는 윗목에서 밤새 기침하시느라 푹 주무시지를 못했었다. 위정자들은 학생 데모를 무조건 막아야 정국이 안정된다고 믿었던 때였다. 어머니 만큼이나 한국의 민주주의도 매운 세월을 보내던 때였다. 나는 지금도 매운 고추는 싫다. 살기 띤 최루탄 냄새가 스멀스멀 나오는 것 같아서다.

  한국에 갔다 돌아올 때면 어머니는, 미국에서는 이런 고춧가루를 못 먹을 테니 가져가라며 싸 주시곤 했다. 그 고춧가루로 아내가 요리한 음식을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다. 매운맛 속에는 어머니의 매운 세월이 녹아 있다. 어머니 덕분에 어려서부터 매운맛을 안 아이들은 미국에서 매운 고추 맛을 내는 코리안 아메리칸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것이다.

  우리의 몸속에는 어느 정도 매운맛을 견뎌내며 즐길 수 있는 유전 인자가 숨 쉬고 있다. 이 유전 인자는 모든 미각의 맛을 제압하여 어우러지게 하는 독특한 맛을 내어, 식욕을 자극하고 개운한 맛을 내기 때문에 다시 찾게 한다. 어머니가 견뎌낸 세월이 매운맛이라면 다인종이 어우러진 이민의 삶에서 삭힌 세월이 나의 매운맛인지도 모른다. 이 맛이 대대로 전이되면서 다시 찾게 하는 독특한 미국 속의 한국 문화가 이뤄지기를 희망해 본다.

  고춧대는 가뭄에 비틀어져 쓰러질 것 같은데도 신기하게 고추만은 옹골지게 달고 있다. 온몸으로 키워내서 진이 다 빠져버린 모습인데도 버티고 있는 것은 아직도 매달려 있는 고추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훗날 아들딸들에게 비쳐진 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밥상에 내놓은 풋고추를 쌈장에 찍어 먹어본다. 그다지 맵지 않은 싱싱한 맛이 배어 있다. 농약 냄새나 최루탄 가스 냄새도 없다. 어머니가 견뎌낸 세월이 알싸하게 입안에 퍼진다. 사랑은 쌓인 세월의 독도 녹여 어우러진 맛을 만드나 보다. 어머니는 형님에 대한 당신의 마음도 올려놓는다. 늬 형은 매운 풋고추도 잘 먹었는디……

  건강하셔야 혀 삼 년 있다 또 올랑게. 이젠 형수도 자주 못 옹게 식당 밥 사 드시고. 나 걱정 허들 말어. 나는 암시랑토 안응게로 느그나 건강혀라 이~잉. 손을 흔들고 서 계신 어머니의 모습이 멀어진다. 빛바랜 늙은 소나무 가지 붙들고 우는 매미 소리가 내 마음을 적신다.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소설 김태수 약력 동아줄 김태수 2016.11.11 672
89 시조 행시 세월호 진도침몰참사 동아줄 김태수 2015.05.06 66
88 시조 잔설[월간 샘터 2015년 4월호] 동아줄 2015.03.16 165
87 행시 별빛 간이역 동아줄 2015.03.13 141
86 시조 행시 지리산[뉴욕문학 24집, 2014년] 동아줄 2015.01.13 109
85 시조 행시 새해 인사 동아줄 2015.01.07 110
» 수필 어머니와 매운 고추[2014 재미수필] 동아줄 2014.12.04 444
83 시조 행시 낙엽[2016 미주문학 가을호][2016 현대문학사조 가을호] 동아줄 2014.11.13 354
82 시조 행시 좌선[뉴욕문학 24집, 2014년) 동아줄 2014.11.07 106
81 시조 행시 추석 명절 동아줄 2014.09.15 151
80 행시 달빛 그림자 동아줄 2014.09.11 147
79 수기 물이 생명과 건강의 원천이다[중앙일보 ‘물과 건강’ 수기 공모 2등 수상작] 동아줄 2014.08.14 673
78 수필 길[계간문예 2014 여름호][2014 재미수필] 동아줄 2014.07.27 400
77 시조 행시 봄빛[2014 뉴욕문학 신인상 당선작] 동아줄 2014.07.09 284
76 달님에게 하는 사랑고백[맑은누리 14년 여름호] 동아줄 2014.06.23 413
75 시조 행시 시인들 삶이다[맑은누리 14년 여름호] 동아줄 2014.05.22 245
74 시조 행시 아이문학닷컴 동아줄 2014.04.22 279
73 수필 수필은 문이다[2014 재미수필] 동아줄 2014.04.10 259
72 시조 행시 봄 창에 기대어 동아줄 김태수 2014.03.22 308
71 시조 알래스카 겨울 까마귀 동아줄 김태수 2014.02.05 375
70 수필 3박 4일의 일탈[퓨전수필 13년 겨울호] 동아줄 김태수 2014.01.16 376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Next
/ 8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19
어제:
55
전체:
1,178,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