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유자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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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나팔꽃 / 수필

2021.07.01 10:06

민유자 조회 수:17

나팔꽃

 

 낯선 동네에서 길을 찾는 중이다. 길 건너 허술한 담장에 파란색 꽃들이 무성하게 피어 있는 것이 보였다. “아! 나팔꽃 아냐?” 차를 세우고 가까이 가서 살펴보았다. “정말 나팔꽃이네!”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나팔꽃을 본다. 그것도 어릴 때 고향에서 보던 바로 그 나팔꽃이다. 얼마나 반가운지!

 

 나는 서울 필운동에서 태어나고 사직동과 홍파동에서 자랐다. 홍파동은 서대문에서 독립문을 바라보고 걸으면 중간쯤 오른쪽에 있는 동네다. 그 집은 뒷마당이 상당히 넓었다. 거기엔 살구, 복숭아, 두, 석류, 무화과나무가 있어서 시절 따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었다. 또 라일락, 자목련, 장미, 수국이 저마다 질세라 고운 자태와 향기를 냈다.

 

 화초를 좋아하던 아버지는 온갖 화초를 다 구하여 심었다. 때로는 진귀한 화초를 구하는 목적 하나를 위하여 하루 거리 나들이를 멀다 않고 다녀오기도 했다. 장미를 비롯한 여러 화초들은 꺾꽂이를 해서 뿌리가 내리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기뻐했다. 새벽 일찍부터 두어 시간 화단을 가꾸고 나서 조반을 들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해가 질 때까지 우선 화단부터 돌아보았다.

 

 너무 정성을 들여서 때로는 식구들이 화초 때문에 수난을 는 일도 있었다. 그때는 빨래를 하면 뒷마당에 매어놓은 빨랫줄에 어 말린다. 바람이 불면 으레 손수건이나 양말 같은 작은 빨래는 떨어지기 마련이고 화초 위에도 떨어진다. 아버지께서 집에 돌아올 때 그런 상태가 되어 있으면 온 집안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화를 내셨다. 기껏 빨아 널은 빨래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개의치 않고 화초 상할 염려를 더 했다. 집 안에 들어오면 화초밭으로 눈이 먼저 간다. 떨어진 빨래를 단장 끝으로 걷어내서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눈이 없느냐고 꾸중을 했다. 먹고살기도 힘든 그 시절에 화초를 그토록 중히 여기는 정성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못마땅했다.

 

 일년초들도 많아서 채송화, 숭아, 한련, 분꽃, 과꽃, 접시꽃, 달리아, 일홍, 양귀비, 코스모스가 봄부터 가을까지 연달아 다. 담장 한쪽에는 두세 종류의 나팔꽃이 꼭 있다. 여름에 아침 일찍 일어나면 언제나 나팔꽃이 환하게 피어있어 화려하고 맑은 아침을 맞이한다. 영어로 ‘모닝 글로리’라 불리는 이름 그대로 아 침의 기쁨이다. 이런 일년초들은 봄에 파종한 것이 자라다, 여름 의 문턱으로 들어서 6월쯤에는 경쟁하듯 꽃을 피우기 시작하여 풍요한 여름을 장식한다.

 

 나팔꽃도 이때쯤은 한몫을 하기 시작한다. 나팔꽃은 피기 바로 전날에 보면 넓은 잎이 정교하게 차곡차곡 옆으로 접혀 있고 진 한 색과 흐린 색이 번갈아 나선형으로 말아 올라가 있다. 어릴 때 나는 그것이 무척 아름답고 신기했다. 활짝 피어 있던 나팔꽃들이 오후에 보면 모두 꽃잎을 오므리고 있다. 이것을 따서 꽃잎 쪽을 손으로 꼭 잡고 꼭지 부분을 입에 물고 힘주어 불면‘탁’소리를 내며 터진다. 오후에는 분꽃이 활짝 피어 있다. 이것을 따서 꽃술을 곱게 빼내고, 손톱으로 꼭 눌러 잘라서 피리를 만들어 불곤 했다. 끝을 깨끗하고 정교하게 잘라야만 피리 소리가 잘 난다. 샐비어는 길 쭉한 부분을 잡아 아서 꼭지를 빨아 먹으면 달콤한 이 맛 있다. 지금처럼 장난감이 풍부하지 않은 그때는 이런 것들이 장난감을 대신했다.

 

 한련은 물방울이 이파리 위에서 은색으로 이리저리 구르는 것이 재미있다. 두콩 세 개를 붙여놓은 모양의 씨를 맺는데 그것을 너무 익어버리기 전 파란색일 때 어 먹으면 매콤한 것이 꼭 와사비나 홀스래디쉬 같은 맛이 난다. 잎에서도 매콤한 맛이 나는데 서양에서도 샐러드에 조금씩 넣어 먹기도 했다.

 

 여름밤에는 언니들, 친구들과 함께 둘러앉아 봉숭아에 백반을 넣고 어서 손톱에 물을 들였다. 봉숭아 찧은 것을 손톱 위에 놓고, 나팔꽃 이파리로 싸서 실로 어두고 조심스레 잠이 든다. 하지만 짧은 여름밤 곤한 잠을 자다 보면 빠져나가곤 했다.

 

 나팔꽃은 빼어난 미인을 아내로 둔 어느 화공이 그 마을 원님에게 아내를 빼앗기고 너무 원통하여 죽은 그 자리에서 피어난 꽃이라는 전설이 있다. 나팔꽃은 새벽 3시쯤부터 피어나기 시작하여 아침 9시쯤 절정에 이른다. 정오쯤에는 벌써 꽃잎을 오므려서 오후 2시쯤에는 시들어버리고 다음 날에는 다른 꽃을 피운다. 나팔꽃도 여러 종류가 있어 밤에만 피는 나팔꽃도 있다고 하는데 보지 못했다.

 

 나팔꽃은 성장력이 좋아서 씨 뿌린 지 5일 만에 싹이 트고 무무럭 자라서 30일이 되면 벌써 꽃이 피기 시작하여 초등학교의 자연실습 교재로 많이 쓰인다. 굴은 언제나 쪽으로 지주를 감아 올라가며 자라는데 오른쪽으로 감아 놓으면 다시 스스로 수정하여 왼쪽으로 감아 간다. 나팔꽃의 잎은 오존이나 이산화황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 붉은 반점이 생긴다. 그래서 자라면서 시간 의 변화에 따른 대기 오염의 정도를 알 수 있다.

 

 꽃말은 기쁨, 결속, 덧없는 사랑이다. 하루아침만 피고 덧없이 지기 때문인가 보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오랫동안 고 지내온 나팔꽃을 보니 고향의 어릴 적 달콤한 추억이 안개처럼 피어올라왔다. 나팔꽃 분에 나는 잠시 현실을 잊고 고향을 헤매다가 돌아왔다. 이 땅에 나팔꽃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곳이 낯설고 거친 이국땅이 아니라 고향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고 정 붙일 만한 곳으로도 느껴 졌다.

 

https://youtu.be/6-NUmZ_cDH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