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찬의 시 이야기"

2005.04.24 15:54

이기윤 조회 수:812 추천:87

*** 121 구린내 곰곰 나는 돼지 내장 도회지에서는 하이타이를 풀어 씻는다는데 산서농협 앞 삼화집에서는 밀가루로 싹싹 씻는다 내가 국어를 가르치는 정미네 집 뜨끈한 순댓국 한 그릇 먹을 때의 깊은 신뢰 <안도현 (1961 - ) 「순댓국 한 그릇」전문> 쓰레기 만두나 썩은 김치 라면만 탓할 일이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공업용 유지 라면도 있었고 인조 숯으로 검은 색을 낸 칡 냉면, 화학비료를 준 콩나물, 심지어는 표백제로 흰 색을 낸 도라지도 있었다. 이런 일이 쉬지 않고 일어나면서, 적어도 사람이 먹는 것 가지고는 장난치지 않을 거라는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본적인 믿음마저도 흔들리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다. 만둣국 한 그릇, 라면 한 그릇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없다면, 어느 세월에 정치는 맑아질 것이며 어떻게 통일은 이룰 수 있을까. 그래서 사람 사이의 깊은 신뢰를 회복시키고 있는 정미네 집이야말로 애국자란 생각이 든다. 사람 냄새도 곰곰 풍겨날 것 같은 그런 순댓국을 좋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 122 나그네 무덤을 찾아온 나그네 곤히 잠든 묘비 옆에 누군가 버리고간 기울어진 유리잔 하나 간밤에 살짝 지나간 소나기의 흔적인가 조그만 하늘 조각이 담겼네 깊숙이 고인 친구와의 인연이 왈칵 눈물로 쏟아져 잔이 넘칠까봐 서둘러 그 잔에 붓을 담가 내 가슴에, 물 번지는 물 번지는 그림을 그리네 <정해정 (1941 - ) 「수채화」전문> 무덤가 술잔에는 간밤에 내린 소나기의 흔적으로 물이 조금 고여 있다. 기울어져 있는 것이 곧 엎질러 질 듯 불안하다. 거기서 화자는 시적 모티브를 찾았을 것이다. 잔에 고인 물은 누군가가 무덤을 찾아와 나눈 술이자 애도의 눈물이다. 화자 또한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그 잔에 붓을 담근다. 내 가슴에 그린 그림은 당연히 수채화다. 눈물이 번지는 수채화. *** 123 샹화점(雙花店)에 샹화(雙花) 사러 갔더니만 회회(回回) 아비 내 손목을 주여이다 이 말이 이 店 밖에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조그만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고려 충렬왕(재위 1275 - 1308) 때의 가요 「쌍화점(雙花店)」부분> 상화(霜花)는 밀가루를 부풀려 채소로 만든 소와 팥소를 넣고 찐 빵이라니까 지금의 만두 종류고 쌍화점이란 만두가게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원나라에서 들어온 상화를 파는 외국인이 고객의 손목을 잡았다. 그런데 손목만 잡은 것 같지는 않다. 목격한 새끼 광대 더러 소문이 나면 네 탓을 할 거라고 다짐을 주는 걸 보니 불륜을 암시하고 있다. 조선시대 때 풍속을 해치는 남녀 상열지사의 하나로 이 노래를 금지한 이유를 알 것 같다. 하지만 문학이나 가요는 도덕 교과서가 아니다. 대중의 호기심을 끌고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한 가장 좋은 제재는 예나 지금이나 남녀 스캔들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것과는 성격이 다른 약 700년 전의 만두 사건이다. *** 124 칠월 장마철 늘비한 도라지밭 좀 봐 모시적삼 흰소매 들어 꽃 이름 일러주는 고모 좀 봐 살았을 적 죄란 죄는 불질러 빻아 죽어서는 온 바다 위 나드릿길 트고 가끔가끔 눈비로나 찾아오더니 장마철 연일 비, 도라지밭에 내려 도라지꽃 좀 봐 고모 좀 봐 흰 소매 푸른 소매 흔드는 것 좀 봐 난 알어, 그 말 뜻 난 알어, 저무는 도라지밭에 비 맞고 섰네 <이향아 (1938 - ) 「도라지꽃」 전문> 저무는 도라지 밭에 비 맞고 서서 흰 소매, 푸른 소매 흔드는 고모의 말뜻은 무엇일까. 화자가 고모의 나이가 돼서야 비로소 알 수 있게 된 그 말뜻을 남자인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시에서 고모에게 내리는 장마비가 말뜻도 모르는 독자의 가슴을 오랫동안 적신다. *** 125 1 향료(香料)를 뿌린 듯 곱다란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먼 고가선(高架線) 위에 밤이 켜진다. 2 구름은 보랏빛 색지(色紙)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 목장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김광균 (1914 - 1993) 「데생」 전문> 제목처럼, 노을이 밀려가고 있는 저녁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이다. 어둠이 조금씩 짙어져오는 모습을 전신주가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고가선 위에 밤이 켜진다고 묘사했다. 불면 꺼질듯한 촛불처럼 목장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선명하게 보이지 않고 가물가물해졌다. 길게 뻗어간 들길의 끄트머리도 마찬가지다. 이 그림은 쉽게 지워지지 않아서, 독자는 그림 앞에 오래 서있는 사람이 되고 마침내 해 저무는 들녘 속으로 몰입한다. 외로운 들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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