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시학 / 정용진

2009.01.20 06:59

이기윤 조회 수:1523 추천:74


❀ 꽃의 詩學 ❀

✌ 꽃의 시학(詩學)을 펴내면서

나는 60년대 초부터 시를 쓰면서 고등학교 시절에 많은 시를 읽고,
암송하고, 습작 생활을 해 왔다. 시가 좋아서 시를 읽고 시를 쓴 것이다.

지금 내 서가에는 국내외 시인들의 시집 500여권이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내 친구요, 영혼의 분신들이다.
나는 이 시집들을 읽으면서 20여 년 전부터 꽃의 시들을 모아 왔다.
“꽃의 시학”을 마련해 보려는 준비과정이었다.

꽃은 생명의 소식이요
꽃은 생명의 불빛이요
꽃은 생명의 향기이며
꽃은 생명의 열매이고
꽃은 생명의 훈장이다.

이 얼마나 자연의 위대한 진실인가. 꽃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찬란한
생명의 결실을 얻을 수 있었으랴.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시인들이 노래한
꽃 시의 현장을 보라.

이 얼마나 아름답고
이 얼마나 고귀하고
이 얼마나 보람된가.

분명 꽃은 천지인(天地人) 합작의 힘찬 결실이요 빛나는 보석이다.

하늘이 쏟아주는 햇빛과, 땅이 밀어주는 지력과, 스스로 꽃을 피우려는 욕망이 없었던들
어찌 이런 환희와 감동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독자들께서는 많은 시인들의 관조를 통한 사색의 숲 속에서 희노애락(喜怒哀樂)을
경험하시고 꽃의 그윽한 향기 속에 삶의 보람과 기쁨을 누리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2009년 봄.

샌디에고 에덴농장에서 저자 정용진 씀.


1) 꽃은 시다.


꽃은 어린이요. 꽃은 소녀요. 꽃은 시다.
그리고 꽃은 그리워하는 임의 상징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가냘픈 여인은 꽃이 되고 싶어 하고, 사랑의 마음이 싹트면
자기 자신만의 귀여운 꽃을 갖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남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꽃이 되고 싶어 한다.
꽃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청초하고 귀여운데 향기를 지녀 금상첨화(錦上添花)의
칭송을 덤으로 받는다.
또 향기를 찾아서 나비와 벌들이 모여들고 더욱더 큰 사랑을 생명들로부터 받는다. 그
대가 나를 부르는 것 같이 나도 그대를 불러 그의 꽃이 되어 아낌없는 사랑을 가득
받고 싶어 하는 소박한 염원들이다.
꽃은 분명 미요, 순수요, 예술이며, 사랑인 동시에 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어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 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어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전문.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나리지 않는 그 땅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 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 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 성(城)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이육사, <꽃> 전문.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섭의 위에 떨어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靜寂)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湖心)아 -박두진, <꽃> 전문.




갈라진 일도 오라 가라 함도 없이
거기 섰다가
꽃처럼 가던 길 다시 돌아와
비인 자리에 고이 피네
만물 속에 홀로 피는 미소
사랑의 증건가
옛 빛 새로 있음
꽃은 빛 꽃은 마음

꽃의 아름다움
그렇다
떨어진들 어떠리
우리 사이엔 겨울에도 꽃이 있는 걸. -김광섭, <꽃> 전문.




심연(深淵)은 나의 붓끝에서 퍼져가고
나는 멀리 세계의 노예(奴隸)들을 바라본다
진개(塵芥)와 분뇨(糞尿)를 꽃으로 마구 바꿀 수 있는 나날
그러나 심연(深淵)보다도 더 무서운 자기상실에 꽃을 피우는 것은 신(神)이고

나는 오늘도 누구에게든 얽매여 살아야 한다

도야지 우리에 새가 날고
국화꽃은 밤이면 더한층 아름답게 이슬에 젖는데
올 겨울에도 산 위의 초라한 나무들을 뿌리만 간신히 남기고
살살이 갈아갈 동네 아이들......
손도 안 씻고
쥐똥도 제멋대로 내버려두고
닭에는 발등을 물린 채
나의 숙제는 미소(微笑)이다
밤과 낮을 건너서 도회의 저편에
영영 저물어 사라져버릴 미소이다 -김수영, <꽃> 전문.




꽃은
모든 꽃은 다
웃는 모습입니다
소녀야 다시 소년아
니들도
꽃 모습을 닮아라 -황금찬, <꽃> 전문.




바라보면 볼수록 가깝고도 먼 얼굴
꽃이여

그대로 두면 한없이 고이 잠들어 버릴
너는 바람에 흔들리어 피었나니

일찍이 어둠 속에 반짝이던 너의 사념(思念)은 샛별처럼 하나 둘 쓰러져가라

너의 어깨위로 새벽노을이 퍼져옴은
만상(萬象)으로 네 존재의 여백을 채우려 함이려니

너는 영원히 깨인 눈
태양처럼 또렸한 의식(意識)! -김윤성 <꽃> 전문.




내 꽃으로 태어나서
자유의 꽃이 되었네

사랑과 노동 사이에서
노동과 자유 사이에서

두 번 다시 진달래는
붉게 피지 않아도

백두산 천지의 봄날이 되어
꽃잎처럼 흩어져간 너를 위하여

내 꽃으로 태어나서
해방의 꽃이 되었네 -정호승, <꽃> 전문.




꽃이 되고 싶다.
청초하게 피어
임을 기다리는
그 마음.

벌과 나비가 찾아와
입을 맞추면
수줍어 고개 숙이는
그 순수.

향기를 토하며
열매의 꿈을 가꾸는
애달픈 꽃이여!

나는
그리움 품고 자란
한 송이 붉은
꽃이 되고 싶다. -정용진, <꽃> 전문.




마음속에 박힌 못을 뽑아
그 자리에 꽃을 심는다
마음속에 박힌 말뚝을 뽑아
그 자리에 꽃을 심는다
꽃이 인간의 눈물이라면
인간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꽃이 인간의 꿈이라면
인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정호승, <꽃> 전문.







영혼이 타오르는 날이면
가슴 앓는 그대 정원에서
그대의
온 밤 내 뜨겁게 토해내는 피가 되어
꽃으로 설 것이다.

그대라면
내 허리를 잘리어도 좋으리.

짙은 입김으로
그대 가슴을 깁고

바람 부는 곳으로 머리를 두면
선 채로 잠이 들어도 좋을 것이다. -기형도, <꽃> 전문.




이렇게 못 잊을 수틀만 맡겨놓고
아무렇게나 네 마음대로 피는 게 아니다
사랑하는 가슴의 셈본만 어려워
머리칼 뿌리마저 뽑고 울 적에
아무렇게나 네 마음대로 향기를 갖는 게 아니다

이렇게 칠석물 같은 울음만 건네놓고
아무렇게나 네 맘대로 지는 게 아니다
널 담은 눈마저 수정체를 잃고
목숨 하나 없는 땅을 빡빡 기는데


독하구나!
꿀물 끓여 나를 보채던 너의 앙가슴
이제는 하전히 앵돌아져 숨고

달러변 이자보다 독한 꽃이여. –천승세, <꽃> 전문.




아,
언제나 옷 벗고 서 있는
너,
춤추는 너
기다리는 너
준비된 너는
성기性器 다
죽을 때까지 ㅡ임창현, <꽃> 전문.





깊이 내린 뿌리로
빨아올린 님의 말씀
있는 힘 다 쏟아
거름주어 피운 꽃

덕의 향기 퍼뜨려
벌 나비들 초대한 잔치
꿀 요리 대접하며
말씀으로 수정(受精)한 씨방
사랑을 잉태하여
영원한 생명인 열매 맺을 너 -이기윤, <꽃> 전문.




1
겨울 찬 서리 어두운 흙을 움켜쥐던
연약한 뿌리들이 오래도록 밀어올린
갈망, 그 눈물 머금은 첫 잎이
마침내 한 점 쏟아낸
분홍 각혈.

2
열매, 잉태된 세계의 끝을 찾아서
오관의 실핏줄마다 목이 마르고
이미 초경의 입술이 열렸다.

3
아, 깨끗한 것마다 누구에겐 가 바치기 위하여
저렇게 흔들리는
눈물보다 더 슬픈 웃음들
마침내 씨방마저 열었어라. –김문희, <꽃> 전문.



사량화(思量)


당신을 사량(思量)하여
바다로 떨어지는
낙조(落照)의 마지막 오분과 안고 뒹굴다
비익조(飛翼鳥)가 되었습니다
한쪽 눈에서 흐르는
그물로
사량화를 키웠답니다

지나다가 제 미소와 비슷한
길섶 꽃이 눈에 띄거든
잠시 멈추십시오
당신을 사량하여
눈물로 키운
사량화를 보거든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하늘이 사량 물이 되고
그 물 안에서 해가 뜨니
비익조의 사량화는
당신 지나는 곳에
아니
들려다 보는 그 눈에
눈물로 살아 있을 것입니다. –미미박, <사량화> 전문.

* 비익조..암수의 새가 날개가 하나씩 이라 짝을 짓지 못하면 날지 못하는 사랑의 새.



꽃잎.2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에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가는 소란을

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거룩한 우연을 위해서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삐뚤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
꽃은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삐뚤어지게

내 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
못 보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떨리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영원히 떨리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세요
보기 싫은 노란 꽃을 -김수영 <꽃잎.2> 전문.


참꽃

저기
오는 봄
역적같이 오는 봄을 보아라
어름 겹겹 근심 쌓인 어깨를 벗고
기를 쓰고 능선을 넘어오는
참꽃 보아라
긴 싸움 끝에
그 쓰린 상처 위에
그리하여 눈물짓듯 덥썩 가슴에
차랑차랑 돋아나는 우리 사랑 보아라
설움도 눈이 부셔
나는 노래로도 나는 이 봄을 다 채울 수 없는데
저 맵디매운 조선처녀 보아라
돌이킬 수 없는 꽃
지쳐 돌아온 오늘 밤 그대에게
찬란히 몸을 열어 넋까지
끝내 바치고야 말 꽃
참꽃을 보아라 -안도현, <참꽃> 전문.


들꽃


축포가 터지고
관중들이 발을 구르고
건각들은 일제히 뛰었다.

땀에 흥건히 적시며 온 몸으로 밀고 나아가는
저 필사의 力走
승패의 互角
그리고 스탠드에서 터지는 함성,
여기서 지면 안 된다.

하나의 큰 운동장, 이 세상을 보며
神도 고함을 지르고 계실까,
그라운드 가득히 흙 먼지가 일고
승자의 머리에 월계꽃이 꽂혀지지만

운동장은 안다.
꺽인 꽃은 언제인가 버려진다는 것을,
해가 저물고
관중들이 뿔뿔이 흩어진 뒤
보라, 그라운드에 버려져 시든 꽃잎들을.
그러나 비어 있는 운동장은
외롭지 않다.
조용히 누워 우주를 향해 눈을 뜨는
저 충만의 시간,
勝者의 발에 짓밟힌 땅에도 그는
한 그루의 들꽃을 피우는 까닭에. –오세영, <들꽃> 전문.


풀에게

니네들 지금 뭣 하는 것인가

대지의 살결에
등뼈를 곧게 눕히고
기쁜 초록빛
해일로 해일로 일렁이면서
수상쩍게 고요하기만

예수의 몸을 치던
서른 아홉번의 채찍,
그 서른 아홉번을 낫으로 잘라도
퍼렇게 환생하는
대지의 연인.
정녕 못 말리겠는 순 정이로구나
햇빛 가루 속에
몰래 몰래 풀씨 섞어
휘파람 날리면서
초록의 피 질펀히
초록빛 전율 한창이로구나

참깨 쏟아지듯
작도 칼날에서도
새 씨알 부스스 떨구이는
니네들, 풀들 --김남조, <풀들에게> 전문.



화신(花信)

창가에는
동백꽃

연못가엔
앵두꽃.

앞뜰에는
오얏꽃.

울 가에는
돌배꽃.

문 앞에는
췌리꽃.

마당에는
살구꽃.

시인의
산가 에는 온통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새봄 축제가 한창이다. -정용진, <화신> 전문.


생명 꽃


내 가슴에 피어나는
시들지 않는 생명꽃
물을 주지 않아도
비료를 뿌리지 않아도
은비 나리듯
아롱지게 피어나는
생명의 줄기
언제나 떠나지 않는
내 안의 그림자
잊을 수 없고
끊을 수 없고
떠날 수 없는
오직 한 사람
그 여운의 목소리가
내 영혼에 드리워 있다. –오사라, < 생명 꽃> 전문.


이끼꽃


깨끗한 눈 속에서 핀 이끼 꽃
아마도 노을을 좋아 했나 봐
아마도 해님을 사모 했나 봐
그러길래 해 같은 붉은 빛이지


수 천년 비바람 묵묵히 견디다
썩어서 흙으로 되돌아가는
고목의 아픔을 위로하고
그 먼 태고적에 준비 했나 봐

황량한 숲속에다 잔치 베풀고
맑고 맑은 흰 눈을 초대하여서
겨울을 따뜻하게 안아주려고
타는 듯한 불꽃으로 번져 가나 봐 -정문혜, <이끼 꽃> 전문.


꽃 사람


아득히 멀리 서도
꽃의 눈빛을 보는 사람

그 멀리에서도
꽃의 숨결을 듣는 사람

여린 꽃 어울림에도
화들짝 놀라
하루에도 수없이
꽃 속으로 달려가
꽃이 되는 사람

사람아,
사람아,
꽃의 혼을 지닌 사람아 -홍인숙 (그레이스,) <꽃 사람> 전문.


하여꽃


작고 존재 미미해도
꽃이 될거야
기어이 저승 같은
지하를 탈출해
꽃으로 필거야


태풍에 등이 굽어도
다시 허리 펴고
반드시 꽃 피울거야

피고지고 몇번을
다시 태어나도
꽃으로 남을 거야

엄동을 건너서도
또다시 꽃만 될거야. –정정인, <하여꽃> 전문.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존재의 인식과 실존이 돋보이는 명작이다. 꽃과의 일체감이 너와
나와의 주체와 객체로 공존하면서 사랑의 감정을 공감케 하는 “인식의 시”로 이해되고 있다.
사랑이 일방적일 수 없듯이 주체와 객체가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충실하며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되어 줄 수 있을 때에만 진정한 사랑을 서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인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관념은 꽃이다. 속삭임, 울음, 피 흘림, 핏방울, 정적,
호심으로 표현되면서 관념과 보조 관념으로 표시, 꽃을 은유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꽃이 만인의 사랑의 표상이 되듯 많은 시인들이 꽃을 시의 주제로 택하고 싶어 한다.
꽃은 시인의 사랑의 대상임이 분명하다. 이를 통하여 자신의 시심을 독자에게 순수한

향기로 온전히 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곧 시인의 진실 된 마음이다.
이 작품을 쓰면서 강하게 느낀 것은 “꽃” “장미” “낙화” “들국화” “해바라기”
“민들레”가 여러 시인들의 시의 주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는 서정의 표상이라 그런 것 같다. 이는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같은 심정 같다.
이육사는 독립 운동하다 잡혀서 중국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수인 번호가 264라서
그 이름을 이육사라 하였다 하거니와 “청포도”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꽃에는 정정인의 ‘하여꽃’과 같이 인간의 상상과 다짐으로 마음속에 새겨 피는 상상화도
있을 수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의 꽃인가?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서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늘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이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전문.
모란

의무교육을 받던 시절 나는 오촌 오빠에게 못 생겨도 좋아 매치 매치 바 두 개 얻어먹었어요. 서울역에서 내려 가정부로 갔을 때, 게브랄티를 장복하는 주인아저씨가 두 돈짜리 금반지를
사 주더군요. 역시 중요한건 돈이었어요. 여관 조바로 있을 때는 고스돕 하던 일곱 사내와
한 방에서 삼만 오천원을 받기도 했어요. 한번은 군대 나가는 아이들 세 명에게 공짜로
주었더니 그 애들이 울더군요. 나도 울었어요. 눈물이야 틈나면 한꺼번에 쏟으려고 감춰
뒀지만 나에게도 줄 수 있다는 게 고마워서 삼분지 일만 눈물을 흘리기로 했죠. 그 애들이
말 했어요. 넌 국민훈장 모란장감이야. 편지 할게 그렇지만 모란이 아무 때나 피나요.
모란이 피면 꽃잎에 더운 눈물을 씻고 다시 시작 할래요. 그냥.
-박세현, <모란> 전문.

백목단(白牧丹)

백목단엔 규중(閨中) 여인도 시새워하리
풍류랑(風流郞)도 또한 부끄러울 것을
지난 밤 달은 물같이도 밝아
뜰에 들자 선뜻 오는 그윽한 향기 -위장<韋莊>, <백목단> 전문.


함박꽃(芍藥)

이제야 피는 양은 때가 늦어 그리는지
푸른닢 사이사이 흰숭이 붉은 숭이
제여곰 수줍은 듯이 고개 절로 숙인다.

유달리 풍성하고 화려한 그 얼굴을
욱어진 녹엽(綠葉) 속에 으늑히 숨겨 두고
행여나 뉘라 알가봐 형기마자 없더라. -가람. 이병기, <함박꽃> 전문.

꽃은 순결이요, 희망이요, 행복으로 불리는데 반해 김영랑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기다림과 슬픔과 이별과 눈물을 상징하였다.
인간이 너무 슬퍼도 눈물이 나지만 가지고 싶었던 것을 성취하고 나면 기뻐서도 눈물을
흘린다. 꽃말은 “부귀, 성실”이다.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는 영원의 시인 영랑, 그는 죽어서도 봄 속의 모란,
모란 품속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모란이 박세현의 시속에서는 6.25 동란을 겪고 민족의 아픔 속에서 우리 누이들이
처절하게 짓밟히며 살아간 아픔의 실상으로 시인의 마음속에, 그리고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앙금으로 남는다.
함박꽃은 목련과 식물로서 이른 봄 붉은 꽃 대궁으로 언 땅을 가르고 솟아 흰 꽃이
탐스럽게 피는데 눈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아 함박꽃이라 하였단다.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비유하여 “서면 작약이요, 앉으면 모란이요, 걸어 가는 모습은
백합이로다.”할 만큼 우리의 사랑을 받는 꽃으로 뿌리는 약재로 쓰이고 꽃말은“ 분노.
부끄러움”이다.

목련화

눈부시다 목련화여
그리운

마음 두 손 모아라
푸르른 목련꽃 가지가지
황금빛 촛대에 피어난
불꽃
아, 숨어사는 새 한 마리
푸르른 하늘로 날개를 펴네

그립도다
목련화여
떨리는 이 마음 두 손 모아라
푸르른 목련꽃 사이사이
황금 빛 등불에 어리는
얼굴
아, 타오르는
꽃 한 송이 푸르른 하늘로
꿈길을 가네. -박제천, <목련화> 전문.


목련

아른 아른
시내건너 앞산 마루
아지랑이 자진가락

면화구름 피어나듯
앞뜰에는 백목련
뒤 창가엔 자목련
대지가 몸을 푸는 울 가에는
차가운 봄의 향기

애련(愛戀)의 입김으로
피고 지는 목련 꽃
청초한 몸매
그윽한 면화구름 숨결

피어나듯
앞뜰에는 백목련
뒤 창가에는 자목련. -정용진 <목련> 전문.


목련


돌층계 밟아 올라
비로전(毘盧殿)을 안고 돌면

새로 핀 동자불(童子佛)이
가지 끝에 앉아 놀며

백목련
눈 뜨는 빛이나
보고 가라 이르더라. –백수. 정완영, <목련> 전문.


목련


달빛 아래 선
너를 대하여
터져 나오는 노래
사랑의 충동을 알았네.

한해, 또 한해
다시 네 모습 벙그는 세월을
나는 노래하며 기다리리니
네가 나의 뜰에 머문
이 봄날 늦은 밤
아이처럼 이리도 가슴 두근거리며
앉았음은
아직도 네 어여쁨에
눈 떠있는
내 순수를 향한 기쁨 때문일까? -허영자, <목련> 전문.


목련

알싸한 겨울 향기
아직 코끝에 남았는데

보송한 털옷입고
살며시 고개 내민
성마른 봄맞이 꽃

집집마다
거리마다
고운 연등으로 내걸리는
따스한 사월을 그리며

오늘도 찬 바람 속
꿋꿋한 볕바라기 -이용희, <목련> 전문.



자목련

떠돌며 헛산 세월
양지 울 가 버텨놓고

이제는
누구의 한(恨)이던
후련토록 울어보자

간밤에 찬비 맞아
올올이 해진 가슴

바람 멎은 뒷 뜨락에
자색으로 멍이 들어
향으로 되살아 나는

저녁노을
서러운 넋

창가에서
홀로 피고 지는
자목련 옛 등걸. -정용진, <자목련> 전문.
자목련 사랑


우듬지 끝에서부터
수런대는
작은 속삭임 정겨운데

불화살로 날아든
애닯은 사연 하나
칼 바람 되어 가슴 저며도

촉촉한 눈빛에 어린
속내 깊은 눈물,
자주 고름으로 훔쳐내고

애절한 그리움
소담스레 피워 낸
자줏빛 사랑

봄이 오는 길목에
버선발로
그대, 마중합니다 -최미화, <자목련 사랑> 전문


백목련.1

개벽 하늘
열린 가슴

돌 담장 울 가에선
봄 햇살이 깃을 펴고

바람 한 점 일어서면
가지마다 학(鶴)이 내려

사당 뜰 돌계단을
향이 되어 오르는 가

서천에는 맑은 구름
앞산에는 아지랑이

옛 임의 발소린 양
저어오는 강물소리

산 꿩이 알을 고르는 오후
후두둑 꽃잎 지는 백목련. -정용진, <백목련.1> 전문.


백목련.2

마음이 한가하면
생각들도 소박해져
언 몸으로 지난 삼동(三冬)
거친 흙에 섰더라도

대쪽 같은 성품으로
한 생을 여민 충절
돌계단 사당 앞에
구름으로 일어선다.

외길로 산 뜻이라
몸매도 바르나니
천품이 옮아와
향으로 넘치는 가

이 봄도
마른 가지마다
혼으로 살아 숨쉬는
강물소리 들린다. -정용진 <백목련.2> 전문.


백련(白蓮)

내 가슴 무너진 터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솟아난 백련 한 떨기

사막인 듯 매 마른 나의 마음에다
어쩌자고 꽃망울 맺어 놓고야

이제 더 피울래야
피울 길 없는 백련 한 송이

왼 밤 꼬박 새어 지켜도
너를 가리 울 담장은 없고

선머슴들이 너를 꺽어 간다손
나는 냉가슴 앓는 벙어리 될 뿐

오가는 길손들이 너를 탐내
송두리째 떠간다 한들

막을래야 막을 길 없는
내 마음의 망울 진 백련 한 송이

차라리 솟지나 않았던들
세상

없는 꽃에도 무심한 것을

너를 가깝게 멀리 바랠 때마다
퉁퉁 부어오르는 영혼의 눈시울 -구상, <백련> 전문.


백목련 꽃 그늘에서


밤사이 백목련은
화들짝 피었는가
유백색 부시다 못해
마음 시려 드는데
어미닭
병아리 부르는 소리
연잇는
물결인가 -고하, 최승범 <백목련 꽃 그늘에서> 전문.



백목련

우유빛 얼굴
봄 우물마다 고인
봄 하늘의 함성

하늘에 오르지 않고
이 지상에 남기로 한 꽃잎들
소리 없이 흩어지고 있네

먼 길 떠나
돌아오지 않는 사도들이
벗어놓은 신발들

그 신발들의 먼지를
보슬비가 씻어 내리고 있네. -김영교, <백목련> 전문.

목련

먼발치서 바라보면
마른 가지에 내려앉은
희디 흰 설움

겨울의 긴 전설이
이제,
네 가지 끝에
머물었구나

1월의 뼈 시린 갈등에
숨 죽여 온 삶
찬바람 속에 얼어붙어
이제야 표출된 말없는 언어
조심스레 숨결을 턴다

기나긴 여정의 촛불
밝혀 들고
하늘 가득 외로운 목줄기로
순백의 드레자락
드리운다
가까이 엔 눈부셔
차마 못보고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마른 가지에 내려앉은
희디 흰 설움. -장태숙, <목련> 전문.


목련

살얼음 품속에
설어움 놓고 나온
겨울바람 아씨여

뾰족이 토라진 입술
곱게 흘기는 눈꼬리로
치마폭 감아 쥐고 돌아서는
하얀 버선발
눈이 시리다.

유혹을 몰고 늘어지는 나비는
흩는 향기
나래로 접어들고
조용히 아미를 세우는데

이별을 아는
하얀 날개
어느새 땅 위에
흐느껴 눕고 있다. -조옥동, <목련> 전문.

목련.2

2월
눈보라 속에
사춘(思春)의 망울이 부풀더니

오늘
이 4월의 아픈 하늘에
울려 퍼지는 찬가처럼
일제히 피어난 꽃들.

꽃술 덥히는 햇볕은
옅은 빛결을 띠우며
넓고 맑은 화관(花冠)위에
향기로운 이야기를 피운다.

바람이 분다!
어디서 오고 있는 것일까?
이 복된 날에
무슨 짓궂은 장난인가!

비마저 내린다!
눈물처럼 내리고 있다
분명 눈물일수가 없는데
비가 내린다!

밤을 새워 꽃잎들이 졌다.
지친 듯 떨어져 누운 꽃잎들은
해 저문 나라 티베트 공주의
어지러운 잠자리를 생각ㅎ게 했다. -김용팔, <목련.2> 전문.


철로 가에 핀 목련

석탄가루 꽃가루 함께 날려 오는
철로, 그 어두운 지축 위에서
달빛처럼 흔들리는 너,
흔들리면서 꽃을 벌리고
흔들리면서 꽃을 떨구는 너,
그러나 처음부터 순결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 순간도 진정할 수 없었던
그 어둠으로 인하여
끝내 지쳐 피어나는
눈물 같은 저 꽃으로 인하여
비로서 눈부시구나,
네 하얀 살점 열어 보이는
은밀한 시간 위로도
검은 기적소리 지나가고
너를 만지면 이내 석탄가루 묻어나지만
너의 향기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노래처럼
저만치서 홀로 빛나는구나 -나희덕, <철로 가에 핀 목련> 전문.



목련 앞에서


겨울이 길었어도
고운 숨결 상한데 없고
봄이 변덕 했어도
흠 한 점 없구나

견줄 꽃이 없는
그 해 낙낙한 미소
낮에는 흰 구름
밤에는 둥근 달 대하듯
가슴 메우고

손도 대보고
얼굴도 부벼보면
그거야 어디
소녀의 살결이지
꽃잎이더냐! -반병섭, <목련 앞에서> 전문.



목련이 질 때


누가 기다리기에
새벽 길
알몸으로 달려 왔나.

누가 부르기에
머리채를 틀고
애처러운 얼굴 내밀었나.

어서 오면
먼저 떠나는 길을
겨우내
사무친 그리움
사리지 못하고
꽃잎끼리 누웠다.

목련이 질 때면
구름 따라
여행 떠나는
3월 나그네. –전경배, <목련이 질 때> 전문.


이른 봄 벗은 몸(나목)으로 아지랑이의 자진 가락에 몸을 푸는 꽃이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그리고 목련 꽃이다. 이들은 봄의 전령으로 지루하고 기인 겨울의 터널을 지나
무거운 외투를 벗어 던지고 날아 갈듯 한 풀색 봄 옷을 걸쳐 입은 여인, 모든 것이 기쁘고
신나야 할 터인데 그 속마음이 “자색으로 멍이 들어 향으로 되살아 나는 저녁노을
서러운 넋”에 한(恨)이 옮아 나고 후두 둑 백목련 지는 모습에서 옛 임의 발소리가
들려오는 환상과 착각을 느끼게 한다. 꽃말은 “연모(戀慕), 장려(壯麗)”다.
기뻣 던 일들은 시간이 지나가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뇌리에 간직 되어 간간이 되살아 나지만, 애증의 괴로웠던 순간들은 두고두고 아픔으로 반복되어 마음을 괴롭힌다.

쇠인냥 억센등걸 암향부동(暗香浮動) 어인곧고
눈바람 분분한데 봄소식을 외오가져
어즈버 지사고심(志士高心)을 비겨 볼가 하노라 -위당 정인보의 <시조> 전문.


매화

매화꽃 다진 밤에
호젓이 달이 밝다.

구부러진 가지하나
영창에 비취나니

아리따운 사람을
멀리 보내고

빈 방에 내 홀로
눈을 감아라.

비단옷 감기듯이
사늘한 바람결에

떠도는 맑은 향기
암암한 옛양자라

아릿따운 사람이
다시 오는 듯

보내고 그리는 정도
싫지 않다 하여라. -조지훈, <매화> 전문.



매화


봉곳이 일어서는
새색시 젖가슴
통통하게 물오르는 소리

은하수 넘쳐 흐르는 밤
달님이 흘린
눈물 방울인가

첫사랑 어린 가슴
하얗게 밝힌 기다림으로
멍울진 영혼이 토하는
진주알인가

초경 맞은 소녀 입맞춤처럼
수줍은 비 내리더니
톡톡 오각으로
터지는 꽃망울

시리도록 해맑은
은종 소리가 난다
수정처럼 반짝이는 소리 -장효정, <매화> 전문.



춘매(春梅)


지루한 겨울잠
뜬눈으로 지새우고

앞산 잔설(殘雪)이
토해내는
매서운 서릿발에

화사하게 웃고 섰는
춘매(春梅) 옛 등걸

갈 것이 가고 나면
올 것이 못 올 것인가

게으른 선비의
늦잠을 일깨우는
그윽한 향
손 시린 호문목(好文木)

올해도
글 읽는 소리
고을 가득 넘치오라. –정용진, <춘매> 전문.


설중매(雪中梅)


간밤
한월(寒月)이
설안(雪案) 에 밝더니
밤새
청기와 골 골마다
백사(白沙)로 덮여있네.

청산(靑山)은 백화(白花)를 달고
고목 가지마다
설화(雪花)로 피었구나.

이아침
세한삼우(歲寒三友)
올곧은 선비의
지조(志操)로 운 천품으로
산가(山家)를 가득 채우는
설중매의 그윽한 향기. –정용진, <설중매> 전문.


홍매(紅梅)


얼음 밑에
개울은 흘러도

남은 눈 위엔
또 눈이 내린다.

검은 쇠붙이
연지를 찍는데

길 떠난 출 꽃들
코끝도 안 보여

내 영혼 스스로
입을 맞춘다. –김상옥, <홍매> 전문.


매향(梅香)


봄은 아직 저만치
양지 바른 산골짜기
부풀어 오른
진달래 꽃망울
속에나 깃 들어
있는 줄 알았더니

오늘
학교 현관을 들어설 때였다
봄은 느닷없이
내 透明한 갈비뼈 사이로
갓 피어난
紅梅花 한 다발을
슬쩍 디밀었다

그래서 지금
머리끝에서 발톱 끝까지
내 안에 그득히
차 있는 향기
紅梅花 은은한
그윽한 향기 -박희진, <紅梅花> 전문.



설매부(雪梅賦)


조춘잔설(早春殘雪)이
산록에 차가운데
매화 옛 등걸
눈망울이 슬프다.

봄, 나비도
늦잠이 깊었거니
게으른 시인의
시심(詩心)을 일깨우는
설중매(雪中梅)의 고고한 자태여.

올곧은 선비의
지조(志操)로 운 천품이
호문목(好文木)으로 버텨 서서

이 아침
필력(筆力)이 미진(未盡)한
내 서창(書窓)에도
지사고심(志士高心)의
설향(雪香)이 따사롭다. –정용진, <설매부> 전문.

옛날 선비들은 세한삼우(歲寒三友)로 불리는 송죽매(松竹梅)와 사군자(四
君子)로 칭송을 받는 매란국죽(梅蘭菊竹)을 사랑했다. 이는 선비가 생명으로
삼는 지조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화가들의 동양화의 표제로 귀한 대
접을 받고 있다.
매화의 꽃말은 “미덕. 고결. 정절”이고 풍란의 꽃말은 “신념”이며, 국화의
꽃말은 “고결(백). 고상(적). 실연(황)이고 대나무의 꽃말은”충절. 절개“다.
선인들은 매화의 용모, 난의자태, 국화의 향기, 대나무의 소리(梅容, 蘭姿,
菊香, 竹聲)을 사랑하였다.
고산(孤山) 윤선도는 수, 석 송, 죽, 월(水, 石, 松, 竹, 月)을 다섯 벗이라 하
여 각기 시를 지어 오우가(五友歌)를 불렀으니 오늘날 국문학에서도 송강(松
江) 청철의 송강가사와 더불어 고전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난초(蘭草)

난 초는
얌전하게 뽑아올린 듯 갸륵한 잎새가 어여쁘다

난초는
건드러지게 처진 청수 한 잎새가 더 어여쁘다.

난초는
바위틈에서 자랐는지 그윽한 돌 냄새가 난다.

난초는
산에서 살던 놈이라 아무래도 산 냄새가 난다.

난초는
예운림(倪雲林) 보다도 고결한 풍모를 지니었다.

난초는
도연명(陶淵明) 보다도 청담한 풍모를 갖추었다.

그러기에
사철 난초를 보고 살고 싶다.

그러기에
사철 난초와 같이 살고 싶다 -신석정, <난초> 전문.


난초(蘭草)


난초(蘭)닢은
차라리 수묵색(水墨色).

난초닢에
한밤에 여는 담은 입술이 있다.

난초닢은
별빛에 눈떳다 돌아 눞는다.

난초닢은
드러난 팔구비를 어쨔지 못한다.

난초닢에
적은 바람이 오다.

난초닢은
칩다. –정지용, <난초> 전문.





성근 일 덮어두고
텃밭에 김을 맨다

마음에 점을 찍고
마루에 오침 들자

창가에
선비 향내가
살포시 흔들고

가녀린 잎새들은
실바람에 몸을 싣고

언제나 푸른 빛에
한평생 살면서
이슬로
꽃 마디마디
한 방울씩 매단다 -이석렬, <난> 전문.


난 꽃 연가

종일 마음이 쓰러진다
누가 주고간 관음소심
오늘 연 풀빛 꽃잎이 터졌는데
작은 꽃잎에 내 마음 쓰러진다

어제는 밤새 걸어
겨우 새벽 잠에 도착했으나
거친 그리움이 발길에 채여
넘어지며 자빠지며
깨어보니 머리맡이 엉망으로 흩어지고
마음 한 쪽도 떨구고 갔는지
내 가슴도 한 쪽 베어 갔는지…

걸어서는 갈 구 없어
몇 날 며칠 관음소심만 바라본다
엇갈려 펼쳐진 잎새가
어젯밤 꿈 속의 갈림길 같은데

분명한 이정표로
오늘, 꽃 한 송이 핀다
내 마음은 쓰러지고
향기 그득한 진실에
내 마음은 자꾸 쓰러지고. –김영은, <난 꽃의 연가> 전문,


풍란

바람이 좋아서
바람을 마시고
이슬이 좋아서
이슬을 달고
고목 등걸에 기댄 채
풍란이 자란다.

앞산 중턱에
초승달이
애처롭게 걸리면

초록 장삼에
박꽃 같은 동정을 달고
한(恨)에 묻혀 춤을 추는
여인의 자태여라

이른 새벽
정화수로 혼을 씻어
향으로 흐르는 숨결.

오늘은
너의 몸매가
학이요 옥으로
더욱 찬란하구나.

바람이 좋아서
바람에 취하고
이슬이 좋아서
이슬에 숨어
청산리 벽계수를 기다리는
황진이야. -정용진, <풍란> 전문.


한란(寒蘭)

날 세워
창살을 베는
서슬 푸른 넋이 있다.

한 목숨
지켜 낼 일이
갈수록 막막하건만

향만은
맡길 데 없어
이 삼동을 떨고 있다. -김상옥, <한란> 전문.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 다 지나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네 홀로 피였는다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이정보, <시조> 전문.

국화 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 전문.


국화 꽃

오늘의 밤은 없어도
달은 떴고
별은 반짝였다.

괴로움만의 날은 없어도
해는 다시 떠오르고
아침은 열렸다.

무심만이 내가 아니라도
탁자 위 컵에 꽂힌
한 송이 국화꽃으로
나는 빛난다. -천상병, <국화꽃> 전문


국화



국화
형은 솔
아우는 대
저녁 이슬 잔 들고
아침 햇빛 이어받아
눈부시고 더욱 아름다워
향기 더욱 향기로워 -이세겸 <국화를 읊음> .


백국(白菊)

나이 오십
잠이 맑은 밤이 깊어진다.
머리맡에 울던 귀뚜라미도
자취를 감추고.
내 방구석이 막막하다.
이런 밤에
인생은
날무처럼 밑둥에 바람이 들고
무릅이 춥다.
지천명(知天命)의
뜰에는 백국(白菊)
서릿발이 향기롭다. -박목월, <백국> 전문.

들국화

들녘 비탈진 언덕에 늬가 없었던들
가을은 얼마나 쓸쓸했으랴
아무도 너를 여왕이라 부르지 않지만
봄의 화려한 동산을 사양하고
이름도 모를 풀 틈에 섞여
외로운 계절을 홀로 지키는 빈들의 색시여
갈꽃보다 부드러운 네 마음 사랑스러워
거칠 은 들녘에 함부로 두고 싶지 않았다
한 아름 고이 않고 돌아와
화병에 너를 옮겨 놓고
거기서 맘대로 자라라 빌었더니
들에 보던 그 생기 나날이 잃어지고
웃음 걷운 네 얼굴은 수그러져
빛나던 모양은 한잎 두잎 병들어 갔다.
아침마다 병이 넘는 맑은 물로
들녘의 한 방울 이슬만 못하더냐?
너는 끝내 거칠은 들녘 정든 흙 냄새 속에
맘대로 퍼지고 멋대로 자랐어야 할 것을.....

뉘우침에 떨리는 미련한 손이 이제
시들고 마름 너를 다시 않고
푸른 하늘 시원한 언덕아래
묻어주러 나왔다
들국화야!
저기 너의 푸른 천성이 있다. -노천명, <들국화> 전문.


들국화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수하게 겹친 이 순간이- -천상병, <들국화> 전문.


들국화


가을 햇살 따스한
돌담 울타리
들국화의 하얀 얼굴이
말 없이 고개를 흔들고 있다.

황소 발자국 깊이 패인
진흙길 돌아온
서러운 긴긴 세월
가슴 깊은 곳
주름으로 피어있어도
새벽 길가 풀섶에
맑은 이슬로 남아
눈물이 되어 흘러 내린다.

기억의 열매들이
하나 둘씩
넓은 뒷뜰 마른 낙엽에
싸여 숨쉬고
하얀 들국화의 웃음은

석양을 바라보는 두 쪽이 된 가슴에
짙은 향기로 살아나
포근히 안아준다. –박효근, <들국화> 전문.


산국(山菊)


별보다 더 고운
숨결이어라.

찬 이슬 동그라미
받혀든 잎새마다
아침으로 퍼지는
빛이 스미어

자는 듯 피로조차
이냥내 잊었음이리니
온산 단풍 드는 새
피어났는가.

맑은 눈
별보다도
더 고운 숨결. -임인수, <산국> 전문.

송림의 눈이오니 가지마다 꽃이로다
한 가지 꺾어내어 님 계신데 보내고져
님이 보신 후에야 노가지다 엇더리 -송강. 정철 <시조> 전문.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시기며 속은 어이 비었는다
저렇고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고산 윤선도, <오우 사시가 에서>.

죽순(竹筍) 밭에서

죽순 밭에는
흥건히 고이는 울음이 흐른다
죽순 밭에는
나직히 고이는 달빛이 흐른다.

무엇인가 뽑고 싶은 가슴들이
무엇인가 뽑아 올리고 싶은 욕망들이
쑥쑥 솟아오른다
도란도란 속삭인다.
왕대 참대 곧은 줄기
다투어 뽑아 올리는 대나무밭
나도 한 구루 대나무 되어 서면
내 가슴 속에서
빠드득 빠드득 뽑아 오르는 소리
뾰족뾰족 솟아오르는 울음소리

…………………………………… -문병란, < 죽순 밭에서> 일부

송죽매(松竹梅), 세한삼우(歲寒三友)에서 절창을 가려 뽑아 여기에 옮겼다.
미당 서정주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는 역정이 마치 인생의 기인 과정을
인내와 고통으로 참고 기다리는 심정으로 엮었다. 고뇌와 인내가 없다면 어
떤 생명인들 환희와 감격이 있겠는가?
천상병 시인은 누구인가? 군사 독재정권시절 그들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술책

에 희생양이 되어, 그의 고백에 의하면 전기 다리미로 빨래를 다리듯 극 심한

전기 고문으로 몸을 망치고 인사동에서 그의 부인이 파는 차 값으로 연명을

하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 가서 아름다

웠 다고 말하리라.....“고 유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고 부의금으로 들어온 돈을 둘 데가 없어서 부인이 아궁이에 감춰
둔 것을 장모가 모르고 불을 지펴 다 태워 버렸단다. 본래 돈과는 인연이 전
혀 없는 인생 이었나 보다. 그를 고문한 자들의 후손들은 오늘도 큰소리치며
뻔뻔하게 저리 잘 들 사니 과연 역사는 아이러니칼하다. 모두 자숙할 일이다.
초정 김상옥은 시조의 대가다. “시는 언어로 빚은 도자기요, 도자기 는 흙
으로 빚은 언어라“고 정의를 내리는 맑고 올곧게 살아온 시인이다.
문병란 시인은 조국 민주화를 위하여 애쓴 시인이다. 그는“견우와 직녀란
시로 남과 북의 만남을 간절히 염원한 민족 시인이다.



(2)꽃은 사랑이다


산유화


산에는
꽃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이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 김소월, <산유화> 전문.


진달래(杜鵑花)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 우리다. –김소월, <진달래 꽃> 전문.

진달래

우르르 우르르 떼 몰려 가는
사냥꾼의 발끝에 채이면서 까지
진달래도 싱싱하게 피어나야 한다
짓밟힌 삼천리 구석구석을
해처럼 화안하게 밝혀 주면서
진달래도 싱싱하게 피어나야 한다
답답하게 휘덮은 화약 냄새를
사냥꾼의 잔인한 군호 소리를
개울물에 깨끗하게 흘려보내고
총과 칼을 떠다밀며 피어나야 한다
군림하는 사냥질에 짓뭉개지며
살 속에서 뼈 속에서
가슴 속에서
싱싱하게 피어 오르고
무슨 말을 따뜻하게
속삭여주고 .....
그렇다 진달래야 피어나거라
4월의 진달래야 피어나거라 -양성우, <진달래> 전문.

진달래

아직도
눈 덮인 산하
동면의 늦잠이
한창인데

서둘러 깨어서
아침노을로 번져오는
연분홍 진달래.

돌아보아도
바라보아도
냄새 나고 미천한
세상이지만

구차한 몸을
바위 억서리
그늘진 계곡에 버티며

서러웠던 세월
분노하던 함성처럼
몰려 서서
한 빛깔과 노래로
아픈 가슴을 열어
두견(杜鵑)의 한을 울어주는
애절한 그 마음.

지금도
역사의 뒷골목에선
탐욕의 장막을 치고
민중의 몫을 가로채는
속 검은 무리들의
진한 흥정이 무르익는데

둘이 결코
하나이어야 한다는
애타는 염원으로

맨 먼저 깨어서
조국 산하에 피어 오르는
한 겨레의 참마음
진달래의 뜨거운 혼. -정용진, <진달래> 전문.



진달래꽃 진달래 꽃


어찌 된 일인지 사월이면 흔들린다.
한 편의 시를 향하여 몸부림쳐도
꼼짝 않던 그 상상력이란 놈도
흔들리고 흔들려 끝내 방도 흔들린다.

어찌 된 일인지 사월이면 흔들린다.
시를 쓰는 손도 펜도 흔들리고
사월 사월 사월 사월이라 불러보는
입술도 심장도 유난히 흔들린다.

신나는 일이다. 사월이면 흔들린다.
진달래꽃 진달래 꽃 벙그는 바람에도
풀잎들 돌맹이들 덩달아 흔들리고
지쳐 누운 산천도 덩달아 흔들린다.

죽을 때 까지 안아도 싫증 안 날 사월에
두 팔을 벌리면 한아름에 안기는
한라산 백두산인 것을
진달래꽃 진달래 꽃 산천인 것을.

펜 닳도록 써도 한없을 사월인 것을.
하늘은 저리 막히고 무거워서
모가지를 모가지를 들 수가 없는가
사월 사월 사월 사월인 것을. –조태일 <진달래 진달래> 전문.



철쭉꽃

철쭉은
산적의 딸들인가.

손님 온 기척에, 고운 얼굴로
와락 문 열고 뛰어나와서도
웃을 줄 모르네.

산길 걷는 나그네는, 해를 따라
금새 두 등을 넘어 가고

두견새 울음
이제사 그치면, 또
산비둘기 울음으로 이어지는데,

떠가는 잠자리 비행기 소리 먼
오후가
못 견디게 외로워
하늘 높은 흰 구름과
짝지어 보고 싶을 때는
그 얼굴 그 자리에 둔 채,
치마폭 곱게 여미어
하늘로 오른다.

구름 배 타고 돌아오는 길
중간 어디쯤에서
나와 만나자. -김선현, <철쭉 꽃> 전문.



물 길러온 철쭉


언제부턴가 철쭉은 물긷는 소리를 냈습니다
온몸에 주렁주렁 물동이 매다는 소리
정원 쪽에서 물동이 매다는 소리
들려왔지만, 벌써 봄이 온 것인가?
나는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습니다 무시로
제 집을 드나드는 고양이라도 보는 것처럼

며칠 전에 철쭉은 어느 틈에
떠나갈 채비를 마친 듯했습니다
온몸에 주렁주렁 매달린 물동이가
천근이나 무거운 듯 휘청, 일어서는
순간을 하필이면 보아버린 나는
그 전날 처음으로 다가가 물통 속에
빠진 봄을 물끄러미 들여다 봤습니다

갑자기 사나운 모래바람이 불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 돌아가겠느냐?
물동이 하나 하나를 깨트려 제 발등에
불을 끄면서 사막을 건너 왔다는
발뒤꿈치에서 자갈 부닥치는 소리가
딱딱! 났다는 철쭉은 동이 하나를
느닷없이 팍! 집어 던졌습니다 -한혜영, <물 길러온 철쭉> 전문.

산에서 피는 꽃들은 대부분이 무리를 이뤄 피어 오르고 지며 산속의 새들도 몰려 사는데
소월의 마음은 애닯어 홀로 피고 지는 고독한 정경을 산유화에서 노래하였고,
진달래꽃에 이르러서는 진심으로는 이별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눈물도 흘리지 않고 차라리 꽃잎을 아름 따다 뿌리오리니 즈려밟고 가시라고
이별의 슬픔을 극도로 자제하고 사랑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였다.
꽃말은 “사랑의 즐거움”이다.
양성우의 “겨울공화국” 신경림의 “농무” 김지하의 “오적”은 군사정권 시절 금서로
묶여있던 시집들이다. 우리는 군화에 인권이 짓밟히던 그 시절 조국의 민주화를 갈망하면서
책가방을 뒤로하고 거리로 뛰 처 나가야 했던 어려운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진달래는
봄이면 우리 조국의 산하를 아름답게 수놓으면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는 꽃이다.
수유리 4.19 묘역에 해마다 봄이면 피어 오르는 진달래꽃을 보노라면 마음이 아려온다.
철쭉은 우리나라 강원도가 원산지이다. 진달래의 뒤를 이어 연분홍으로 산을 덮는데
꽃말은 “사랑의 기쁨”이다.

금강 봄맞이꽃


험한 벼랑에서 여물어진
무수한 금강봄맞이꽃의 풀씨들은
바람에 날려
내를 건느고 공장을 지나
연탄까스 아른아른 피어 오르는
외딴 함석지붕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종일 햇살 한 모금 들지 않는
뒤꼍 토담 밑에 다다른다

험한 벼랑에서 여물어진
무수한 금강봄맞이꽃의 풀씨들은
바람에 날려
장독대 가즈런히 반짝이는
시골집 뜨락을 그윽히 내려다 보다가
갓 태어난 복슬강아지의
보송보송한 솜털에
가서 딩굴며 몸 부빈다

험한 벼랑에서 여물어진
무수한 금강봄맞이꽃의 풀씨들은
바람에 날려
동강난 국토의 허리께 부근
철조망 치고 방공호 파대느라
빨갛게 파헤쳐진
황토의 속살이 하도 애가 말라
그 속으로 사뿐 내려 앉는다 -이동순, <금강봄맞이 꽃> 전문.


나리나리 개나리


누이여
또다시 은 비늘 더미를 일으켜 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두움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살아 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내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들의 영토 속에서
한 뼘의 폭풍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
다만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을
맨발로 산보할 때
어김없이 시간은 솟구치며 떨어져
이슬 턴 풀잎 새로 엉겅퀴 바늘을
살라주었다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이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 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나리 나리 개나리
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 -기형도 <나리 나리개나리> 전문.



개나리꽃


활짝 핀 개나리꽃이
울타리마다
얼굴을 내밀고 섰다
안녕하시냐고
반가이 인사하는 것일까
안타까이 기다리는 사람 있어
발돋움 하는 것일까

일제히 부르는 소리
손 들어 저으며
그리움을 찾는 소리
꽃잎마다 눈동자가 있어
그리운 사람 찾는구나
꽃잎마다 얼굴이 되어
그리운 이를 부르는구나

평양에도
지리산 산골마을에도
백두산 기슭 어느 외딴 마을에도
개나리꽃이 피었건만
기다려도 올 수 없는 사람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

모두가 개나리꽃이 되어
일제히 부르는 소리
모두가 개나리꽃이 되어
일제히 손을 젓는 모습
이젠 그만 하라고
한결같이 아우성치는 소리…-이우석, <개나리꽃> 전문.


개나리

눈 봉투
살 어름 우표 달고
겨울 다리 건너
속달로
날아온 얇은 햇살
입김으로 네 볼에 부치면

봄이
아, 터지는 소리
네가 받아 열어볼 때
그때쯤
샛 노랗다
온 천지가. 김영교, <개나리> 전문.


산개나리꽃

숲 속으로
숲 속으로 찾아 들어 가면
낙엽에 쌓인 옹달샘이
아무도 모르게 바위틈에서 흐르고..... .

물 위에 뜬 낙엽
훅 훅 불며
목마른 입 가져다 대이면
낙엽 냄새 풍기는
샘물은 단물.

산비둘기는
어디서 저리 우느뇨?
고개 들어 치어다 보는 눈에
산비둘기 보이지 않고.....

조름 조는 듯
고운 산개나리꽃
내 머리 위에서
방긋이 웃네. -장만영, <산개나리꽃> 전문.



산수유

꽃 시샘
수정같이 맑은 바람
언 강 갈라지는 소리에
늦잠 깬
산수유 한그루.

초승달
차가운 눈매에
달아오른
앞가슴 풀고
피워내는 노란 눈꽃.

개울 건너 삼박 골
민 씨네 낡은 기와집
돌 담 가엔
마고자 단추 같은
붉은 가을 열리겠네. -정용진, <산수유> 전문.



산수유 꽃


지리산 산동 마을
산수유꽃 천지 보면

울엄마 열일곱 적 아버지 열여덟 적
살짝이,
얼음 풀린 냇가
소풍 온 게 보입니다.

부끄런 꽃 그늘 아래
가만가만 돌아다니는

깜장 치마 하얀 저고리 아직 따뜻한 무명바지
괜스레
물방울이나 튕기는
풋사랑이 보입니다. –홍성란, <산수유꽃> 전문.


개나리는 진달래, 산수유와 더불어 우리 한국의 봄을 불러오는 꽃 소식의 화신이다.
눈이 내리 듯 노란 꽃송이들이 가지가지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마치 봄눈
내리는 거리를 걷는 착각을 느끼게 된다.
개나리는 우리나라 특산으로 물푸레나무 과 관목으로 꽃말은 “희망”이다

사과 꽃

나른한 윤 사월
따가운 햇살 받아

진흙 딛고
도리(桃李)인양
홀로 수줍은
사과 꽃.

어려서는 푸른 볼이
과년하여
꿈 빛으로 익어

서녘 하늘
황혼을
타는 저녁노을
빠알간 가슴. -정용진, <사과꽃> 전문.


사과 꽃

6.25 사변이 터진 몇 해 후
이북에서 월남 했다는 내 친구
경옥이 얼굴은 사과 꽃 같이 작았다
목청을 떨며 사과 꽃 노래를 불렀었다
이북에서 배웠노라는 소련 노래 사과 꽃
발바닥으로 마룻장 굴러 손뼉을 치며
아버지가 알면 혼 찌검이 난다면서
그 애는 졸라대면 사과 꽃을 불렀었다
우리가 이남에서 미국 노래를 배울 때
경옥이는 이북에서 사과 꽃을 배웠다
지금은 수녀가 된 내 친구 경옥이
소련에 핀 사과 꽃은 경옥이의 노래였다 -이향아, <사과꽃> 전문.


배꽃

써늘한게 흡사 눈과 같구나
향기는 사뭇 옷깃에 들어와
봄바람도 그렇게 정처 없는지
불어다간 자꾸 섬돌로 날리네 -구위(丘爲), <배꽃> 전문.


李花에 月白하고 銀漢이 三更인제
一枝春心을 子規야 알랴마는
多情도 病인냥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이조년(李兆年) 시조전문.


흰 자두 꽃

손아귀에 힘이 차서 그 기운을 하얀 꽃으로 풀어놓은
자두나무 아래
못을 벗어나 서늘한 못을 되돌아보는 이름 모를 새의
가는 목처럼
몸을 벗어나 관으로 들어가는 몸을 들여다보는 식은
영혼처럼
자두나무가 하얀 자두 꽃을 처량하게 바라보는 그 서글
픈 나무아래
곧 가고 없어 머무르는 것조차 없는 이 무정한 한낮에
나는 이 생애에서 딱 한번 굵은 손뼈마디 같은 가족과
나의 손톱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문태준, <흰 자두 꽃> 전문.


살구꽃(杏花)


해마다 강기슭에 피는 살구꽃
떨어저선 하얗게 물 위 돌다가
어디론지 물 따라 흘러가는 꽃
해마다 부질없이 폈다 지는 꽃.

밤마다 찬 자리에 피는 맘의 꽃
꿈 하늘을 고요히 떠서 돌다가
어디론지 그윽히 슬어지는 꽃
밤마다 보람 없이 폈다 지는 꽃.

2
하늘하늘
봄바람이
넘나드는 담 안에
연분홍 살구꽃이
송이송이 피였오.

하늘하늘
봄바람이
틀고 매는 사정에
연분홍 살구꽃이
송이송이 떨리오. -김억, <살구꽃> 전문.

많은 사람들이 빨간 사과를 보면 사랑을 생각하고 하트를 연상한다. 사랑은
꿈의 산물이다. 갖고 싶어 하고, 나누어 주고 싶고, 만나서 대화 하고 싶은
것이 진정한 마음이요, 본질이기도 하다. 사과 꽃의 꽃말은 “유혹이다. 처음에
는 불그레하던 꽃망울이 활짝 피고 나면 배꽃처럼 희어진다.
봄을 여성의 계절이라 부르고 가을을 남성의 계절이라 부르기도 한다.
시냇물 소리와 꽃의 향기, 따듯하고 포근한 햇살, 소리 없이 내리는 보슬비
마른 가지에서 햇 눈이 돋아나며 꿈을 키우는 계절, 앞산의 아지랑이와 계곡
에서 졸졸 흐름을 시작하는 시냇물 소리, 하나같이 꿈의 산물이며 여성적 것
이 그 특징이다.
살구꽃은 복숭아꽃과 더불어 우리와 친숙한 꽃이다. 울 가에 서서 시큼 털
털 한 살구를 따 먹으면서 우리는 서정을 키웠다. 나는 어려서 겁이 유난히
많아 울 가에 아름드리 살구나무에 살구가 주렁주렁 달렸어도 올라가 지 못
하고 동생이 따주는 살구를 먹으면서 나무가 자랄수록 밑의 가지가 위로 올
라가는 줄 알고 걱정을 하였는데 늦게 서야 밑가지는 그냥 있고 위에서 새
가지가 나오는 것은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쉰 일이 있다. 매화과의 관목
로 살구꽃의 꽃말은 “처녀의 수줍음”이다.



頭流山 兩斷水를 예듯고 이제보니
挑花뜬 맑은물에 山影조차 잠겼세라
아희야 武陵이 어디뇨 나는 옌가하노라 -조식(曺植) 시조전문.


복사꽃


할 말이 하도 많아 입 다물어 버렸습니다.눈꽃처럼
만발한 복사꽃은 오래 가지 않기에 아름다운 것, 가세
요, 그대 떨어지는 꽃잎처럼 가볍게, 연습이듯 가세
요, 꽃 자리 열매가 맺히는 건 당신은 가도 마음은
남아 있다는 우리 사랑의 징표겠지요. 내 눈에서 그대
모습이 사라지면 그때부터 나는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을 온전히 받아 내 스스로
온몸 달구는 이 다음 사랑을. –이정하, <복사꽃> 전문.


산도화

산은
구강산
보랏빛 석산

산도화
두어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 사슴
발을 씻는다. -박목월, <산도화> 전문.

청전 산수도(靑田 山水圖)에 3월 한나절 봄은 그대로 산수화요, 선인들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신선이 사는 동산으로 여겼을 만큼 도원의 가경은 아름답다.
일찍이 정지용 시인은 북에는 소월(素月)이 있고 남에는 목월(木月)이 있다. 라고
칭송을 아끼지 아니하였듯 두 시인의 자연을 읊은 시들은 일품이다.
박목월의 청 노루와 나그네를 우리 모두가 가슴깊이 새겨두고 애송하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시 산도화 1, 2, 3,편 을 감상하노라면 시냇가 곁에 와서 사슴이,
암 사슴이 발을 씻을 듯 한 상상의 착각을 불러오고 있다.
소월이 민족적 서정을 구구절절이 노래하였다면 목월은 극도의 언어를 절제하면서
자연의 시정(詩情)과 서정(抒情)의 세계로 독자들을 이끌고 가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홍도


옛날
올 아버님 소실댁은
두 볼에 연지 찌고
먼 발치서 쭈뼛쭈뼛
날 바라보더니

삼십 년도 더 되어
서울 어느 댁 담장가에
붉은 그리매 드리운 홍도(紅桃)는
울음인 듯 웃음인 듯
그저 난감한 눈길이네. –허영자, <홍도> 전문.


꽃망울 아침


이른 사월의 움트는 꽃망울을
봄비가 도다린다.
밤새 쉬지않고 재촉이다.
새가슴 어린 쌕씨를
서투른 신랑이 되여
첫날밤 새벽닭 동이튼다.

일년 내내 참았던 분홍빛 응어리에
아침햇살 물방울이 매달리여
나이어린 가지마다 반짝인다.
행여 참새라도 앉으랴 마는
조마 조마 마음 조려
수줍은 복숭아꽃 눈이 튼다. –박일재, (밝달) <꽃망울 아침> 전문.


복사꽃


그런 줄 알았지
알몸으로 뭇 사내들의 눈길을 잡더니만
한다는 짓이
제멋대로 달아 올랐으니 또
때가 된 것이여
봄 내에 환장한 저것이
매일매일 첫날밤이라니까 -강미화, <복사꽃>


애기메꽃


한때 세상은
날 위해 도는 줄 알았지

날 위해 돌돌 감아 오르는 줄 알았지

들길에
쪼그려 앉은 분홍치마 계집애. –홍성란, <애기메꽃> 전문.


영산홍

영산홍 꽃잎에는
산이 어리고

산자락에 낮잠 든
슬픈 소실 댁(小室宅)

소실 댁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

산 넘어 바다는
보름 살이 때

소금 밭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 -미당. 서정주, <영산홍> 전문.


영산홍

삼동(三冬)을
친구로 삼아
함께 지낼 양으로
영산홍 한그루를
양지바른 창가에
옮겨 놓았더니

앞산
초승달에 취하여
고향 산자락
꿈결에 젖다가

간밤 산천에
가득한
실비소리

이아침
윤기 흐르는 햇살에
두 볼이
연지 빛으로 붉었어라
춘하추동
사계의 풍경이
유채화로 투명한데

석양 산마루
아련한 전설에
애잔한 가슴이
노을 빛으로 익는구나. -정용진, <영산홍> 전문.

영산홍

나는 피가 없다
밤이 되면 내 피는 모두 어디로 가는 가
가슴을 쓸어 내리면
하얀 버즘

마르고 마른
눈물, 별이 뜨고
지평선을 떠나는 새 몇 마리
새 몇 마리 그들에게 나의 근심을 물어볼까
파랗게 떠는 돌들의 이마
내 몸을 빠져 나오는 눈부신

빛이,
나무의 끝에 닿는 순간 나의 세계는
변할 것이다.

어쩌다 무덤위로 태양이 솟구치고 다시
또 몇몇 사람은 누울 자리 찾아 땅 밑으로 내려갈 것이지만
빛의 허리를 부여잡고
그래, 울지 말자
꽃다운 나이 봄이 오고 있으니

죽어도,
나의 문 앞에서 죽자. -하재봉, <영산홍> 전문.

라일락

화정(花情) 아가씨는
실바람 따라
사뿌시 뜰을 건너
부끄러운듯이.....

이윽고 사나이는
“노크”를 알아 듣고
만면의 웃음을 띤 채
안을 듯이..... -김동명 <라일락> 전문.

라일락 꽃을 보면서

우리 집 뜰에는
지금 라일락 꽃이 한창이네.
작년에도 그 자리에서 피었건만
금년에도 야단스레 피어
그 향기가 사방에 퍼지고 있네.

그러나
작년 꽃과 금년 꽃은
한 나무에 피었건만
분명 똑같은 아름다움은 아니네.
그러고 보니
이 꽃과 나와는 잠시
시공(時空)에는 헤어져야 하니
오직 한번밖에 없는
절실한 반가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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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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